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불사조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늘 독재 탄압이 만들어 준다.
이낙연이 민주당을 배신하면서 뱉은 말이 결국 부메랑이 되어 자기를 더 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낙연은 탈당의 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주당은 저를 포함한 오랜 당원들에게 이미 ‘낯선 집’이 됐습니다. 민주당이 자랑했던 김대중과 노무현의 정신과 가치와 품격은 사라지고, 폭력적이고 저급한 언동이 횡행하는 ‘1인 정당’ ‘방탄 정당’으로 변질했습니다.”
그러자 다름 아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 김홍걸이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두 차례에 걸쳐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이낙연 전 대표의 탈당에 부쳐]
과거 김대중 대통령님은 오랫 동안 정치를 하면서 늘 새로운 인물을 영입하고 시대에 맞는 새로운 시도를 하셨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안 계신 지금, 역할을 다한 옛물이 흘러나가면 새물이 그자리를 채워나가는 것도 그 정신을 지켜 나가는 방법입니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김대중 정신을 사칭하는 분들이 계속 나와도 김대중 대통령님의 정신은 민주당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 "김대중 정신이 실종"되었다는 이낙연 대표님, 정작 김대중 정신을 저버린 분은 대표님 본인입니다.”
이낙연은 아직 이런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이 한 말에 대해 일언반구가 없다. 사실 유구무언 아니겠나? 감히 김대중 정신을 버리고 김대중 정신을 운운하는 작태를 보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낙연은 이것도 모자라 다음과 같은 말까지 했다.
“후목불가조(朽木不可雕), 썩은 나무로는 조각을 할 수 없다는 공자의 말씀처럼, 지금의 정치로는 대한민국을 살릴 수 없습니다.”
이는 <논어> ‘공야장’ 편에 나오는 말인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宰予晝寢 朽木不可雕也 糞土之墻 不可圬也 於予與何誅 子曰 始吾於人也 聽其言而信其行 今吾於人也에 聽其言而觀其行 於予與 改是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재여가 낮에도 잠만 퍼질러 자니 공자가 말하기를 썩은 나무에는 조각을 할 수 없고 거름으로 쌓은 담벼락은 손질할 수가 없다. 그러니 재야를 꾸짖을 필요가 있겠나? 공자가 말하기를 처음에 나는 다른 사람에 대해 그의 말을 듣고 행동도 믿었는데, 이제 나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는 그 행동도 살펴보게 되었다. 재여 때문에 [나의 과거] 습관을 고치게 된 것이다.”
재여는 공자의 제가 가운데 말 잘하기로 유명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공자도 그의 말을 믿을 정도였다. 말과 행동이 일치할 것으로 믿었던 자가 말만 그럴듯하게 하고 행동은 전혀 딴판으로 하는 것이 한국 정치판에서 어찌 이낙연뿐이랴만, 이번에 민주당을 떠나면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더러운 말을 쏟아내는 이낙연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문재인 정부에서 보여준 ‘젠틀맨 이미지’가 다 사기였다는 말 아닌가? 이낙연은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이 0.73%p로 아깝게 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자다. 그의 부하가 이른바 ‘대장동 사달’ 관련 서류를 언론에 흘려 정치판이 개판이 되도록 한 장본인이었다. 이낙연이 그 사실을 몰랐다고 발뺌하지만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대선이 끝나고 나라가 망조가 들고 그에 대한 책임을 이낙연도 물어야 하는 판에 미국으로 줄행랑을 놓고 한국 정치판이 대혼란에 빠지는 동안 미국에서 편하게 낮잠이나 퍼질러 자고 있었다. 그러다가 총선이 다가오니 슬며시 기어들어 와 지금까지 한 행동이라고는 변함없이 민주당 분열 획책밖에 없었다, 결국은 탈당까지 해버리는 작태를 보인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썩은 나무 어쩌고다. 본인이 바로 썩은 나무요 거름 담장이라는 사실을 전혀 보지 못하고 말이다. 민주당에서 5선이나 하고 민주당 이름으로 도지사도 하고 민주당 이름으로 국무총리도 하면서 꿀물만 빨아온 자가 이제 단물이 다 빠졌으니 나가서 다른 물을 빨겠다고 선언한 꼴이다. 참으로 추하기 이를 데 없다. 정작 자신이 전과 2범이라는 사실도 잊고 민주당 의원 44%가 전과자라는 헛소리를 하더니 과거 <동아일보>에서 밥 빌어먹던 시절에 전두환을 찬양한 기사를 쓴 사실까지 폭로되면서 이낙연의 이미지는 이제 더 이상 구겨질 것도 없게 되었다. 썩은 나무요 거름 담장이인 것을 스스로 보여주기 위해 안달이 난 모습.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렇게 스스로 망가지는 정치가도 보기 드물 것 같다.
그동안 민주당에서 꽃가마만 타고 다니다가 막상 자기 힘으로 뭔가 해봐야 할 처지가 되자 자존심이 엄청나게 상한 것이 뻔하다. 그래서 일단 탈당이라는 강수를 두어 여론의 관심을 끄는 것에는 성공한 모양이다. 그러나 그에게 힘이 돼 줄 것으로 보였던 탈당파 의원도 분열 조짐을 보여 이낙연과의 연대로 불확실해졌다. 그러자 국민의힘을 탈당한 이준석에게 구애의 손을 뻗치기까지 한다. 이제는 거의 정신줄을 놓으려는 모양새 아닌가?
사실 한국 정치사에서 김대중·노무현 정신은 이제 전설이 될 정도의 가치를 지닌 것이다. 그런데 이 정신을 현재로 봐서는 아무래도 이낙연이 아니라 이재명이 이어받을 모양새다. 김대중을 한국 정치사에 남는 영웅으로 만든 것은 역설적이게도 박정희·전두환 콤비다. 목포에서 사업을 하던 평범한 김대중이 한국 진보 진영의 아이콘이 되기까지 박정희·전두환의 탄압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악랄한 것이었다. 박정희는 1972년 이른바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종신 독재자가 되기로 작정한 다음 최대의 정적인 김대중 암살하기 위해 이른바 ‘김대중 납치 미수 사건’을 저질렀다. 다음은 나무위키에 나온 관련 내용이다.(링크: https://namu.wiki/w/%EA%B9%80%EB%8C%80%EC%A4%91%20%EB%82%A9%EC%B9%98%20%EC%82%AC%EA%B1%B4)
“1973년 8월 8일 오후 1시경 일본 도쿄 그랜드 팰리스 호텔 객실 중 가장 위층인 22층 2212호에서 민주통일당(약칭 통일당) 당수 양일동, 김대중의 조카뻘이자 국회의원이던 김경인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며 담화를 나누고 자유민주당의 중의원인 기무라 도시오(木村俊夫)와의 약속 장소로 향하던 김대중은 한국인으로 보이는 괴한 5명에 의하여 납치당했다. ... 납치 사건이 터지자 마자 CIA 한국 지부에서 즉시 김대중의 위치를 찾아냈고, 이 정보를 입수한 필립 하비브 주한미국대사가 박정희에게 직접 김대중을 죽이지 말라고 경고했으며, 미국 CIA 측에서 연락을 받은 일본 측 항공기로 보이는 무엇이 김대중이 납치되어 있던 선박에 접근하여 경고 비행을 했고, 때마침 한국 측에서 해당 선박으로 연락을 취하게 되어 김대중이 가까스로 살아나게 된 것이다. ... 박정희 정권은 이 사건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 정부 개입설을 부정했다. 일본 경찰이 범인의 지문을 채취하는 등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포착하고 사건 관련자들의 출두를 요구하자 이를 거부해 버렸다. 이 때문에 일본에선 주권 침해에 대한 비판 여론이 대두되면서 한일 정기 각료회의 연기나 대륙붕 석유탐사를 위한 한일 교섭이 취소되는 등 한일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결국 미국의 배후 영향력 행사와 한일 간의 절충 끝에 김대중의 해외 체류 중 언동에 대한 면책, 김종필 국무총리의 진사 방일 등의 합의를 거쳐 사건 발생 86일 만에 종결되었다. ... 11월 2일, 김종필 국무총리가 일본을 방문하여 다나카 가쿠에이 당시 일본 총리에게 "이번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한 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로서 각하와 일본 국민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한다. 한국 정부는 두 번 다시 이런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한다"고 사과하고 같은 내용의 대통령 친서를 전달했다. ... 이 사건에 대해 대한민국 경찰은 표면상 '의문의 세력에게 납치당한 자국 국민 김대중'을 위해 수사를 하는 척하긴 했으나 사실상 수사 은폐로 가닥을 잡고 진행했다. 애초에 경찰이 뭘 어떻게 할 수도 없었던 게 세상 사람들 전부가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납치 사건임을 아는 상황이었다. 서슬퍼런 유신 체제에서 대통령 측근을 일개 경찰들이 조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사건 직후 박정희에 의해 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되긴 했으나 말 그대로 표면적 조치에 불과했다. 수사본부는 아무런 성과 없이 1년 후인 1974년 8월 14일에 내사 중지했으며 다시 1년 후인 1975년 7월 21일에 내사 종결하면서 그대로 묻혀버렸다. ”
이는 박정희가 최대의 정적인 김대중을 죽이려고 한 것이지만 반독재 투쟁에 더 큰 불을 붙이게 되었고, 결국 박정희가 최측근의 총탄에 사망하는 것으로 종결된 사건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렇게 정적을 죽이려고 하거나 죽인 자는 반드시 자신도 비참하게 죽게 되는 법이다. 그런데 독재자가 되면 권력에 취해 그런 진실에 눈이 멀어버리면서 민심에 어긋나는 일만 골라서 하면서 스스로 명을 재촉하곤 한다.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런데 박정희의 뒤를 이어 12.12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 독재자의 계보를 이은 전두환은 김대중에게 사형선고까지 내렸다. 다음은 <나무위키>에 나온 관련 내용이다.(링크: https://namu.wiki/w/%EA%B9%80%EB%8C%80%EC%A4%91%20%EB%82%B4%EB%9E%80%EC%9D%8C%EB%AA%A8%20%EC%A1%B0%EC%9E%91%20%EC%82%AC%EA%B1%B4)
“1980년 서울의 봄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가운데 신군부는 자신들의 집권을 위한 플랜을 착착 진행시켜 나갔다. ... 전두환은 당시 보안사 대공처장이었던 이학봉에게 지시하여 체포계획을 수립하게 했고 이학봉은 5.17 쿠데타 하루 전인 5월 15일 보고해 전두환의 최종 재가를 얻어냈다. ... 5월 17일, 비상계엄의 전국확대가 공식 발표되었고 신군부는 병력을 동원해 이미 작성된 검거대상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나섰다. 김대중은 학생, 노조의 소요를 배후에서 조종한 혐의로 수경사 헌병단에 의해 체포되었다. 당초 신군부는 김대중이 북한의 사주를 받아서 소요를 사주했다는 식으로 몰아가려 했으나 5월 18일 광주가 신군부에 항거하자 이를 이용해 김대중을 내란음모를 획책했다고 몰아붙였다. ... 신군부가 장악한 한 언론들은 해당 사건을 '용공사건'으로 몰아간 한편 김대중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형성에 열을 올렸다. 방송 쪽에선 KBS는 8월 2일 <한민통의 정체>, MBC는 9월 11일 <한민통과 김대중>이란 보도특집 프로그램을 각각 방영했고 심지어 <경향신문>도 9월 11일자 특집기사를 내보내 김대중을 '선동과 권모술수로 얼룩진 마키아밸리즘의 화신'으로 폄하했다. 이외 나머지 신문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결같이 '약속 잘 뒤집는 거짓말쟁이'나 '계략, 선동의 명수', '대통령병 환자' 등으로 폄하했고 이는 호남을 제외한 전 국민에게 김대중의 부정적 이미지만 뇌리에 새기는 후폭풍을 낳았다. ... 전두환은 김대중의 사형을 집행할 기세였지만 국제사회는 김대중에 대한 구명을 촉구하면서 전두환을 압박했다. ... 재판 과정에서 미국 국무부 법률담당 특보가 직접 참관하는가 하면 CIA 한국지부 관계자가 "우리는 김대중 씨에 대한 당신들의 고발이 매우 억지스럽다고 생각한다."는 말로 사실상 전두환 정권에 대한 경고를 했다. ... 이 와중에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역시 김대중의 사형을 막기 위해 와인버거 국방장관과 그레그 전 CIA 한국지부장[4]을 파견해 김대중을 구명할 것을 전두환에게 요구했다.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도 김대중의 구명운동에 앞장섰으며 이후 미국 부통령이 된 앨 고어 하원의원도 김대중의 석방을 촉구하는 항의서한을 전두환에게 발송했다. 독일에서는 빌리 브란트 전 총리가 김대중 구명운동에 나섰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두 차례 서한을 보내 김대중을 선처해 달라고 촉구했다. 이런 국제적인 압력에 전두환은 결국 김대중을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할 수밖에 없었다. ... 그리하여 1982년 12월 김대중은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 자유의 몸이 되었다. ... 김대중이 한국에서 완전한 자유를 되찾은 건 1987년 6.29 선언 이후였다.”
이렇게 김대중을 죽이려고 안달을 부렸던 전두환 자신이 노태우의 배신으로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백담사에 들어가 가짜 수행을 한 것도 부족해 결국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그의 유골을 아직도 땅에 붙이지도 못하고 있다. 서슬 퍼런 독재를 휘두른 자의 최후는 언제나 마찬가지인 것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 몸소 보여주었다. 그리고 독재에 맞선 정적을 죽이려고 할수록 그 정적은 더욱 살아나 결국 나중에 민주적인 대통령이 되기 마련이라는 사실도 말이다.
그런데 이제 윤석열 정권이 이재명 대표를 과거 군사독재 정권에서나 볼 수 있는 식으로 ‘죽이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여기에 과거 군사독재 정권 시절과 마찬가지로 언론도 한통속이 되어 이재명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법을 이용해서 이재명 죽이기를 시전 한 것이 몇 년째이지만 민주당에 입당한 한 부장검사의 말 대로 탈탈 털어도 먼지 하나 안 나오는 모양이다. 그러니 한동훈이 이끈 검찰 ‘에이스’ 팀이 2년 가까이 털어서 만들어 낸 작품인 구속영장이 보기 좋게 기각되고 만 것 아닌가?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어느 미친 인간이 문자 그대로 칼을 갈아서 이재명 대표의 목을 노렸다. 천운으로 이재명 대표는 살아났다. 마치 과거 군사독재 정권의 모진 탄압을 이겨낸 김대중 대통령의 기시감을 느낄 정도다. 김대중 대통령의 일생을 보면 문자 그대로 천운이 도왔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이제 그 천운이 이재명 대표에게 옮겨가고 있는 것이 아닐지라는 생각이 든다. 정치적 영웅은 김대중 대통령이 보여준 것처럼 모진 탄압과 죽음을 넘나드는 고통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낙연은 평생 그런 탄압과 고통을 당해본 흔적이 전혀 안 보인다. 그저 전두환 독재 정권을 찬양하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 눈치만 보고, 문재인 정부에서 꽃가마만 타다가 이제 아무도 자기를 안 알아주게 되니 몽니나 부리는 철딱서니 없는 ‘꼰대’가 되어 버렸다.
그에 비해 이재명 대표는 김대중과 노무현의 계보를 잇는 ‘인동초’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아무리 권력이 짓밟아도 죽지 않고 살아나서 추운 겨울을 이겨내는 ‘인동초’를 체현하고 이재명 대표의 앞날이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상황은 언제 제2의 한국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게다가 경제는 파탄 직전이다. 사회의 분열은 이제 거의 정점에 이른 지경으로 보인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없어 보인다. 국민의힘은 ‘윤심 바라기’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보다 정치 경험이 더 없는 한동훈이 권력 놀이에 심취해서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란 와중에 현 정부를 가장 곤란하게 만들고 있는 이른바 ‘김건희 리스크’의 당사자인 김여사는 일언반구도 없이 자취를 감춘 지 오래고, 경기 부양책이라고 내놓은 것이 1기 신도시의 ‘묻지 마’ 재개발이다. 이런 와중에 이재명 대표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정말로 이게 나라냐는 말이 절로 나올 판국이다. 정말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다 뒤집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든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 아닌가? 더구나 ‘법대로’를 좋아하는 사람이 대통령 자리에 있고 그러니 법대로 해야 할 것이다. 총선에서 법대로 심판을 해서 말이다. 독재자가 대를 이어 죽이려고 했지만 결국 불사조처럼 살아나서 'IMF사태'로 무너지던 나라를 건져낸 김대중 대통령의 정신을 이어서 현재 최대의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해낼 민주 정치 영웅이 다시 나라를 다스리기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