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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Jan 15. 2024

이혜정의 혼인만 '죽음'일까?

혼인해야만 참다운 사랑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다.

뉴스를 보니 이혜정이 <MBN>의 <한 번쯤 이혼할 결심>이라는 프로그램에 나와서 남편과의 혼인 생활에서 오는 고통에 관해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 기사의 내용 일부를 인용해 본다.(링크: https://v.daum.net/v/20240115084729758?f=p)  


“현재 자녀들을 출가시킨 후 단 둘이 살고 있는 이혜정, 고민환 부부는 "지금도 반 이혼 상태나 마찬가지"라는 고민환의 말대로 각방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서로의 아침 안부도 묻지 않았다. 이혜정은 "혼인은 죽음이었다. '내 존재가 없다'는 게 가장 힘들었다. 절망이라고 생각했다. 서로 장점을 보지 못했고 단점을 감싸지 못했다. 달라도 너무 달랐고 지나고 보니 억울하다"고 토로했다. 이날 이혜정은 외출한 남편의 방에 들어가 한가득 쌓인 휴지더미와 옷가지를 정리했지만, 귀가한 남편은 오히려 "왜 함부로 내 방을 치웠느냐"며 언성을 높였다. 급기야 고민환은 "예전에 집문서도 당신이 그런 식으로 버렸지 않나. 그 수준"이라며 역정을 냈다. 이혜정 또한 "당신부터 갖다 버려야 한다"고 응수했다. 그는 "남편과 맞는 부분을 말하라면 손, 발가락 다 합쳐도 한 개도 안 될 것"이라며 씁쓸해했다.”    


이혜정은 혼인 생활을 시작한 지 45년이 되었다고 한다. 이혜정이 1956년생으로 올해 67세다. 그렇다면 ‘불혹’, ‘지천명’, ‘이순’을 모두 지나고 얼마 안 되어 ‘종심소욕불유구’의 나이가 된다는 말인데... 그런 사람이 45년 동안 유지한 혼인이 결국 ‘죽음이었다.’라는 고백을 한다. 더구나 이혜정은 ‘유한킴벌리’라는 그 분야에서 유명한 회사를 설립한 ‘부잣집’ 출신이고, 남편도 대학병원에서 의사로 일했던 나름대로 한국 사회에서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인데 이 모양이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의 혼인율과 출산율이 걷잡을 수 없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이혜정과 같은 한국 사회의 ‘셀럽’이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런 프로그램이 한국의 혼인과 출산을 막는 주요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앞으로도 여전히 많은 젊은이가 혼인하고 아이를 낳을 것이다. 다만 특히 한국 사회가 세계 최저의 출산율에 이어 세계 최저의 혼인율을 기록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이런 프로그램이 '오멘'의 역할을 하는 것 같아서 불길한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이런 프로그램이 세계 최저인 한국의 출산율과 혼인율의 원인이 아니라 그런 현상이 한국 사회에서 가속화되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통계를 보니 한국의 평균 초혼 연령이 남자는 33.7세 여자는 31.3세라고 한다. 과거에 비해 상당히 늦어진 것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게다가 혼인 적령기라고 할 수 있는 25~49세 남성의 미혼인 비율이 2020년에 47.1%에 달한다는 통계도 나와 있다. 이 나이대의 남성 가운데 거의 절반이 혼인을 안 하거나 못 하고 있다는 말이다. 같은 나이대 여성의 미혼율도 2020년 32.9%에 이른다고 한다. 이런 통계를 반영하는 조혼인율이 1970년 9.2건에서 2022년 3.7건으로 줄었다. 2022년 192,000쌍이 혼인했는데 1970년의 295,000쌍이 혼인한 것에 비해 거의 3분의 1이 줄었다. 그러니 출생률이 줄어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혼인율이 줄어들고 있는 데다가 정작 혼인한 부부도 이혜정처럼 그 생활이 죽음이나 지옥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도대체 인간은 왜 혼인하는 것일까? 프랑스 속담에는 '바보나 혼인한다'라는 말이 있다. 결국 바보라서 혼인하는 것인가?  꼭그렇지는 않을 것만 같다.   


그런데 정말로 요즘과 같은 세상에 왜 혼인할까? 특히 위의 방송과 통계가 보여주는 대로 혼인이 조선시대처럼 지상명령도 아닌데 말이다.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사랑이다. 통계조사에 따르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혼인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국인의 60% 가까이가 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변화가 감지되기는 한다. 18~29세 여성의 62%, 30대 여성의 66%가 사랑한다고 반드시 혼인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답한 것이다.(링크: https://hrcopinion.co.kr/archives/22973) 그렇다고 이 연령층의 여성이 혼인을 결사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혼인하지 말아야 한다는 부정적 대답은 10% 미만으로 나오고 있다.    


물론 사랑보다 돈과 조건을 보고 혼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특히 요즘 세대, 이른바 MZ세대의 경우 돈과 조건을 따지는 분위기가 더 심해졌다는 말을 들으니 그런 생각이 더 든다. 사실 이는 통계 수치로도 나온다. 그러나 그런데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리 돈과 조건이 좋아도 결국 그 혼인 생활은 이혜정이 말한 대로 '죽음'이 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도대체 원인이 어디 있을까? 당연히 부처가 말한 무명(無明)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명은 단순한 무식함이 아니다. 불교의 사성제인 고집멸도 가운데 집착에 해당하는 것으로 모든 고통의 원인이 된다. 혼인이 무엇인지, 혼인을 왜 해야 하는지 모르고 그 생활을 시작하다 보니 결국 혼인이 죽음이니 미친 짓이니 하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 대부분은 삶 자체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혼인 생활도 전혀 사전 연습 없이 시작하기에 서투르기 짝이 없고, 배우면서 헤쳐나가는 이른바 ‘맨땅에 헤딩’ 식으로 혼인 생활을 이어가다 보니 혼인이 바보나 하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 되는 것이다. 더구나 요즘은 핵가족 시대라서 과거 농경문화 때 주를 이루던 대가족 제도 안에서 살면서 배우던 삶의 지혜조차 실종되는 바람에 신혼부부가 잘 모르는 채로 더욱 힘든 혼인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결국 불교에서 말하는 무명의 상태에서 ‘잘살아 보겠다는 욕심’에 집착하며 시작하는 것이 요즘 혼인 생활이라서 혼인에 ‘죽음’, ‘미친 짓’, ‘바보’라는 개념이 따라다니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인간은 여전히 혼인한다. 한국의 경우도 혼인 적령기 남자의 50%, 여자의 70%는 여전히 혼인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고 실제로 혼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세계 최저 출산율이지만 여전히 1년에 수십만 명의 아이도 낳고 살아간다. 특히 아이를 낳게 되면 경제적, 육체적으로 탈진되는 것이 뻔하게 보이는데도 말이다. 왜 우리는 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혼인해서 애를 낳고 기르며 살아가는 것일까? 한 마디로 더 나은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수도자의 삶을 살면서 신의 뜻을 따르고 도를 추구해도 나중에 나이 들어 보면 인생 별거 없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곧 혼인 관계에서 나오는 여러 사달이 싫고 그보다 더 고상한 인생의 목표를 정해놓고 수도 생활을 해봐야 별것 아니니, 차라리 혼인해서 사는 재미라도 보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리고 혼인 생활을 택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 수도 생활을 하다가 혼인을 결정하는 경우도 무척 많다. 이는 불교나 기독교나 마찬가지다. 특히 기독교의 경우 수도 생활을 포기하거나 아예 시작도 하지 않는 추세가 더욱 커져서 유럽의 대형 수도원에 할머니 할아버지만 남아 있고, 많은 경우에는 그 노인들도 사망하여 수도원 자체가 문을 닫기도 한다. 젊은 수도자가 없는 것이다. 결국 2,000년 가까이 인간 생활에서 종교적 수도 생활이 혼인 생활의 대안으로 제시되었지만 결국 혼인 생활이 더 나은 것이라는 선택을 인류가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혼인 생활이 죽음이고 지옥 같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심지어는 부모와 친척의 경우를 직접 보았을 것인데도 왜 적지 않은 남자와 여자가 여전히 열심히 혼인 생활을 시작하는 것인가?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는 물론 생물학적 설명이 있다. 곧 종족 보존의 본능이 혼인 적령기 남녀의 호르몬 분비를 극대화하여 이른바 이성에게 눈이 멀어버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눈이 콩깍지에 씌우는 시기’에 짝을 만나고 섹스하고 아이를 낳는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 물론 요즘은 ‘영리한’ 커플이 아이가 얼마나 짐스러운 것인지를 잘 알아서 이른바 딩크(DINK)족의 삶을 택하기도 한다. 인간의 근원적인 종족보존의 본능을 거부하는 이러한 결정은 과거에는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지만, 요즘은 아이도 얼마든지 입양할 수 있고, 나중에 맘이 바뀌면 인공 수정, 심지어 대리모를 통해 후손을 볼 가능성도 열려 있으니 그리 심각한 철학적 성찰을 필요로 하는 일도 아니다.     


그렇다면 혼인하는 이유에는 종족 보존의 본능 말고 다른 것도 있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친밀감에서 나오는 안도감이다. 특히 안도감은 독일어로 Geborgenheit라고 하는 데 이 험한 세상에서 혼인 파트너가 나를 보호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혼자 살 수 없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안 읽어도 체험으로 알 수 있는 진리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고독한 존재이기에 이 친밀감을 서로 공평하게 느끼기에는 많은 장애가 있다. 곧 대부분 인간은 ‘나의 고독’을 해결하기 위해 파트너를 찾지만, 그 파트너도 인간인 한 ‘나의 고독’을 지닌 존재로 자신의 고독을, 상대방을 통해 해결해 보려는 욕망이 있다는 엄연한 현실로 내가 일방적으로 바라던 그 친밀감을 느끼는 데 어려움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흔히 혼인을 결심한 이유를 물어보면 거의 대부분 ‘나를 잘 이해해 줄 것 같다.’, ‘나의 모든 것을 받아 줄 것 같다.’ ‘나만 바라볼 것 같다.’ ‘나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해 줄 것 같다.’라는 식의 ‘자기중심적’ 판단을 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그러나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 대부분은 혼인이 완전히 헌신적인 신적 존재나 천사와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똑같이 부족하고 자기중심적인 존재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나와 파트너가 된 상대방도 외로운 존재로 나와의 친밀감에서 위로받고 싶어 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모르거나, 알아도 모른 척하면서 ‘나’를 내세우고 혼인 생활을 시작하니 결국 삐걱거리게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결국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리라고 믿었던 바로 그 파트너가 타인보다 못한 원수덩어리가 되어 버린다. 그런데 그렇게 혼인 관계가 끝난 근본적인 이유는 상대방이 아니라 나의 헛된 기대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혼인을 결심할 때 ‘나는 누구인가?’를 화두로 거울을 보고 오랫동안 깊은 성찰을 하고 본래의 나를 찾은 다음에 혼인 생활을 시작했다면 이런 사달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런 득도를 했다면 혼인을 할 필요도 없겠지만 말이다.  


사실 인간은 모두 외롭다. 단순히 감상적인 판단이 아니라 실존주의에서 파악한 인간의 본질이 외로운 것이다. 모든 인간은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 세상에 나오게 된다. 그 누구도 자기의 부모, 동네, 나라, 시대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저 알지 못할 이유로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일 뿐이다. 그것을 어려운 실존주의 용어로 '피투기적 존재'(das geworfene Wesen)라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내던져졌지만 행복해보려고 열심히 살면서 이런저런 노력을 하는 데 어느 날 갑자기 나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다시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 그렇게 들어올 때도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홀로 이 세상에 들어왔듯이 이 세상을 떠날 때도 나 혼자 떠나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근원적으로 고독한 존재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은  혼자 있기 싫어 파트너를 찾고 사회 안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어 인정받으려 하고 무리를 지어 살면서 위로를 받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더불어 살기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가 가족이다. 부모의 무한한 사랑을 받으면서 그 고독을 잊고, 파트너를 만나 친밀감을 느끼며 위로를 받으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 사회의 다양한 장애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간은 혼인하게 된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그 위로가 쌍방적이어야 하는데 혼인을 시작하는 파트너 대부분은 위로를 주기보다는 받기를 기대하기에 사달이 나게 되는 것이다.    


혼인 생활을 시작한 지 일주일도 안 되어 ‘각성’하여 갈라지는 파트너도 적지 않지만, 대부분은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세 살 정도 될 때까지는 상대방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혼인 생활을 유지한다. 종족 보존의 본능을 유지하기 위한 호르몬 분비가 그 한계점이 이를 때까지 말이다. 혼인 생활을 자기중심적 기대로 시작한 남녀에게는 대부분, 아이가 나와서 혼인 생활의 본격적인 ‘노동’이 시작되고, 혼전에 파트너에게서 느꼈던 성적 매력도 사라지고 나면 이른바 '진실의 순간'이 다가오게 된다. 그래서 권태기가 시작되고 파트너의 부족한 점, 약점, 심지어 악한 점까지 발견하여 실망하고, 좌절하고, 분노하고, 무엇보다 속았다는 생각에 허무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사실 파트너가 속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속인 것뿐이다. 이 세상에 신이나 천사와 같이 무조건 ‘나’를, 그것도 내가 보기에도 부족함이 많은 나를 무한히 사랑하고 받아들여 줄 인간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 뻔한 사실인데도 ‘나’는 신이나 천사와 같은 파트너를 만날 자격과 운이 있는 존재라고 자신이 자신을 속인 것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내가 나를 속이는 것은 전적으로 종족 보존의 본능에서 나오는 호르몬 때문이기에 크게 탓할 것도 없다. 이 호르몬에 정신이 마비되면 문자 그대로 눈이 멀어버린다. 호르몬 때문에 무명에 빠진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종족 보존이나 친밀감 말고 요사이 젊은이들, 특히 한국의 젊은이들은 ‘조건’을 보고 혼인을 결심하는 경우도 대단히 많다. 그러나 이런 경우 돈 떨어지고, 미모가 사라지고, 심지어 시집이나 처가의 권세나 돈이 사라지면 그 혼인 관계가 종료되는 경우도 많다. 물론 그럴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조건을 보고 혼인 관계를 맺는 남녀도 많다. 그래서 이런 부부의 경우 오히려 ‘쿨’하게 헤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쿨하게 헤어질 수 있기에 이런 식으로 ‘솔직하게’ 조건을 보고 혼인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트렌디하고 깔끔하고 솔직하다고 생각하는 커플도 많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보다 외롭고 약한 존재다. 겉으로는 쿨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이혼녀, 이혼남이 되었다는 콤플렉스를 안고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외로움을 달래려는 욕망은 지속해서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은 누구나 잘났든 못났든, 부자든 가난하든 병들고 늙고 죽게 된다. 정확히 말해서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영생을 꿈꾸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에 후손을 통해 자기 DNA를 보존하는 이른바 ‘대리 영생’이라는 차선책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쓸쓸하기는 마찬가지다. 자식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결국 죽는다. 그리고 내가 아닌 ‘타자’인 자식이 내 자리를 차지하고 내가 산 방식을 되풀이할 뿐이다. 결국 그것이 ‘대리 영생’이라고 해도 ‘나’의 삶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모두 고독한 존재일 뿐이다.    


밀란 쿤데라가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서 갈파한 대로 모든 인간은 인생이라는 무대에 전혀 리허설 없이 올라가는 불완전한 존재다. 그렇게 어설프게 연기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감독이 끌어내리면 아무 저항도 못 하고 무대에서 내려오고 두번 다시는 그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된다. 인류 역사에서 이러한 운명을 거슬러 산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다. 사실 그런 허무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파트너를 만나서 혼인 생활을 한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다.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인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와 충고와 격언이 나왔다. 그러나 그 모든 이야기는 결국 키엘케고르가 한 말로 수렴된다. 곧 혼인은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모순적 미래가 기다리고 있음에도 많은 남녀가 오늘도 열심히 서로 사랑하고 혼인 생활을 시작한다. 왜 그러냐고? 위에서 말한 대로 이기적 유전자에 '속은' 종족 보존의 본능에서 나오는 욕망, 인간의 근원적인 실존적 고독을 회피해 보려고 친밀감을 추구하는 욕망, 돈과 사회적 지위를 수단으로 한 세상에서 편히 살아보고자 하는 욕망으로 혼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이유로 시작했든 관계없이 혼인하면 키엘케고르의 말대로 후회한다. 그런데 모든 후회하는 부부가 다 가정을 풍비박산 내고 이혼하고 자식을 내버리는 것은 아니다. 별로 정이 없는 부부인데도 헤어지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 이유 가운데 가장 흔한 것이 ‘자식’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니다. 혼인 관계를 지속시키는 데는 그보다 더 깊은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배우자에 대한 ‘근원적 연민’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깊은, 성숙한 사랑이다. 파트너가 처음처럼 맘에 들지 않아도 견디고 백년해로 하는 많은 부부의 마음에는 그런 근원적 연민에서 나오는 진정한 사랑이 있기에 버틸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외롭고 불쌍한 존재다. 그런 실존적 본질에 대한 직관을 혼인 생활을 통해 터득한 부부만이 혼인 생활의 참다운 의미를 배울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부부가 서로에게서 인간의 실존적 고독에 대한 근원적 연민으로 사랑을 느끼게 되면 혼인 생활을 시작할 때는 도저히 알지 못한 깊이의 사랑을 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높은 수준의 사랑을 독일의 철학자 막스 쉘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내적인 창조적 변화이다.”    


원래 철학자는 쉬운 것도 어렵게 말하는 사람들이기에 이 말도 성숙한 사랑을, 곧 파트너에 대한 근원적 연민에서 나오는 사랑을 해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조심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연민'이라는 것이 흔히 생각하듯이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게 베푸는 시혜의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연민은 영어 compassion에서 나온 개념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라틴어 함께라는 뜻의 con과 고통을 당한다는 뜻의 passio에서 나온 단어다. 곧 연민이란 나의 파트너가 나와 마찬가지로 힘들고 모진 인생을 어렵게 살아가는 동반자라는 진리를 각성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되면 흔히 말하는대로  ‘불쌍한 영감탱이 내가 아니면 누가 챙겨주나!’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정도의 깊이에 다다른 사랑을 하게 되면 이른바 ‘도’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 기독교 역사에서도 '가정생활이 바로 수도생활'이라는 말이 생긴 것이다. 여러 복잡한 문제와 장애가 있음에도 인간이 결국 혼인 생활에 들어서고, 기왕에 시작한 혼인 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치고자 한다면 바로 이런 인간의 실존적 고독에 대한 근원적 연민에서 나오는 사랑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커플이 파탄 난 혼인 생활의 책임을 서로에게 미루고 또 다른 파트너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진리를 모르면 그 어떤 파트너를 만나도 똑같은 결과만 나오게 될 뿐이다. 깨닫지 못한 중생이 무명의 바다를 헤메는 것과 같다.  


혼인은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혼인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면 반드시 고생문이 열린다. 그래서 후회한다. 그러나 그런 '좁은 문'에 기꺼이 들어가서 사서 고생을 하지 않으면 성숙한 사랑의 참다운 의미를 발견하고 실천하는 기쁨을 누릴 수가 없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아닌가? 그래서 혼인을 안 해도 후회하는 것이다. 단순히 사랑해서 혼인하는 것이 아니라, 혼인해야만 사랑의 참다운 의미를 깨닫고 질적으로 더 깊은, 영원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되는 법이다. 그러나 최종 선택은 각자에게 달려 있다.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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