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론의 뿌리는 증오일 뿐이다.
트럼프가 암살을 간신히 모면한 장면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그런데 온라인에서는 즉각 음모론이 퍼지고 있다. 트럼프가 승기를 확정 짓도록 특정 세력이 이 사건을 조작해 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음모론이 퍼지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자. 뉴스를 보니 이 모든 것이 음모라면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경호 지역 밖에서 정확히 트럼프의 귀를 노리고 총을 쏠 수 있는 명사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암살자는 자신은 현장에서 죽어야 한다는 것을 사전에 인식하고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또한 현장에 참석한 관객이 죽거나 다칠 것을 전제해야 한다. 뉴스를 보니 총알을 적어도 5~6발을 발사했다. 트럼프는 두 발째부터 몸을 숙이고 경호원들이 보호에 들어갔다. 그러니 암살자가 트럼프를 노린 것이라면 나머지 총탄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트럼프는 귀에 총을 맞기 전 옆을 바라보면서 불법 이민자 관련 자료를 설명하는 중이었다. 그는 단상에서 계속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움직이는 목표물을 대상으로 귀를 조준해서 구멍을 내는 이른바 짜고 치는 고스톱을 친다고? 그런 도박을 다름 아닌 트럼프 자신이 주도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과연 이런 조건이 다 충족될 수 있는 음모를 트럼프 진영이나 친트럼프 진영에서 조작해 낼 수 있을까?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겠지만 이런 정도의 음모를 꾸며서 그 진실이 밝혀진다면 그렇지 않아도 법적인 다툼에서 고난을 겪고 있는 트럼프 진영에는 치명타가 된다. 귀에 난 총구멍 정도의 임팩트를 초월하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미 승기를 잡은 트럼프 진영에서 이런 무모한 음모를 그것도 선거를 몇 달 남긴 이 시점에서 벌일 리가 만무한 일이다.
상식적으로 조금만 생각하면 이런 음모론은 거짓임을 쉽게 알 수 있는데도 이처럼 늘 되풀이되어, 특히 소셜 미디어에 홍수처럼 퍼지는 이유는 단 하나다. 증오심이다. 이런 증오심은 미국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널리 퍼져있다. 특히 내가 싫어하는 정치가, 정치적 진영에 대한 증오는 자주 내란이나 국제적 전쟁까지 불러일으킨다. 인간의 근원적인 어리석음에서 나오는 이런 증오가 도대체 왜 생긴 것일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목적이 있다고 여기는 것을 합목적성이라고 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상응하는 목적, 곧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다. 인간의 두뇌는 모든 벌어지는 일이나 존재하는 것에 대해 그런 합리적인 해석을 해야만 안심이 된다. 그렇게 인과론적인 결론을 내려야 미래에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에서는 Zweckmäßigkeit라는 단어의 일반적으로 유용성의 차원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지만 Kant의 <판단력 비판>에 나오는 것처럼 전통 철학에서는 좀 더 깊은 의미를 지닌 단어다. 그런데 그렇게 합목적적인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변수를 고려한 숙고와 성찰이 필요하다. 문제는 그런 작업이 만만치 않다는 데 있다.
올바른 인식과 판단, 여기에 더한 올바른 식별을 하는 능력은 오랜 정신적 훈련을 통해서만 획득이 가능한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일반인들이 철학적 사고 훈련을 받을 기회도 의욕도 없는 현대 사회에서 이런 능력은 희귀 재가 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래서 특히 정치와 관련된 일에 관한 판단은 군중심리에 좌우되는 경향이 있다. 누군가 앞에 나가서 선전·선동을 하고 그의 주장이 내 맘에 들면 그가 옳다는 판단을 내려버린다. 그리고 그 판단이 일단 내려지고 ‘내 편’이 만들어지면 그다음부터는 이성적 판단과 행동을 하기가 무척 어렵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자기반성을 해야 한다. 그런데 한 마디로 이런 자기반성은 귀찮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미 맘을 정하고 누군가를 믿고 따르기로 했는데 또 깊이 생각하고 이리저리 분석하고 ‘바른 기준’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내가 지닌 생각을 지지하는 의견만 받아들이고 그에 반대되는 것을 배척하는 습관이 들게 된다. 그래서 편견이 생기고 자신의 편견을 공격하는 다른 의견에 적대감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정치적 증오가 탄생한다.
일단 정치적 증오가 확립되면 나와 ‘내 편’을 반대하는 모든 의견과 사람은 ‘적’이 된다. 나를 귀찮게 하고 더 나아가 내게 위협이 되는 적이 되는 것이다. 이런 정신을 지닌 이들은 집단으로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고 사회적 갈등, 더 나아가 국제적 갈등을 벌이기 십상이기에 세계 곳곳에서 늘 분쟁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분쟁 상황에 더해 실질적으로 gatekeeping 기제가 없다시피 한 소셜 미디어에서 음모론이 퍼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이번 트럼프 암살 음모론과 같은 뉴스를 접하고 나서 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에 의존해야 할까? 가장 중요한 것이 ‘상식적으로 생각하기’다. 중세 때 윌리엄 오컴은 신의 존재 증명에 대해 고민하면서 인간 사고의 한계를 발견하게 되었다. 곧 인간이 어떤 대상에 대해 생각하는데 점점 머리가 복잡해지면 틀린 결론에 이르기 쉽다는 사실이다. 진리는 늘 간단한 법이다. 이는 나중에 아인슈타인도 공감한 주장이다. 우주를 설명하는 수학식을 만드는 데 그 수식이 간단명료하지 않고 복잡해지면 틀린 식이라는 것이다. 이를 흔히 ‘오컴의 면도날’ 법칙이라고 하는 데 실제로는 그가 이 원리를 최초로 발견한 것은 아니다. 그의 선배인 듄스스코투스의 철학을 정리하던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인 존 펀치가 한 말이 더 유명하다. “Pluralitas non est ponenda sine necessitate” 곧 절실히 필요하지 않다면 굳이 문제를 복잡하게 설명하려 들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특히 신의 존재와 같은 진리를 논할 때 더욱 그렇다.
그런데 이런 원칙을 첨예한 갈등을 벌이는 정치적인 문제에 적용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이런 단순함의 원칙이 바로 상식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과 같이 지연 혈연 학연으로 처절하게 갈라진 나라에서 생각을 복잡하게 하지 말고 모든 것을 상식 수준에서 다루고 이해하는 훈련을 하다 보면 음모론이 떠돌 이유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 상식이냐는 데서 다시 심각한 논란이 발생하게 된다. 이미 서로에 대한 증오심이 강화된 상황에서는 ‘나’의 생각이 상식이고 ‘너’의 생각은 억지가 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당연히 하버마스가 말한 토론민주주의 활성화다. 엘리트 정치가의 선전·선동에 끌려다니지 말고 민주주의의 주체인 시민이 정치적 이슈에 관해 민주적으로 토론을 벌일 수 있는 이른바 공론장이 마련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공론장에서 누구나 제한을 받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소셜 미디어가 그런 토론의 훌륭한 장이 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지금 보고 있듯이 어느 사이 소셜 미디어조차 가짜뉴스에 편견이 범람하는 쓰레기통이 되어가는 중이다. 그만큼 인간의 편견과 증오는 치유가 거의 불가능한 질병이다.
그렇다면 전혀 대책이 없는가? 있다. 그것은 바로 상대방에 대한 σπλαγχνίζομαι, 곧 애간장이 끊어질 정도의 연민을 가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가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가르치고자 한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슬픈 존재다. 이 세상에 잠깐 다녀가는데 세상이 인간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통 고통에 시달린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은 물론 사회적으로 잘 나가는 사람도 늘 전전긍긍하고 산다. 부처가 말한 대로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 자체가 근본적인 고통의 바다이다. 그리고 그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은 집착이다. 그리고 그 집착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나의 생존이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blinder Wille zum Leben, 곧 맹목적인 생의지가 인간의 삶을 고통으로 이끄는 것이다. 생존본능에서 이기주의가 나오고 이기주의에서 궁극적으로 나의 생존에 방해가 되는 타인에 대한 증오가 나온다. 그런데 내가 증오하는 그 인간도 나와 마찬가지로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면 위에서 예수가 말한 스플랑크니초마이 곧 연민이 생긴다. ‘너도 나처럼 이 세상을 힘들게 살고 있구나’라는 근원적인 자각 말이다.
성경을 보면 예수가 병든 사람을 치유하거나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기 전에 반드시 이런 스플랑크니초마이를 느꼈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준다. 그것이 예수의 실천적 사랑인 것이다. 이런 인간의 근원적인 슬픔, 곧 자신이 원하지 않았는데 태어나서 힘들게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자각에 이르게 되면 다른 인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 그런데 이런 생각에 이르려면 철학적 사고 훈련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른바 먹고살기 바쁘고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데 그럴 시간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래서 오늘도 결국 음모론에 몰두하는 사람들만 넘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될 뿐이다. 참으로 슬픈 세상이다. 그저 모방범죄와 증오에 눈이 멀어 바이든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 세상에서는 결국 우리 모두 서로의 저격병으로 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파멸에 이르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인 탐욕과 증오가 세상을 지배하는 날이 어서 사라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