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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Jul 09. 2023

자살을 꿈꾸는 이들의 고통을 누가 아는가?

자살은 더 이상 개인의 죄가 아니다.


2020년 2월 26일,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자살을 상업적으로 조장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조항이 위헌이라고 선언했다. 헌법재판소는 일반적 인격권에는 인간은 자기 결단으로 죽을 권리가 있고 이를 위해 제삼자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자유가 포함된다고 판시했다. 이에 독일연방의회는 이 판결에 맞게 법을 개정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물론 이 판결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다. 독일 가톨릭주교회의는 이 판결을 비판하며 살인의 자유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반면에 독일 인본주의자협회는 이 판결을 환영하며 자결권을 향한 중요한 진전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2023년 7월 6일 독일 가톨릭주교회의는 이 법개정 과정에 관하여 우려를 표명하였다. 헌법재판소의 판결 대로 자살을 개인의 권리로 여기는 방향으로 법이 개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인간은 스스로 죽을 권리가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서는 언제부터 자살이 죄였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계적으로 자살을 중대한 죄로 단죄하는 것은 깊은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종교적, 도덕적 신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종교적, 문화적 전통에 따라 자살에 대한 관점이 다를 수 있지만, 특히 서양에 큰 영향을 미친 기독교의 관점에서 접근해 보겠다.     


초기 기독교 교회는 일반적으로 자살을 신과 생명의 신성함에 반하는 행위로 간주하는 유대교의 가르침을 계승했다. 대표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살을 중대한 죄로 단죄하는 교리의 확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리고 중세에 들어서면서 자살이 자연법과 신법을 위반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도저히 용서받지 못하는 대죄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자살을 대죄로 여기는 근거는 인간 생명이 신성하고 신의 선물이라는 믿음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인간 생명은 신의 모습을 반영한 것으로 그 고유한 존엄성과 가치를 지니고 있기에 자살은 생명의 길이와 목적을 결정할 배타적 권한이 있는 창조주에 대한 직접적인 모욕으로 간주된 것이다.     


유대-기독교 전통에서는 구체적으로 십계명 가운데 "살인하지 말라"(출애굽기 20:13)는 계명을 근거로 자살을 단죄한다. 자기가 스스로를 죽이는 자살도 살인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자살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신의 선물인 생명 죽이는 고의적인 살인 행위로 간주되며, 이는 삶과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된다.     


기독교는 희망, 구원, 고통의 변화시키는 힘을 매우 강조한다. 그래서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그 어려움을 이겨내어 마침내 생명으로 나가는 것이 신의 계명을 지키는 길이고 구원의 길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자살은 종종 이러한 신이 부여한 원칙에 대한 거부로 간주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엄청난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치유와 성장, 삶의 의미를 발견할 잠재력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자살은 영적, 정서적 회복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비극적이고 성급한 결말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와서 기독교 신학에서 자살은 여전히 대죄로 간주되지만, 여러 교파의 공동체와 성직자들은 자살 충동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개인에 대한 연민과 이해, 지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자살 충동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단죄되던 중세 시대의 구태의연한 의식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살을 도덕적 문제로 보는 신학적 이해를 유지하면서도 자살을 꿈꾸는 이들을 무조건 단죄하기보다는 그들이 희망과 치유를 찾을 수 있도록 사랑과 보살핌, 자원을 제공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경우가 많다.     


사실 자살에 대한 사회적 태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화해 왔으며, 정신 건강과 연민에 대한 현대적 관점으로 인해 이 주제에 대한 보다 미묘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과거처럼 단순히 자살에 대해 말도 꺼내지 못하게 만드는 억압적 상황이 극복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다양한 종교 및 세속 단체에서 정신 건강의 복잡성과 자비로운 대응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자살 충동을 경험하는 개인을 위한 지원과 자원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독일은 한국에 비해 자살률이 매우 낮은 나라이다. 그런데도 자살을 사회 전체에서 진지하게 논의하고 자살을 할 수밖에 없는 궁지에 몰린 이들의 최후의 선택에 대한 합리적 해결책을 마련하고 있다. 한국처럼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저 ‘죽지 마라!’라는 구두선만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자살은 사회적으로 많은 관심과 논의를 불러일으킨 매우 민감하고 복잡한 문제다. 이는 인권, 자율성, 도덕성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래서 사회 전체적으로 자살을 담론의 주제로 삼아 활발한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아무도 시작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세계 자살률 1위의 기록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저 ‘나만, 내 자식만 안 죽으면 된다!’라는 지극히 이기적인 정서만 퍼져 있는 것이다.   

   

인간은 쇼펜하우어가 갈파한 대로 ‘맹목적인 살고 싶은 의지’(Blinder Wille zum Leben)를 본능으로 타고난다. 그래서 한국인도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라는 신념으로 살아온 것이다. 그리고 한국은 내세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나라였기에 한국인 대부분이 종교와 사상에 무관하게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다. 기독교 신자도 불교 신자도 예외가 아니다. 아니 신자만이 아니라 목사 신부 승려도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몸소 실천하는 데 혈안이 된 나라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자살을 제일 많이 하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 뭐가 어디가 고장이 난 것인가?     


구체적으로 자살을 결심하는 계기는 경제적 위기나 불치병과 같은 실존적 위기나 이혼과 같은 삶의 타격에 따른 정서적 혼란과 같이 다양하다. 더구나 이기주의자들이 넘쳐서 주변의 적절한 도움을 받을 수 없는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은 상황에 놓인 사람이 많은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러한 상황에서는 자살과 관련하여 개인의 자율성을 보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개인에게 자신의 삶을 스스로 끝낼 수 있는 선택권을 허용하면 오히려 개인이 자기 통제감을 갖고 자신의 개인적 상황에 맞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는 것이다.     


키엘케고르는 사람을 자살로 이끄는 병은 절망이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그런 절망으로 이끄는 원인이 되는 경제적 위기, 질병, 이혼을 살펴보자.


심각한 경제적 위기는 심각한 정서적 고통을 유발하여 막다른 골목에 이른 절망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 이럴 때, 자기 결정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는 재정적 부담에 직면한 개인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맹목적인 생존 본능을 거부할 용기가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들은 정신적 사치로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 죽지 못해 살기에 죽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사회가 이들을 위해 재정 상담, 직업 지원, 정신 건강 서비스 등 종합적인 지원 시스템을 먼저 제공하여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을 완화하는 데 도움을 줄 필요가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개인만이 아니라 정부도 자기 이익에만 눈이 어두워 자살을 꿈꾸는 이들을 돌볼 여력이 거의 없다.     


경제적 파탄만이 아니라 말기 질환을 앓고 있는 개인에게 장기간의 고통과 삶의 질 저하 가능성은 정서적으로 큰 충격을 주어 자살을 꿈꾸게 만든다. 자기 결정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이 조력 자살을 포함하여 임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율성을 부여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은 불필요한 고통과 장기간의 고통을 피하면서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개인의 능력에 가치를 둔다. 독일에서 조력 자살을 위한 법 개정에 들어간 것도 바로 이에 해당되는 이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 유교적 명분 논리에 갇혀서 이미 죽음을 맞이할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도 ‘무의미한’ 생명 연장에 매달리는 한국의 상황에서 제일 먼저 고쳐야 할 부분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연명치료 거부 의사를 밝히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만 아직도 사회적 분위기는 이를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것조차 터부시 하는 현실이 작용하고 있다.     


이혼은 심각한 정서적 고통과 격변을 초래하여 자살을 꿈꾸게 만든다. 자기 결정적 죽음을 맞이할 권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압도적인 정서적 혼란을 견디는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자유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이혼 소송 과정에서 정신 건강 지원과 상담을 우선시하여 개인에게 필요한 정서적 자원을 제공하고 현재의 어려움을 넘어 희망찬 미래를 구상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여전히 이혼을 단죄하는 한국의 상황에서 이런 도움을 찾는 길은 매우 어렵다. 차라리 죽는 이만 못한 경우도 흔하다.  

    

여기에 더해 한국의 자살 통계에 드러나는 특징은 청소년과 노인층의 자살률이 OECD 회원국의 평균치를 훨씬 웃돈다는 사실이다. 이 계층이 자살하는 이유는 키엘케고르가 진단한 대로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무한 경쟁의 입시 제도 안에서 상위 1%에 속하지 않으면 모두 ‘루저’가 되는 현실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은 밝은 희망을 지닐 수 있는 청소년이 몇 명이나 될까? 이미 유치원 때부터 무한 경쟁에 내몰리면서 ‘지면 죽는다!’라는 정신 훈련만 배운 아이들이 이미 초등학교에서부터 지는 경험을 하게 되면 자살 말고 무엇을 꿈꿀까?    

  

노인도 마찬가지다. OECD 회원국 가운데 노인 빈곤율이 최고이니 노인 자살률이 최고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노인을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 특히 MZ세대는 꼰대가 사회 공공의 적이나 되는 듯 툭하면 적대감을 드러내고 무시하고 경멸한다. 이런 상황에서 복지 제도도 형편없어서 문자 그대로 굶어 죽을 상황에 놓인 노인의 숫자는 전체의 절반을 넘는다. 그런데도 아무도 관심이 없다. 결국 나만 살자는 것 아닌가? 상황이 이런데도 오늘도 대한민국의 정치가들은 서로 죽자고 싸우고 있다. 대통령의 아내 사돈의 팔촌이 부동산 투기한 것에만 온통 신경을 쓰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오늘도 대한민국에서는 하루에 30~40명, 한 시간에 1.5명이 자살하고 있다. 그래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뭐 어차피 나만 잘 먹고 잘살면 그만 아닌가? 어쩌다 유교가 내세우는 대동의 정신을 숭상하던 대한민국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을까? 잔뜩 흐린 하늘처럼 내 맘도 깊은 우울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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