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서론 – 유럽 하늘 위의 공산주의 유령

19세기 유럽 사상사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by Francis Lee

<공산당선언>의 서문부터 시작해 보자.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

Karl Marx, Friedrich Engels


Ein Gespenst geht um in Europa - das Gespenst des Kommunismus. Alle Mächte des alten Europa haben sich zu einer heiligen Hetzjagd gegen dies Gespenst verbündet, der Papst und der Zar, Metternich und Guizot, französische Radikale und deutsche Polizisten. Wo ist die Oppostitionspartei, die nicht von ihren regierenden Gegnern als kommunistisch verschrien worden wäre, wo die Oppositionspartei, die der fortgeschritteneren Oppositionsleuten sowohl wie ihren reaktionären Gegnern den brandmarkenden Vorwurf des Kommunismus nicht zurückgeschleudert hätte?

Zweierlei geht aus dieser Tatsache hervor.

Der Kommunismus wird bereits von allen europäischen Mächten als eine Macht anerkannt.

Es ist hohe Zeit, dass die Kommunisten ihre Anschauungsweise, ihre Zwecke, ihre Tendenzen vor der ganzen Welt oen darlegen und dem Märchen vom Gespenst des Kommunismus ein Manifest der Partei selbst entgegenstellen.

Zu diesem Zweck haben sich Kommunisten der verschiedensten Nationalität in London versammelt und das folgende Manifest entworfen, das in englischer, französischer, deutscher, italienischer, flämischer und dänischer Sprache veröffentlicht wird.


직역해 본다.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바로 공산주의 유령이다.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 급진파와 독일 경찰 등 옛 유럽의 모든 세력이 힘을 합쳐 이 유령에 맞서 싸웠다. 집권 세력으로부터 빨갱이라고 욕먹지 않은 반대파가 어디 있고, 진보적인 대항 세력이나 반동 세력에 빨갱이라는 낙인을 되돌려주지 않는 반대파 또한 어디 있겠는가? 이 현실에서 두 가지 사실이 드러난다. 공산주의는 이미 유럽의 모든 세력으로부터 또 하나의 세력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의 견해, 목적, 경향을 전 세계에 공개적으로 발표하고 당 자체의 선언문으로 공산주의 유령에 관한 헛소리에 맞서야 할 때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여러 나라의 공산주의자들이 런던에 모여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플레망어, 덴마크어로 출판될 다음 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했다.”


이 서언은 그 당시 유럽의 정치사상사를 간결하지만, 포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23페이지에 불과한 이 선언의 모든 요체가 여기에 담겨 있다. 그러나 유럽의 근대사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이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 공산주의가 하필 유령이 되었을까? 그리고 왜 교황이나 차르는 물론 집권 여당은 한결같이 자기 맘에 안 드는 야당을 빨갱이로 몰았을까? 더 나아가 왜 진보든 보수든 모든 정치, 사회 세력이 공산주의자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알기 위해서는 서양 근대사를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공산당선언>을 읽어본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공산주의도 모르면서 맨날 빨갱이 타령이나 할 수밖에 없는 일 아닌가?


유럽의 역사는 프랑스 대혁명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할 정도로 1789년의 대혁명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민중이 귀족 기득권 세력에 맞서 들고일어나서 궁극적으로 구체제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목을 잘라버리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 두 사람의 머리가 피를 뿜으면서 땅에 굴러 떨어진 장면이 사실상 구체제 종말의 시작을 알린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구체제의 상징이었던 가톨릭교회와 성직자가 민중의 손으로 파괴되고 죽임을 당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나면서 기독교 교회의 절대적 권위가 무너지는 촉진제가 된 것도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었다. 이 프랑스 대혁명은 뜻하지 않게 미국의 독립전쟁을 촉발했고 결국 오늘날까지 세계를 지배하는 USA를 탄생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한마디로 근대 유럽만이 아니라 세계 역사를 바꾸는 대사건이 된 것이다. 기득권 세력이 민중을 화나게 하면 목이 잘릴 수 있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증명한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이 가져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나폴레옹 '황제'였다. 민중이 물리치고자 한 왕정이 전혀 예상치 못한 형태로 복고한 것이다. 결국 핍박받는 민중의 삶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왕과 귀족의 자리를 새로운 권력자들이 차지하고 민중은 여전히 핍박받는 프레임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은 것이다. 그 새로운 권력자 가운데 가장 강한 자가 바로 자본가였다. 이제 세계 역사는 귀족과 농노의 대립이 아니라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으로 진행되면서, 비록 근본적인 내용은 같지만 형태는 전혀 다른 착취 구조의 생성이라는 모순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의 모순적 발전을 통찰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들이 구상한 공산주의로 이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는 매우 ‘순진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공산주의 사상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창작품이 아니다. 인류는 유사 이래로 늘 모두가 공평하게 잘 사는 세상을 꿈꾸어 왔다. 특히 농경문화가 발달하면서 부자와 빈자. 권력자와 피지배자의 계급이 생겨나면서 착취당하고 핍박받는 계층이 그런 꿈을 더욱 꾸게 되었다. 그러한 평등한 사회는 다름 아닌 예수 공동체도 꿈꾸었다.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 이른바 원시 종교 공산주의적 이상을 실천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신약성경 <사도행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이적과 표징이 일어나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행전 2,42~47)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것은 오늘날 가톨릭 교회의 성찬식을 말한다. 중요한 것은 당시 초대 교회에서는 오늘날처럼 일요일에 교회에 가서 미사 드리고 신부의 강론을 듣고 영성체 하고 기도하는 예식만 거행한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각자 음식을 가져와 서로 나누어 먹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먹을 것이 부족한 빈민들이 많은 기독교 공동체에서 이는 생존의 문제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신자들이 모두 함께 지내고 모든 것을 공유했다. 게다가 개인의 재산을 팔아서 저마다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완벽한' 공산주의 공동체의 모습이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꿈꾼 공산주의 국가도 이런 기독교 사상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공산주의 정신으로 시작한 예루살렘의 이른바 다락방 교회 공동체는 로마제국의 침략으로 유대왕국이 문자 그대로 초토화되면서 같이 무너졌다. 그런 몰락 이후 남은 교회는 예수를 단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그의 가르침을 직접 들은 적도 없는 바울이 소아시아, 지금의 유럽 대륙에 세운 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이후 초대 교회의 공산주의 정신은 사라지고 탐욕과 싸움과 투쟁과 정복욕만 교회 안에 남았다. 그런 유럽 기독교 교회의 전통이 거의 2,000년 동안 이어져 왔고 이제 급속히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기독교 교회 붕괴의 원인은 내적 모순에 있다. 그러나 기독교 교회, 특히 가톨릭교회는 공산주의가 교회를 무너뜨리는 가장 사악한 악마로 여겼다. 실제로는 세속화된 기독교 교회의 물질주의였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공산주의는 무신론에서 출발하기에 좋은 핑곗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기독교는 공산주의를 무너뜨리겠다고 호언장담한 히틀러에게서 기독교를 살려줄 메시아를 보았다. 이런 이유로 특히 독일 가톨릭교회의 주교들은 너도나도 나서서 독일 국민에게 히틀러를 제3제국만이 아니라 천년왕국을 완성할 새로운 메시아로 여기며 따를 것을 강요하기도 한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는 기독교 원시 공산주의에 뿌리를 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비록 무신론을 내세웠지만 그들이 태어난 땅인 유럽은 기독교 정신으로 물들어 2천 년 가까이 흐른 곳이기에 그 어떤 사상도 기독교 정신을 배제하고 나올 수 없는 지역적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센 왕국의 트리어에서 태어난 카를 마르크스의 아버지 하인리히 마르크스는 아시케나지 유대인 혈통이었으나 생존을 위하여 루터교로 개종하였다. 물론 강제 개종이었으니 처음에는 신앙은 없었으나 나중에 가면서 가족의 기독교 신앙생활을 강조하고 죽고 나서도 기독교 묘지에 묻혔다. 이렇게 카를 마르크스는 기독교 신앙을 가졌을 뿐 아니라 아버지가 변호사였고 어머니가 네덜란드의 유명한 대기업인 필립스 가문 출신으로 유복한 생활을 했다. 그런 그가 변호사가 되기를 바라던 아버지의 바람을 거부하고 그 당시 유행하던 헤겔과 유물론 철학을 공부한 것이 결국 그를 무신론자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철학 자체가 마르크스를 무신론자나 공산주의자로 만든 것은 아니다.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철학할 여유를 지니고 당시 사회를 갈등론을 바탕으로 바라보는 그의 사회과학적 시각이 그를 무신론자, 정확히 말해서는 반기독교교회주의자로 만든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프랑스 대혁명 이후 위신이 바닥에 떨어진 가톨릭교회는 이른바 게토화의 길을 걸었다. 곧 그 이전만 해도 유럽 문명의 중심 역할을 하던 교회가 주변으로 쫓겨난 것이다. 이렇게 몰리게 된 결정적 이유는 물론 민심의 이반이 가장 크지만, 교회의 무능과 내적 모순 때문이다. 예수는 분명히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설파했지만 정작 교회와 성직자는 세속적인 재물과 세속 권력을 추구하면서 타락한 것이 더 큰 근본적 원인이다. 교회가 세속 세상을 거룩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오히려 반대로 세상이 교회를 세속화시켜버린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을 마르크스도 파악하고 기독교 교회를 혐오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를 일반적으로 유신론적 종교 전체를 거부하는 무신론자로 부르는 이유는 서양에서 기독교가 유일한 종교였고 그 종교가 유일신을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서양에서는 종교가 기독교고 기독교가 종교라는 생각이 강하다. 그가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와 사상마저 부인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마르크스의 무신론은 정확히 말해서 반기독교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무신론은 정신이나 영혼보다 물질의 우선권을 주장하는 그의 유물론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물질적 존재 조건이 인간의 의식과 사회를 규정한다. 정신은 물질에 종속되는 것이다. 전통 기독교에서 말로는 영이 육보다 앞선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교회 자체도 돈과 권력이라는 물질세계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자기 자신의 존재 이유를 부정해 버렸다. 이러한 현실적인 유물론적 세계관에는 신을 포함한 초자연적이거나 영적인 존재가 설 자리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르크스가 기독교가 ‘민중의 아편’이라고 부른 이유는 기독교가 현실적인 부조리 곧 권력자와 자본가로부터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물질적 조건에서 민중의 관심을 엉뚱하게 '저세상'으로 돌림으로써, 근본적으로 현실적 불의와 불공정에 대해 민중이 분노할 수 없도록 만들며 부조리하고 불의한 status quo, 곧 불의한 현 상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민중에게는 저세상의 복을 구하라고 큰소리치면서 정작 교회와 성직자는 이 세상의 물질과 권력을 탐하는 위선이 마르크스를 화나게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를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하고 노동계급을 복종하게 만드는 데 사용하는 정신적 도구로 보았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거부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사회 비판과 혁명적 변화에 대한 요구에서 필수적이었다. 여기에 더해 계몽주의 사상도 마르크스의 무신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신과 종교적 교리보다 이성, 과학, 세속주의를 장려하는 계몽주의 사상이 마르크스의 마음에 더 든 것이다. 특히 사상의 자유와 세속적 통치를 옹호한 볼테르와 디드로 같은 인물들은 마르크스의 지적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 추가로 사적 유물론이 마르크스의 무신론에 결정적 영향력을 미쳤다. 이 사적 유물론에서는 역사적 변화의 원동력이 생산 수단 통제를 둘러싼 다양한 사회 계급 간의 투쟁이라고 전제한다. 이러한 틀에서 교회와 성직자와 교계제도를 수립하여 제도화된 기독교는 절대적인 불변의 진리를 반영하기보다는 특정 사회 경제적 조건의 산물로 간주된다. 사회가 발전하고 물질적 조건이 변화함에 따라 이념적, 종교적 신념도 변화한다는 말이다. 이는 기독교가 들으면 기분 나쁜 주장이지만 현실적으로 맞는 말이다. 인류 역사 이래 많은 종교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는데 그 근본 이유는 정치적, 사회적 조건의 변화다. 페르시아 제국이 붕괴하면서 조로아스터교가 사라졌고, 이집트 왕조가 붕괴하면서 이집트 종교가 무너졌다. 중국 당나라가 무너지면서 중국 불교도 쇠퇴하였다. 한국 고려 왕조가 무너지면서 한국 불교도 산속으로 쫓겨났다. 종교적 진리는 현실적 정치권력의 부침에 따라 얼마든지 흔들려 온 사실을 인류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 서양 제국이 붕괴하기도 전에 기독교가 무너져 가고 있다. 정교분리 이후 경제적, 사회적 조건이 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르크스의 무신론에 영향을 끼친 것은 어느 정도 헤겔의 영향도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처음에 헤겔 철학의 영향을 받아 공부했지만, 나중에는 유물론적 변증법을 선호하여 헤겔 철학의 이상주의를 거부했다. 기독교 신학의 요소를 접목한 헤겔의 철학은 궁극적으로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세계관과 일치하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그는 역사와 현실에 대한 종교적, 이상주의적 해석을 거부하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마르크스의 무신론, 곧 반기독교 정신은 그의 철학적, 경제적, 정치적 사상의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이런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를 기독교가 가장 앞장서서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르크스가 결국 기독교 교회와 성직자의 현실적 '밥그릇'을 빼앗는 결과를 낳으니 어찌 반대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위의 서문에 구체적으로 언급된 인물인 교황과 황제는 민중을 착취하는 마르크스가 극도로 혐오한 교회와 정치권력을 의미하는데, 메테르니히와 귀조는 구체제의 권력에 기생한 대표적인 정치가였다는 점에서 공산주의의 최대 적으로 간주되는 구체적인 인물이다.


프랑수아 기조(François Guizot, 1787~1874)는 부르봉 왕조 시대부터 제3공화국이 시작될 때까지 프랑스 역사의 격동기에 걸쳐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유럽 문명사를 기록한 〈프랑스 문명사〉(1828)의 저자로 유명하지만, 그 이전에 화려한 정치 경력을 쌓은 것으로 더 유명하다. 특히 부르봉 왕정복고 시기에 여러 직책을 맡았던 극보수주의자로 군주제와 입헌군주제를 지지했다. 반면에 현대민주주의 대의제는 그리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 기조는 1830년 7월 혁명으로 시작된 이른바 7월 군주제 루이-필리프 정부의 핵심 인물이 되었고 1847년부터 1848년까지 총리를 역임했다. 그러나 그는 보수적인 정책과 민주주의 개혁에 대한 저항 하다가 결국 1848년 2월 혁명 때 몰락하게 되었다. 이후 기조는 영국으로 망명하여 글을 쓰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이때 쓴 책으로 그는 19세기 프랑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기조보다 한국에 훨씬 더 잘 알려진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상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 몰락 이후 수립된 빈 회의의 의장이 되어 유럽 정치 질서 재편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그의 목표는 오직 하나, 프랑스 대혁명으로 무너진 구체제의 질서 회복뿐이었다. 극보수주의자인 메테르니히는 자유주의나 민족주의를 극도로 혐오하고 오로지 왕과 귀족이 지배하는 구체제의 유지만을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그러나 1948년 2월 프랑스에서 2월 혁명이 발발하자 빈 회의 의장 자리에서 쫓겨나 영국에 망명하였다. 그런데 상황이 정리되자 다시 오스트리아로 돌아와 왕의 자문 역할을 하면서 여전히 권력 주변에 머물렀다.


이런 극보수주의자들이 마르크스의 눈에 공산주의의 적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보수주의자들 말고 일반 시민인 프롤레타리아나 부르주아지에도 반발당하는 형국이었다. 공산주의는 이렇게 처음부터 문자 그대로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시작된 것이다. 특히 기득권 세력의 반대는 당연하지만 진보 진영은 물론 일반 시민의 반대는 공산주의자들에게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자본주의의 착취 구조를 인식하지 못한 무지의 탓이었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선언>으로 공산주의의 본질을 설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흔히 공산주의의 시조가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로 알려져 있지만 실질적으로 공산주의의 실천적 토대를 마련한 것은 오히려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였다. 마르크스가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은 지식층인 데 비하여, 엥겔스도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대학을 제대로 다니지 않고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을 준비를 하던 현실적인 청년 사업가였다. 그러나 아버지도 운영하던 영국의 공장의 노동자들이 당하는 고통을 보고 회심을 하여 노동자들의 착취에 관한 글을 쓰면서 공산주의 운동의 씨앗을 키우게 되었다. 그리고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의 초안인 <공산주의원리>를 작성할 정도로 지적으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인물이었다. 다만 마르크스가 쓴 <자본론>이 지적으로 매우 뛰어난 저작물이 되었고 역사에서도 이 책을 공산주의의 경전으로 여기게 되면서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뒤로 밀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자본론> 저술에도 깊이 관여하여 마르크스 사망 이후 <자본론> 간행을 지속하였고 유럽 전역에서 노동자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비유하자면 마르크스가 예수라면 엥겔스는 바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기득권 세력의 격렬한 저항과 일반 시민의 몰이해로 공산주의 운동은 그 출발이 쉽지 않았다. 특히 바쿠닌과 같은 극단적인 진보주의적 무정부주의자와의 노선 투쟁은 좌파 세력 내부의 분열을 가져왔다. 여기에 더해 유럽 전역에서 벌어진 노동자 투쟁이 계속 실패하고 공산주의 운동이 큰 반향을 못 일으키자, 마르크스는 저술에 전념하게 되었던 것이고 마침내 대작인 <자본론>을 완성하게 되었다. 물론 마르크스는 <자본론>의 1권 만을 출간했고 나머지 2, 3권은 오로지 엥겔스 덕분에 햇빛을 보게 되었다. 그 자신도 상당한 저술가였음에도 마르크스에 대한 존경심으로 항상 그의 뒤에 선 엥겔스가 아니었다면 오늘날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태두라는 명성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분석하고 있는 <공산당선언>도 사실 엥겔스가 주도하였으나 마르크스의 이름이 먼저 나온 것도 엥겔스의 이런 겸손이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공산당선언> 서문에는 독일어로 된 이 문서가 여러 나라의 말로 번역될 것이라고 했지만 본격적으로 다른 나라 말로 번역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다. 특히 1960년대 미국과 소련이 냉전을 벌이면서 특히 지식인들이 애독하는 글이 되었다. 다만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바랐던 혁명의 지침서가 아니라 지적 탐구의 대상으로서 말이다. 그런데 유독 한국에서만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40년 가까운 반공 독재 정권으로 말미암아 공산주의에 대한 학문적 접근은 원천 차단 당하고 <공산당선언>에 나오는 대로 맘에 안 들면 다 뺄갱이따지를 붙이는 전통 아닌 전통만 남게 된 것이다. 게다가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수구 세력이 정권만 잡으면 변함없이 빨갱이 타령이나 하는 한심한 상황이 되풀이되고 있다. 심지어 김홍도 장군도 빨갱이라고 배척하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근본적인 원인은 물론 권력에 눈이 어두운 세력이 조장하는 이데올로기 대립 구도이지만 무엇보다 국민이 깨어있지 못해 벌어지는 일이다. 정치 모리배들이 아무리 설쳐도 국민이 깨어 있다면 넘어갈 리가 없는 일 아닌가? 그래서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기 위한 지적 탐구의 여정을 여기에서 시작하고자 하는 것이다. 자세한 본문 내용 분석은 다음 장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본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프롤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