상식과 공정의 사회를 만드는 것은 대통령의 의무다.
전에 말한 대로 요즘 극단으로 치닫는 '김건희 리스크' 사달을 보면서 <시튼의 동물기>에 나오는 늑대 두목 '로보'의 짝이었던 '블랑카'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소수의 무리를 이끌며 미국 뉴멕시코주의 가축 수천 마리를 문자 그대로 도륙하여 농장주의 골칫거리였던 전설적인 로보도 결국 어리석기 짝이 없는 '천방지축' 블랑카를 덫으로 잡아 이용한 인간 집단의 지혜를 이기지 못했다. 인간의 군대나 검찰 집단보다 서열과 상명하복이 매우 엄격한 야생 늑대 사회에서 우두머리인 로보가 세운 위계질서를 마음대로 '파괴한' 그 털과 얼굴이 마치 성형을 한 것처럼 비정상적으로 눈처럼 흰 비앙카라는 암컷 늑대가 있었다. 남편 늑대인 로보가 매우 비상한 머리를 지닌 것에 비해 아내 늑대인 비앙카는 멍청하고 빈틈이 많았다. 그러나 남편 늑대인 로보가 그 무리의 알파 늑대, 곧 두목이라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다.
로보는 영악할 뿐 아니라 사악한 수컷 늑대 우두머리였다. 보통 늑대는 배고파서 사냥하는데 로보 무리는 즐거움을 위해 살육을 했다, 그래서 미국 농장주에게 더욱더 골칫거리였다. 농장주는 독약을 넣은 미끼에 똥을 싸버리는 놀라운 머리를 지닌 로보를 죽이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마침내 로보가 아니라 그의 아내 늑대인 블랑카를 잡아 죽이고 그 시체를 미끼로 삼아 로보까지 죽이는 데 성공한다. 블랑카는 로보와 다르게 멍청하고 나대기 좋아하는 암컷 늑대였다. 그래서 서열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늑대 무리에서 블랑카는 멋대로 굴었다. 알파 늑대인 로보를 앞서 나가는 것이 철저히 금지되었음에도 블랑카는 자기 맘대로 앞서나갔다. 그러다가 덫에 걸린 것이다. 분노한 농장주는 당장 블랑카를 죽이고 그 시체를 미끼로 삼아 로보를 유혹했다. 블랑카의 시체 냄새를 여기저기 묻히고 그 다리를 잘라 발자국을 내서 로보를 유인한 것이다. 평소에 매우 냉철한 지략을 발휘하던 로보는 블랑카의 시체 앞에서 광분하면서 이성(?)을 상실했다. 그래서 생각 밖으로 손쉽게 로보를 잡을 수 있었다. 잡힌 후 로보는 인간이 주는 먹이를 거부하고 결국 굶어 죽었다. 대단한 사랑이고 ‘곤조’였다. 이런 로보의 이야기는 나중에 전설이 되어 많은 만화, 소설, 영화가 만들어질 정도였다.
사랑은 눈을 멀게 한다. 사랑에 빠진 남녀는 실제로 이성이 마비된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사랑은 궁극적으로 종족 보존의 첫 단계인 짝짓기를 촉진하기 위해 유전자가 인간을 조종하려고 성호르몬의 분비를 최대한 촉진하는 방법에 불과하다. 특히 아직 전두엽이 완전히 발달하지 않은 20대 이전의 사랑이 불같은 이유는 성호르몬이 이성을 발휘하는 전두엽의 기능을 완전히 차단해 버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순수한 사랑이라고 하지만 생물학적으로 볼 때는 문자 그대로 맹목적인 충동에 이성이 마비된 일시적 현상일 뿐이다. 그래서 일단 짝짓기가 이루어지고 임신까지 성공하면 그런 성적 충동은 대부분 가라앉게 된다. 심지어 임신한 여자를 ‘혐오’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성적 쾌락을 즐기고 난 결과가 임신과 출산이고 아이가 태어나면 평생 그 아이의 양육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에 남자는 충격을 받데 되는 것이다. 그래서 20대 이전의 혈기로 사랑을 나는 남자는 특히, 결혼이라는 사회적 계약을 맺지 않은 남자가 도망가 버리는 일이 적지 않게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벌어지면 사회적으로 혼란이 일어나니 종교나 사회가 호르몬 분비가 끝난 남자의 ‘무책임한’ 도망을 막기 위해 여러 가지 이데올로기와 법과 제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
종교적으로, 특히 기독교에서는 사랑은 극도로 찬미한다. 물론 예수의 인간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과는 전혀 질이 다른 것이지만 그것이 그것이라고 선전한다. 가장 유명한 것이 바울이 <신약성경>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읊어댄 사랑 타령이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실 바울이 맞는 말만 골라서 했다. 배우자를 사랑한다면 배우자의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야 한다. 지금 윤 대통령을 보면 그런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이른바 ‘김건희 리스크’가 나라 전체를 들었다 놨다 하는 데도 김여사에 대한 윤 대통령의 사랑은 바울이 말한 수준에 이른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에서는 불의가 아니라 진실을 두고 기뻐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된다는 사실이다. 현재 윤 대통령의 장모는 사기죄로 법의 심판을 받아 감옥에 들어가 있다. 그런데 아내인 김여사도 그 사기죄와 더불어 김여사 개인이 저지른 ‘범죄 혐의’가 있다는 정황이 이미 드러나 있다. 불의가 의심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서라도 법의 공정하고 상식적인 판단을 받아보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언론에 들리는 말로는 ‘김여사’라는 단어만 들먹여도 윤 대통령은 ‘격노’한단다. 이는 사랑이 아니다. 물론 유교 전통에서는 제 식구 감싸기가 존재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아버지가 범죄를 저질러도 관청에 고발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가 불법을 저질러도 세 번 간언하고 그래도 아버지가 마음을 고치지 않으면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 자식의 도리라고 가르치고 있다. 현대 민주주의 법치 사회의 관점에서는 뭔 미친 소리인가 하겠지만 공자의 소신이 그렇다. 그러니 윤 대통령이 ‘김건희 리스크’에 대해서 저렇게 막무가내로 ‘아내 커버’의 태도를 유지하는 것을 유교적인 잣대로 해석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필부필부가 유교적 원칙을 따른다고 해도 최종적으로 한 집안이 망할 뿐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자리에 있는 자가 그런 잣대를 들이댄다면 나라가 흔들리게 되어 있다.
흔히 경국지색이라는 말로 ‘여자’가 국정을 농단하는 것을 빗대어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미 50을 넘긴 김여사가 그럴 경지에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여자의 참다운 미모는 50을 넘길 때 비로소 드러난다. 필러와 보톡스를 하지 않은 본연의 미모가 빛나는 여자가 참다운 미녀다. 사실 20대 이전의 여자는 모두 아름답다. ‘짝짓기’ 준비를 위해 여성 호르몬이 최대한 분비되는 시절에는 여성성이 최고조로 발휘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20대 이전에는 미녀와 보통 여자를 구분하는 것이 매우 힘들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미녀’가 아니어도 ‘짝’을 만나고 결혼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50살이 되어 여성 호르몬이 더 이상 안 나오는 시기를 맞이해도 미모가 유지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미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해외 유수 언론이 보도한 대로 김여사는 보톡스와 필러로 나이에 맞지 않는 외모를 유지하는 것으로 보이니 그런 미인 축에 들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이 김여사를 이 정도로 ‘커버 치는’ 이유가 사랑도 아니고 미모도 아니라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런 고민을 하다가 내린 결론이 바로 위에서 말한 블랑카 증후군이다. 알파 늑대로서 최고의 권력을 잡은 로보는 자신을 무조건 추종하는 무리 앞에서 블랑카의 일탈 정도는 허용해도 된다는 암시를 해주었다. 그래서 위계질서를 무너뜨리는 블랑카를 누구도 건드리지 못한 것이다. 그것이 무리에 위협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도 말이다. 로보도 알파 늑대로서 자기 능력을 과신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자신과 무리 그리고 무엇보다 블랑카를 지킬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그러나 늑대가 아무리 영악해도 인간의 지혜, 특히 집단 지성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윤 대통령이 아무리 서울대 법대를 나오고 사시에 합격하고 검찰총장의 반열에 오르고 마침내 대통령이 되었어도 집단 지성의 정점인 민심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현재 민심의 절대다수는 ‘김건희 특검법’을 발의하여 법 앞에서 공정하고 상식적인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아무리 알파 늑대라 하더라도 공정과 상식을 넘어설 수는 없다. 불공정과 몰상식의 결과는 블랑카와 로보가 몸으로 시전 했다. 이제라도 윤 대통령은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공언한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해야 한다. 한 여자, 더구나 여러 사달로 구설수의 정점에 오른 김여사를 구하자고 나라를 망칠 수는 없는 법이니 말이다. 총선 결과로 ‘검찰 사단’이 국민의힘을 장악한다고 해도 공정과 상식의 원칙은 무너지지 않는다. 불공정과 몰상식이 지속적으로 성공을 거둔 경우는 역사에 단 한 번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니 역사에서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 아내 사랑도 좋지만 나라 사랑이 더 중요하고 무엇보다 서민들이 현재 경제 파탄으로 벼랑 끝에 몰려 있으니 말이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민중은 결국 혁명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혁명은 무고한 국민의 너무나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 보여준 대로 말이다. 그러니 그런 ‘피를 보는’ 일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이제 정신을 차리고 본인이 선언한 공정과 상식의 원칙을 따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