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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Feb 06. 2024

박지윤이 아픈 아이 생일날 밤샘 파티에 갔다고?

‘샤덴프로이데’를 즐기는 관음증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혼한 유명인이 많지만, 그 가운데 박지윤과 최동석은 최근에 갈라섰고 그 과정도 세간의 흥미를 자아내는 것이기에 지켜보는 중이다. 그런데 오늘 뉴스에 보니 선정적인 제목의 기사가 떴다. 기사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링크: https://v.daum.net/v/20240206093629446?f=p) “"아픈 아들 두고 밤샘 파티"…최동석, 전처 박지윤 저격” 누가 봐도 이 정도 제목이면 끌리기 마련이다. 기자가 헤딩으로 관심을 끄는 데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기사 내용도 선정적이다.     


“"며칠 전 아들한테 연락이 왔다. '생일을 앞뒀으니 금요일 아빠한테 와서 토요일 엄마한테 돌아가기로 했다'고. 생일은 엄마와 있고 싶은가 보다 했다"고 운을 뗐다. 그는 "집에 온 아들은 기침을 심하게 했다. 전날 엄마와 병원에 갔다 왔다고 했다. 채 1박 2일이 안 되는 시간 아들과 게임도 하고 밥도 먹고 즐겁게 지냈다. 아쉽지만 생일인 일요일은 엄마와 보내라고 토요일 오후 좋은 마음으로 돌려보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런데 일요일 아침 공항에서 엄마를 봤다는 SNS 댓글을 보게 됐다. 서울에 같이 갔나보다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엄마가 서울에 가면 항상 나타나는 패턴이 있다. 애들 전화기가 꺼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최동석은 "밤늦은 시간이 되니 SNS 여기저기서 올라오는 파티 사진들. 와인잔을 기울이며 사람들과 즐겁게 지내는 모습들. 그런데 엄마의 SNS에는 집에서 딸과 공구 중인 비타민을 먹는 영상이 올라왔다. 마치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처럼. 지금은 이 영상이 삭제됐다"고 밝혔다. 그는 "그다음 날 아침 아들이 (학교에) 지각할 시간까지 엄마는 집에 오지 않았다"”     


당연히 남녀 갈리치기의 전형적인 이 기사에 꼬리글이 수 없이 달렸다. 올라온 꼬리글 가운데 몇 개를 인용해 본다.     


“마타*리

찌질한..밤새 전처 sns뒤졌나 보네.. 그럴시간에 아들상황 알았으면 아들 지켜주고 비난을 하든지. 이혼한 여자는 지인들과 약속자리 참석하면 안되냐? 그리고 둘이 알아서 하지 애들 엄마 사회생활 못하게 일부러 이런글 올리는 정말 한심한 스토커 ~ 박지윤씨 그간 어케 살았을지 오히려 안타깝네    

 

S*

이혼녀는 나가지 마라는게 아니고 아픈애 놔두고 나간거 보고 뭐라하는거~ 중요한 미팅도 아니고 아이들 지금 한참 불안한 상태일테고 아픈애 놔두고 지인모임 못나갑니다. 이혼하고 아이 키우는 엄마입장에서도 최동석씨 입장 충분히 이해됩니다     


뭉게*름

양육권은 책임감 있는 전남편에게 양보하고 박지윤씨는 파티와 함께 인생을 맘껏 즐기며 새인생을 찾으시면 좋겠네요..그게 모두가 서로 행복해지는 길일 듯. 전남편에게 지적 당한대로 생일날 아픈애 제주도있는 남에게 맡기고 서울가서 밤샘 파티하고 다음날 아침까지 안돌아왔다는게 사실이라면..     


t*dnjsgksqkrzktm

진짜 찌질하네. 왜 이혼했는 지 알겠다. 일하러 간 거잖아. 그런데 이렇게 욕 먹이려고 글 올리고 하는 걸 보면 평소 자기보다 잘 나가는 부인에게 어떻게 대했는 지 안 봐도 뻔한 거 아냐? 대부분 맞벌이 부부들의 현실인 거다. 회사에 오늘 애 생일이라고, 아프다고 당당히 약속된 일을 빼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냐? 애 엄마들 아이 아픈데도 조퇴조차 못해 발동동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 진짜 애를 아끼고 생각이 있으면 증거를 모았다가 양육 소송을 해야지. 이건 잘 나가는 부인 흠집 내기 위해 애를 이용하는 듯 보일 뿐이다.”     


이렇게 박지윤을 둘러싸고 ‘무책임한 엄마’ 논쟁이 가열되자 박지윤이 저간의 사정을 이야기 했단다. 곧 박지윤이 참석한 행사는 파티가 아니라 자선바자 행사였다고 한다.(링크: https://biz.heraldcorp.com/view.php?ud=20240206000671) 관련 기사를 인용해 본다.     


“파장이 커지자 박지윤 측은 입장을 통해 박지윤이 지난 4일 참석한 행사가 자선바자 행사라고 해명했다. 당시 박지윤이 참석한 행사는 유기동물 구조, 치료, 입양을 지원하는 민트의 자선바자였던 것. 박지윤은 이날 행사에서 경매 행사 진행을 맡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후 최동석은 즉각 "네 변명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들 생일은 1년 전에 이미 잡혀있었잖아요?"라고 되묻는 문구를 전했다. 최동석이 공개적으로 비난을 이어가고 있지만, 박지윤 측은 아이들이 받을 상처를 고려해 공개적인 입장을 내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남의 불행이나 분란을 보고 ‘즐기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 그것을 적확하게 표현하는 독일어 단어가 있다. 바로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곧 안 좋은 일을 당한 남에게 겉으로는 안 됐네요~ 라고, 말하면서도, 마음 저 깊은 곳에서는 뭐라 표현하기 힘든 기쁨이 살살 샘솟는 것이다. 인간이 어쩌면 그럴 수 있냐고? 바로 그게 인간의 본성이다. ‘남’이, 특히 잘난척하는 남이 나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하고, 부도덕한 짓을 하고, 이른바 정상적인 삶을 이루어 나가지 못하면 근원을 알 수 없는 샤덴프로이데가 저절로 샘솟고, 한국말로 하자면 ‘그거 깨소금이다.’라는 말이 맘속에서 우러나는 것이다. 왜 그러냐고?    

 

샤덴프로이데는 타인의 불행이나 불행에 기쁨을 느끼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종종 부정적인 감정으로 간주되는 복잡한 심리적 현상이다. 사람들이 샤덴프로이데를 경험하는 이유를 설명하려는 몇 가지 이론이 있다. 사회적 비교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인 성공이나 실패를 통해 자기 행복을 얻는 법이다. 내가 라이벌로 여기거나 우월하다고 보았던 대상이 실패하거나 고통을 겪을 때, 이는 나의 자존감을 높일 수 있기 때문에 샤덴프로이데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공감하거나 공감을 느끼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특히 다른 사람의 고통에서 거리를 둘 수 있을 때 더욱 그렇다. 그러한 경우, 타인의 불행에 대한 반응으로 샤덴프로이데가 발생할 수 있다. 상대방이 동정심이나 연민을 느낄 만큼 정서적으로 가깝지 않기 때문이다. 때때로 샤덴프로이데는 정의에 대한 인식에 대한 반응으로 경험된다. 부당하거나 나쁜 행동을 했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처벌받거나 실패하면, 그것은 마땅한 처벌로 여겨지기 때문에 그를 관찰한 사람이 만족감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샤덴프로이데는 개인의 고통이 그룹에 유익한 것으로 인식될 때 그룹이나 공동체에서 발생할 수 있다. 이는 그룹 구성원이 그룹에 위협이 되는 외부인의 실패를 기뻐하는 일종의 사회적 결속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처럼 샤덴프로이데는 복잡한 감정적 반응이며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느끼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샤덴프로이데는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되고 대인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샤덴프로이데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도덕적 명분을 내세워 다른 사람이나 집단을 비판하면서 은밀하게 느끼게 된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대로 대부분의 인간은 이런 샤덴프로이데를 즐긴다. 그것도 매우 즐긴다.     


그런 인간의 본성을 잘 아는 기자이기에 박지윤과 최동석의 ‘싸움’을 보면서 페미니즘 논쟁을 벌이는 한편 이를 즐기는 것이다. 결국 이 사달에서 가장 큰 상처를 입는 것은 박지윤 최동석이 아니라 그들 둘이 한사코 ‘잡으려고’ 애쓰는 아들·딸이다. 일단 부부가 갈라지고 나서 사랑이 미움이 되고 나면 자식은 핑곗거리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대중은 여기서 샤덴프로이데를 더욱 즐기기 위해 파당을 짓고 싸운다. 곧 ‘페미’냐 아니냐에 따라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그 대립을 다시 즐긴다. 일종의 사회적 사디스트가 되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궁극적으로는 박지윤과 최동석 모두 샤덴프로이데의 먹잇감이라는 피해자가 되고 만다.     


그런데 이런 것을 모를 리가 없는 박지윤과 최동석은 이런 사달을 벌이는 것일까? 결혼 14년을 하고도 ‘아직’ 피가 펄펄 끓는 40대 중반 나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누군가 한 사람이 심각한 도덕적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인가?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그 도덕적 잘못의 피해자라는 의식으로 상대방을 원수로 여기게 된 것인가?   

  

사실 옛 어른들 말씀대로 부부라는 것은 돌아서면 남이다. 물론 기독교에서는 부부는 신이 맺어준 것이니 인간의 힘으로 갈라설 수 없다고 말한다. 그 근거에는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 신화만이 아니라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말도 있다. 관련 구절을 인용해 본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시어 그를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창세 2, 18.21~25)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읽어보지 않았느냐?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나서,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그들이 다시 예수님께,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므로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마태 19, 3~9)    

 

좀 길었지만, 유대교와 그 뿌리에서 나온 기독교에서 생각하는 부부의 개념이 정확히 묘사된 것이기에 인용해 보았다. 결국 부부라는 것은 한 몸이 될 운명적 존재라는 말이다. 그러나 하늘이 맺어주는 것이 부부라고 해도 예수 시대에 이미 이혼이 흔했다. 그런데 그 당시 여자의 권리가 전혀 없는 유대 사회에서 여자가 이혼당한다는 것은 생존 자체를 위협받는다는 의미가 강했다. 일부다처제인 유대 사회에서 여러 아내 가운데 한 명을 내보내는 것은 남자에게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버림받은’ 여자의 처지에서 이는 생존의 문제였다. 그래서 예수는 십계명에 나오는 패륜에 해당하는 불륜의 경우에만 여자를 버려도 좋다고 한 것이다.    

 

가부장제가 강력했던 과거에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여자의 생계가 전적으로 남자 가장의 손에 달려 있기에 이혼은 죽음과 같았다. 그래서 남자가 아무리 구박해도 버텨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양 여러 나라에서 여성이 직업 전선에 진출하여 경제적 독립을 이루면서 이혼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부부는 하늘이 아니라 돈이 맺어준 인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사회 진출과 경제 활동이 일반화된 오늘날에도 이혼은 여전히 힘든 일이다.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많은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여전히 남성중심주의가 강하게 작용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혼한 여성의 입장은 처음부터 불리할 수밖에 없다. 흔히 남편의 폭력과 외도가 이혼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요즘은 여성의 외도도 종종 이혼의 사유가 된다. 그런 경우 여성은 주홍글씨를 이마에 새기고 다닐 수밖에 없다. 특히 이른바 잉꼬부부로 소문이 난 유명인이 이혼하는 경우 대부분 여성이 악소문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러는 이유가 남성중심주의적 사회 분위기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앞에서 말한 샤덴프로이데가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더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잘생기고, 돈 많고, 사회적으로 유명한 남자와 살던 여자가 이혼하면 그런 샤덴프로이데는 극에 이르게 된다.     


이번 박지윤과 최동석의 다툼이 어떤 결말에 이르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박지윤과 최동석만이 아니라 그들의 자녀 2명도 모두 희생자가 된다는 사실이다. 이 상황에서 한 사람을 죄인으로 단죄하고 그에게 돌팔매질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박지윤과 최동석, 더 나아가 그들의 자녀까지 자신과 같은 인간이 아니라 샤덴프로이데를 극대화하는 수단이라고만 생각하고 이 사달을 ‘즐기고자’ 한다. 이런 인간의 근원적인 악으로 기우는 근원적인 인간의 성향을 일찍이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갈파한 바가 있다. 그리고 그가 쓴 <고백록>에서 고백한 대로 그러한 악으로 기우는 성향을 인간 스스로는 고칠 수 없다고 갈파했다. 그래서 신앙이 필요한 것이고.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기독교가 타락해 버려서 이런 인간의 악한 본성을 극복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못 되고 특히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개신교 성직자의 아동 성폭행 사건이 전 세계적으로 만연한 사실이 드러나고 바티칸마저 돈과 여자와 관련된 추문이 난 이후 교회의 권위는 문자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해 버리고 말았다. 오늘 문제가 된 박지윤과 최동석도 기독교 신자다. 그런데도 이런 사달이 난다. 신도 못말리는 이혼을 과연 누가 막을 수 있을까? 더구나 타인의 불행이 나의 즐거움인 사회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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