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시 부르는 공무도하가

웰다잉의 여정을 따라가 본다.

by Francis Lee

아버지의 97회 생신을 보냈다. 자식들이 모여 아버지와 함께 식사하는 것으로 잔치를 대신했다. 5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혼자되셨으나 아직도 잘 견디고 계신다. 피부도 맑은 편이고 무엇보다 노인 특유의 검버섯이 없다. 그리고 귀가 좀 어둡지만, 보청기를 교체하러 간 곳에서 들은 이야기로는 인지능력이 뛰어나 듣는 데 큰 문제는 없다고 한다. 흔히 귀가 어두워진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생물학적 청각 기관의 노화보다는 인지능력의 저하로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고막이 울려서 청각을 통해 들어온 자극이 뇌로 전달되어도 뇌가 그 신호를 이해하지 못하여 못 알아듣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큰 소리로 말해도, 아무리 좋은 보청기를 사용해도 노인들이 말을 못 듣는 것이 아니라, 이해를 못 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러나 아버지는 인지능력이 뛰어나서 청각 신호가 약해도 머리로 그 소리를 구성하여 이해하는 능력 또한 뛰어나다. 칸트가 말한 이른바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진 12범주가 아버지 머리 안에서 잘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를 직접 보고 있는 중이다. 또한 노화의 전형적인 증상인 보행 기능의 퇴화도 아버지에게는 눈에 뜨이게 벌어지지 않고 있다. 대부분 지팡이에 의존하지만, 지팡이 없이도 걷는 데 아직 큰 문제가 없다. 97년 ‘사용한’ 육체의 기능이 아직은 심각한 수준으로 약화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노화되었다’라는 것을 확연히 느끼는 일이 있다. 바로 잠꼬대다. 아버지는 수시로 낮잠을 주무신다. 80대에는 안 보이던 증상이다. 특히 90대 중반을 넘기면서 낮잠의 횟수가 많이 늘었다. 그런데 그렇게 자주 주무시면서 잠꼬대도 늘었다. 그리고 그 잠꼬대의 내용도 과거와 다르다. 거의 이런 잠꼬대를 하신다.


“O선아. 같이 가자.”


“아버지, 도와주세요.”


“할아버지, 도와주세요.”


갑자기 뜬금없이 그것도 상당히 큰 소리로 이런 말씀을 하셔서 뭔 일이 있나 하고 달려가 보면 낮잠을 깊이 주무시고 계신다. O선은 큰 형님의 장남, 이른바 집안의 종손이다. 몇 년 전에 죽었다. 아버지가 막내라서 조카이지만 나이 차이는 크지 않다. 내게는 큰 사촌 형뻘 된다. 그 형이 지금은 북한 땅이 된 고향에서 아버지에게 매우 각별했다고 들었다. 한국전쟁 때 20여 명의 친인척이 남한으로 피난 나왔는데 그때 그 형도 함께 있었다. 그런데 그 형이 남한으로 내려와서도 아버지에게 매우 각별했다고 한다. 그래서 꿈에 자주 보이는 것인가? 낮잠에서 깨어난 아버지께 그 형 꿈을 꾸었냐고 여쭈어보면 별말씀이 없다.

사실 아버지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주 이런 말씀을 하신다.

“야... 이제 내가 어떻게 하지?”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2년에 걸친 과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실 때만 해도 별 반응이 없었던 분이 아버지다. 그래서 이른바 멘털이 강한 분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제 당신의 차례가 왔다는 것을 직감하시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 것처럼 보인다. 97년 동안 산 이 세상과 작별하기가 쉽지는 않을 일일 것이다.


여러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죽음이 가까워지면 꿈이든 환시든 먼저 죽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 과정이 시작되면 죽음을 대비하는 마음을 준비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정신은 준비하지만, 이 세상에 묶인 육체는 그런 죽음에 여전히 강력하게 저항한다. 그러한 저항의 가장 대표적인 행위가 식욕에 충실히 하는 것이다. 아버지도 예외가 아니다. 90대 중반을 넘기면서 식사량이 과거에 비해서 줄었다. 아버지는 20세기 초반에 태어난 어르신들과 마찬가지로 배고픈 세대에 속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식사량이 일반인의 두 배가 넘었다. 특히 붉은 살코기는 3인분이 기본이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그렇게 좋아하는 고기도 1.5인 분 정도밖에 못 드신다. 그래도 식사할 때 보면 매우 적극적으로 음식을 섭취하신다. 종종 과식을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특히 맛난 음식을 보면 식욕을 억제하지 못하신다.


흔히 불교나 기독교와 같은 종교 그리고 철학에서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 곧 식욕, 색욕, 수면욕이 인간의 정신을 고양하는 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억제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과연 그런지 의심이 된다. 아버지를 관찰하면서 말이다. 잘 드시고, 잘 주무시고, 자식도 4명이나 낳고, 젊은 한때 바람도 피우신 분이다. 그런데 그런 분이 정신적으로 타락하거나, 저급하거나, 지나치게 속되다고 느끼게 하지 않는다. 그저 평범하게 세상에서 종족 보존의 본능에 충실하여 평생을 살아왔을 뿐이다.

그런 분이 이제 죽음에 가까웠지만 여전히 종교나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득도’나 ‘초월’, 또는 kenosis, 곧 자기 비움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그러나 평생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나의 눈으로 볼 때 별문제 없어 보인다. 공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맹자, 노자, 장자, 심지어 예수나 부처도 죽었다. 물론 그 종교의 신자들의 입장에서 그들은 영원한 세계에 가 있다. 그러나 아버지도 곧 그 영원의 세계로 갈 것이다. 무슨 근본적인 차이가 있나?


다만 아버지는 그 세계로 천천히 옮겨가는 모습이다. 이 세상과 저세상에 모두 발을 디디고 서서 천천히 저세상으로 건너가고 있는 것이다. 저세상에 미리 가 있는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얼마 전에 먼저 그곳으로 건너간 조카가 눈에 보이니 말이다. 아버지는 특별한 신앙심이 깊지도 않다. 원래 토속 종교와 불교에 기운 정신세계에 있었지만, 자식들 성화로 ‘억지로’ 기독교식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된 분이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에 대한 신뢰가 여전히 없다. 그러나 신앙이 있든 없든, 예수든 부처든 때가 되면 다 강을 건너 피안의 세계로 간다. 그 강을 지금 아버지가 건널 준비를 하고 계신다. 언제 그 강을 건널지는 아무도 모른다. 도력이 깊은 선승은 자신의 입적 날짜는 물론 시간도 안다고 하는데.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할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죽을 날을 알고 죽으나 모르고 죽으나 어차피 죽은 것은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이제 아버지가 그 강을 건너실 때까지 관찰 일기를 적어보고자 한다. 지금 세계 최고령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분의 나이가 114세라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가 그 기록을 깨신다면 앞으로 17년 남았다. 과연 그 기록을 깨실지 그리고 그때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시다가 그 강을 건너실지 궁금하다. 그래서 시작해 본다.

전설에 따르면 강물에 빠져 죽은 백수 광부의 아내가 공무도하가를 부르고 따라 죽었다고 한다. 고조선의 곽리자고가 새벽에 배를 손질하면서 우연히 그 장면을 보고 들은 노래를 아내인 여옥에게 들려주었고, 여옥은 공후라는 악기를 연주하면서 그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公無渡河(공무도하)

公竟渡河(공경도하)

墮河而死(타하이사)

當奈公何(당내공하)


그냥 번역해 본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세요.

님은 기어이 그 강을 건너셨네.

물에 빠져 돌아가시니

가신 님을 어찌하나요?


물론 전설적인 이야기이기에 여러 사람이 나름대로 해석을 다양하게 해 왔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이제 아버지가 강을 건널 채비를 하고 계신 모습을 보면서 나 또한 이 노래를 부르게 된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결국 나도 ‘가신 님을 어찌해야 하나요?’라며 한탄하고 말 것이다. 그것이 인생 아닌가? 그래도 아버지의 여정을 따라 기록하면서 인생의 의미를 다시 새겨볼 모양이다. 내 기억 속에 아버지를 간직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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