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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에이지의 역사

모든 것은 블라바츠키와 슈타이너에서 시작되었다.

by Francis Lee

흔히 말하는 뉴에이지의 역사는 19세기말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뿌리는 기독교의 시작과 함께했다고 보아도 된다. 현재 뉴에이지 사상의 근본적인 배경은 역설적이게도 기독교다. 이른바 정통 교단이 이단으로 단죄한 영지주의도 그 뿌리는 엄연한 기독교다. 다만 가톨릭교회와 교리 논쟁에서, 특히 예수의 신성에 관한 논쟁에서 패하면서 변두리로 물러나게 된 것뿐이다. 그러나 완전히 박멸되지 않고 살아남아 거의 2천 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마침내 20세기에 들어서서 뉴에이지로 확고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사실 기독교는 인류 역사에서 ‘겨우’ 2천 년 정도 인간의, 특히 서양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종교다. 기독교 이전에 많은 종교가 있었고 지금은 힘이 줄었지만, 여전히 흔적으로 남아 있는 조로아스터교는 기독교보다 훨씬 그 역사가 길고 기독교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영지주의의 잔재도 여전히 기독교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같은 주장을 해도 남이 하면 특히 경쟁자가 하면 무조건 이단으로 몰고 가는 기독교의 전통으로 이단으로 낙인찍혔을 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뉴에이지를 영지주의에서부터 뿌리를 찾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뿌리 찾기 운동을 하다 보면 정통 논쟁에 빠지면서 정작 알고 싶었던 현대의 뉴에이지에 대한 이해를 흐리게 되기 때문이다.


흔히 현대 뉴에이지 운동의 시작을 블라바츠키에서 찾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리고 그의 계열을 이은 루돌프 슈타인이 뉴에이지를 본격적으로 확산하고 대중에게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준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물론 이후 우후죽순처럼 나타난 뉴에이지 운동에서는 다른 사상이나 종교와 마찬가지로 계파마다 추종하는 인물이 다양하지만, 이 두 사람의 사상을 배척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 정도로 뉴에이지 운동에서 블라바츠키와 루돌프 슈타인이 차지하는 지위가 높다.


블라바츠키는 그 유명세에 비해 논란이 많은 인물이다.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사상이 다른 철학이나 종교처럼 정교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블라바츠키는 정식 명칭이 엘레나 페트로브나 폰 한-로텐슈타인이다. 그러나 통상 블라바츠키로 더 알려진 이 인물은 현재 전쟁으로 신음하는 현재 우크라이나의 드니프로, 당시 러시아 제국의 예카테리노슬라프에서 1931년 태어났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독일계 집안 출신인 블라바츠키는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면서 영적인 여정을 거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가 1875년 미국에 신지학회를 설립하고 나서 1878년 인도의 첸나이에 신지학협회 본부를 이전한 다음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891년 영국에서 사망하였다. 그가 저술한 Unveiled(1877)와 2권짜리인 The Secret Doctrine(1888)은 뉴에이지 운동 가운데 특히 블라바츠키가 Henry Steel Olcott(1832~1907)와 세운 Theosophical Society, 곧 신지학회에서 거의 성경의 대접을 받는 책이 되었다.


신지학은 힌두교, 불교, 영지주의를 중심으로 여러 영적 전통의 요소를 융합한 전형적인 혼합주의 사상이다. 이 학회가 주장하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인 형제애로 신비주의적인 통찰과 영적 체험을 통한 진리 탐구를 목표로 삼는다. 이 학회의 경전인 The Secret Doctrine에서 블라바츠키는 비교 전통의 가르침을 전수한다고 주장했다. 블라바츠키에게 특히 영향을 준 것은 티베트 불교였다. 그러나 블라바츠키가 언어도 잘 통하지 않는 티베트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웠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을 반대하는 이들, 특히 이른바 제도권의 기독교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블라바츠키의 사상은 거의 대부분의 현대 뉴에이지 운동, 심지어 오컬트 운동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블라바츠키는 이런 정신적 훈련의 여정을 시작하기 훨씬 전인 어린 시절부터 영적 능력이 있어서 많은 환상을 통하여 영적 존재와 교류하였다고 주장한다. 블라바츠키의 이런 주장은 이후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신흥 종교 교주들도 모두 이런 경험을 주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블라바츠키의 인생은 평탄한 것은 아니었다. 17세에 러시아군 장교 니키포 블라바츠키와 중매결혼을 했지만 몇 달 만에 블라바츠키가 가출을 했다. 그 이후에도 정착 생활과 거리가 먼 삶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1875년 뉴욕에서 미국 변호사이자 저널리스트인 헨리 스틸 올컷과 신지학회를 설립하면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 블라바츠키의 대표적인 작품인 The Secret Doctrine은 그의 우주론, 인류학, 종교, 철학을 종합한 책으로 동양 신비주의, 서양 밀교, 유사 과학을 통합한 세계관을 집대성한 것이다. 실제로 신지학에서는 이 책을 경전으로 삼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블라바츠키는 지지자들 이외의 사람들로부터는 지속적으로 사기꾼으로 몰리며 살았다. 특히 블라바츠키를 혐오하는 이들은 그의 영적 체험이 가짜이며 이미 존재해 온 여러 자료를 표절하여 작품을 만들었다고 비난한 것이다. 그리고 동양 사상에 대한 블라바츠키의 이해가 매우 부족하여 불교를 비롯한 동양 영성을 왜곡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블라바츠키는 신지학회만이 아니라 뉴에이지 운동 전체에 막강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 되었다. 특히 그의 syncreticism, 곧 종교 혼합주의는 그의 사후에 등장한 많은 신흥 종교의 근본적 프레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에 비해 루돌프 슈타이너는 사이비 논란에서 비교적 벗어난다. 특히 그가 세운 발도르프 학교는 몬테소리와 더불어 초중등 교육의 표준처럼 되었다.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는 철학자, 사회 개혁가, 밀교주의자이자 영적인 통찰력을 일상생활의 실제적인 측면과 통합하려는 영적 운동인 Anthrosophie, 곧 인지학의 창시자였다. 그는 1861년 2월 27일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였던 현재의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나 1925년 3월 30일 스위스에서 사망했다.

슈타이너의 초기 교육과 관심은 자연 과학, 수학, 철학이었다. 오스트리아 빈 공과대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독일 로스토크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일 철학자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영향을 깊이 받은 슈타이너는 과학과 영성에 대한 총체적인 접근 방식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슈타이너는 신지학회에 참여했다가 1913년 자신만의 영성 운동인 인지학을 개발하여 떨어져 나왔다.


인간의 지혜를 의미하는 인지학은 영적 의식의 발전과 인류의 진화를 강조한다. 슈타이너는 모든 생명체의 상호 연결성을 강조하면서 물질세계와 더불어 존재하는 영적 현실을 포괄하는 세계관을 제안했다. 또한 슈타이너는 지속 가능하고 자급자족을 위한 농업을 강조하는 생물역학적 농업 원리를 개발했다. 이른바 생물역학적 농업에서는 자연의 리듬에 맞춰 농사를 짓고 특정 물질을 사용하여 토양을 비옥하게 하고 식물의 건강을 촉진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슈타이너의 최대 업적은 1919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최초로 세운 발도르프 학교다. 발도르프 학교에서는 전체성의 차원에서 교육에 접근하는 방식을 강조하고 학생들에게 지적인 분야만이 아니라 예술적이고 실적인 기술을 가르친다. 아이들의 발달 단계에 맞춰 커리큘럼을 구성하고 창의성, 상상력, 체험학습에 중점을 두고 있다. 주입식 교육 위주의 관행이 이루어지던 학계에 이는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슈타이너는 또한 전통적인 의학 지식과 전체성 차원의 원리를 통합하는 인지학 차원의 의학을 추구했다. 인지학의 의학에서는 인간이 신체적, 정신적, 영적 차원에서 균형을 이룰 때 건강해진다고 여겼다. 그래서 이를 바탕으로 식물, 미네랄, 금속에서 추출한 물질을 치료에 활용하였다. 이는 오늘날 현대적인 대체의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슈타이너는 인간 발달에서 예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예술을 인간의 영적 성장과 자기표현을 위한 필수 도구로 여겼다. 그래서 인지학 공동체 안에서 음악과 언어의 내적 특성은 물론 기타 예술적 관행을 구현하려는 표현 운동의 한 형태인 이른바 유리트미를 발전시켰다. 슈타이너의 사상은 교육, 농업, 의학, 영성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가 창설한 인지학 운동은 여러 나라에서 발도르프 학교, 생물역학 농장, 인지학 공동체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


슈타이너의 사상은 기성 제도를 대체할 수 있는 프레임, 또는 패러다임의 기초를 마련한 것에 큰 의미가 있다. 영어로 대체의학이 alternative medicine이라고 하는 이유는 현대 의학을 대신한다기보다는 기존의 것을 존중하되 보완 또는 대안이 되는 방법을 제안한다는 의미를 주기 때문이다. 19세기에 유럽 지성사에서 결정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 무엇보다도 기득권을 누리던 왕과 귀족 제도가 먼저 붕괴하자 그 제도에 철저히 기생하던 기독교가 사회의 변두리로 물러나게 되었다. 그 결과 20세기에 정교분리가 법적으로 확립되면서 기독교는 더 이상 과거의 영광을 누릴 수가 없게 되었다. 이렇게 19~20세기에 나타난 기독교의 몰락과 비판의 물결 한가운데 뉴에이지가 서 있다. 철학에서는 니체가 기독교에 맞선 영웅으로 칭송받지만, 블라바츠키와 루돌프 슈타이너는 그런 사변적인 기독교 비판이 아니라 현실적인 종교적 철학적 삶의 방식을 위한 대안을 제시한 것에서 큰 의미가 있다.


뉴에이지는 문자 그대로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뉴에이지 운동은 기독교가 주지 못하는 것을 약속한다. 과거 기독교는 제도화된 커다란 종교 단체인 교회가 신의 은총을 독점하고 성직자가 마치 무당처럼 신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했다. 그래서 성직자가 in persona Christi, 곧 그리스도가 되어 무지몽매한 신자를 지배한 것이다. 예수가 약속한 것은 만민평등의 세상이었으나 로마 시대보다 더 강력한 계급사회를 만들어 낸 것이 바로 기독교 교회다. 그러나 그런 착취 구조는 내적 모순으로 붕괴되었다. 특히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많은 교회가 파괴되고 성직자가 죽임을 당했다.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분노가 그토록 심하게 누적되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가 신뢰를 잃고 난 다음 인간의 영적 갈망을 채워줄 대안이 부재했다. 기독교 교회의 착취 구조에 더 이상 희생당하기는 싫지만, 영적 갈망을 채우고 싶은 욕구는 그대로 남은 것이다. 바로 그런 틈새시장을 침투한 것이 뉴에이지 운동이다. 뉴에이지 운동은 개인의 영적 성장, 온전한 정신적 육체적 건강, 환경보호와 대안 영성을 촉진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면서 서양에서 커다란 바람을 일으켜 왔다. 특히 뉴에이지 운동은 기독교의 배타적 도그마를 배척하고 동양의 영성, 토착 전통, 밀교, 심리학, 신비주의를 포함한 여러 종교적, 철학적 전통의 통합을 추구하는 통합주의로 대중의 인기를 얻게 되었다. 기독교가 그 역사를 통해서 많은 죄악을 저지르고도 사죄할 줄 모르고 여전히 진리를 배타적으로 보유하고 있다는 자만심을 버리지 못하는 동안 뉴에이지는 특히 기독교에 염증을 느낀 이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리게 된 것이다.


뉴에이지 운동에서 강조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영적 육체적 건강, holistic, 곧 전인적 건강이다. 이를 위해 주로 요가, 명상, 에너지 치유, 침술 및 약초 요법과 같은 대체 의학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현대 의학의 기술만이 아니라 인간을 건강에 대한 전인적 관점을 제시한다. 그리고 뉴에이지 운동은 무엇보다도 명상, 시각화, 확언, 자조 기술 등 다양한 수단을 통해 영적 깨달음과 개인적 성장을 추구한다. 여기에 더해 환생, 카르마, positive thinking과 같은 방법도 동원한다. 뉴에이지 운동의 가장 커다란 특징은 syncreticism, 곧 혼합주의다. 인류의 거의 모든 영적, 종교적, 철학적 전통을 받아들인다. 때로는 서로 대립되는 것도 받아들여 절충을 모색한다. 이를 기독교가 가장 혐오한다. 자기편만이 옳다는 아집과 독선에 빠진 기독교는 이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뉴에이지 운동이 대중의 인기를 누리게 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환경보호 운동이다. 환경보호와 지속 가능한 발전의 아이디어는 사실 뉴에이지 운동에서 나왔다. 기독교에서는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환경보호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자연은 창세기에 나오는 대로 인간이 신을 대신하여 지배하고 통치해야 하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가톨릭교회에서 이를 반성하고 생태신학이라는 것을 만들어 수습에 나섰지만, 너무 늦었고 무엇보다 뉴에이지 운동의 짝퉁 수준밖에 이르지 못하고 있어서 큰 임팩트를 주지 못하고 있다. 현재 가톨릭교회가 생태신학의 성경처럼 받들어 모시는 문서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쓴 회칙 <찬미받으소서>인데 그 내용의 수준은 뉴에이지 운동에 미치지 못하는 뒷북에 불과하다.


그런데 뉴에이지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점성술, 채널링, 전생 회귀, 외계 존재나 UFO에 대한 믿음 등 대안적인 형태의 영성을 탐구하기도 하는데 여기에서 기독교로부터 뉴에이지가 ‘미신’이라는 비난을 받는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 더구나 과거 집시들이 주로 사용하는 수정 치유, 점술, 샤머니즘 여행도 권유하는 바람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는 가톨릭에서 자주 상업적으로 이용하여 돈을 버는 성모 발현, 특히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은 파티마 성지까지 이어진 산티아고 도보 순례길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다. 뉴에이지 세계관의 핵심은 개인의 영적 각성과 의식의 확장이다. 그래서 더 높은 인식, 지혜, 신성과 이어질 수 있는 고양된 의식 상태를 추구한다. 과거 기독교는 이러한 과정을 오로지 교회와 성직자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로 주장하면서 그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독점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일반 동료 시민이 스스로 이 길을 찾아 나설 수 있도록 한 것이 바로 뉴에이지다. 그런데 뉴에이지 운동은 분산되어 있어서 기독교, 특히 가톨릭처럼 중앙 본부가 없다. 그래서 기독교와 같은 집단적인 힘을 발휘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바로 이런 비 중앙집중적인 구조가 개인의 자유로운 영혼을 촉진하는 도구가 된다.


이러한 뉴에이지 운동은 무엇보다도 개인주의와 현실주의 그리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현대 사회의 시대정신에 적합하다. 특히 세계화와 정보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인터넷과 같은 통신 기술이 발전하면서 뉴에이지 운동은 들불처럼 확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와 같이 기독교 교회에 얽매어 교회에 십일조와 헌금을 뜯기면서도 늘 죄의식에 사로잡혀 살아야만 했던 시대의 종말을 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본의 아니게 기독교와 대립하면서 뉴에이지 운동은 특히 기득권을 누리던 기독교 교회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었다. 그래서 뉴에이지가 사이비 과학, 마술,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대체의학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그런 비판을 하는 기독교 자체가 과거 비과학적인 우주관과 인간관을 내세워 인간을 착취해 온 사실이 이미 다 드러난 마당에 그런 비판은 큰 호응을 얻지 못한다. 그저 기독교 교회가 독점하던 분야에서 밥그릇 싸움을 벌인다는 인상만 주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기독교 교회가 최근에 밝혀진 대로 오랜 기간에 걸쳐서 아동을 대상으로 성폭행하고 마피아와 돈거래를 하고 성적으로 타락하여 내연의 처를 두고 심지어 동성애 성직자를 용인한 사실을 알고 난 동료 시민들은 더 이상 기독교 교회가 하는 말을 신뢰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래서 뉴에이지 운동은 기존의 기독교 교회의 방해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힘을 잃지 않고 비 중앙집중적인 프레임 안에서 여전히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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