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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Oct 19. 2020

반려동물과 스마트폰 그리고 사회

사회윤리란 무엇인가 시리즈 II


 이제 개와 고양이는 애완동물이 아니라 반려동물이다. 곧 좋아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정서적으로 의지하고자 가까이 두고 기르는 동물이 된 것이다. 반려동물이 없으면 도저히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개나 고양이의 ‘집사’라는 단어도 등장하였다. 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동물의 종이 되고자 하는 것일까? 다른 인간, 특히 가까운 친구나 식구에 대해서는 종이 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면서 말이다. 여기에는 사회윤리적 분석의 대상이 되는 이유가 있다.  

   

2019년 현재 한국에서는 26.4% 곧, 4가구 가운데 한 가구가 반려동물과 더불어 살고 있다. 2010년의 17.4%에 비하여 52%나 늘어난 수치이다. 구체적으로 개는 495만 가구에서 598만 마리를 고양이는 192만 가구에서 258만 마리를 기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다른 반려동물인 열대어(2.2%)나 햄스터(1.2%)에 비하여 압도적인 비율이다. 그러나 이는 미국에 비하면 아직 적은 숫자이다. 미국은 전체 가구의 67%인 8500만 가구가 반려동물을 기른다. 동물 별로 보면 개를 기르는 경우가 6,340만 가구, 고양이가 4,270만 가구, 물고기가 1,310만 가구, 새가 570만 가구에 이른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한 집에서 여러 동물을 키우는 경우가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반려동물 산업도 번창하고 있다. 반려동물에 관련된 산업의 매출이 2019년 기준 753억 달러로 2010년에 비하여 56% 성장하였다. 중국은 더 심하다. 반려동물 관련 산업의 매출액이 2010년 31억 달러에서 2018년 250억 달러로 무려 700%나 성장하였다. 현재 중국에는 5,100만 마리의 개와 4,100만 마리의 고양이가 반려동물로 인간과 더불어 살고 있다. 반려동물의 숫자도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는 고양이가 2억 마리 개가 1,700만 마리가 반려동물로 인간의 집에서 살고 있다.     



통계 숫자가 말해주듯이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구의 증가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반려동물이 단순한 인간의 유희 수단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동물윤리적인 차원의 동물 복지 촉진을 위한 법제도는 1987년 유럽 애완동물보호협약(European Convention for the Protection of Pet Animals)으로 마련되었다. 2020년 현재 유럽의 24개 국가가 이 협약에 서명하였다. 미국에서도 2000년부터 동물보호를 위한 법제도 마련을 지속해오고 있다.      


반려동물의 역사는 길다. 흔히 사람들은 사육이 더 긴 역사를 지닌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정착 생활을 하기 이전부터 인간은 동물을 사육하여 가축으로 활용하였다. 경작의 수단일 뿐 아니라 우유와 고기로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인 소는 기원전 8500년부터 사육해왔다. 거의 비슷한 시기부터 사육해온 돼지도 인류의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에 비해 닭은 비교적 늦은 기원전 2000년부터 사육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개는 14,000년 전부터 인간이 기르기 시작하였다. 일부 학자는 36,000년 전부터라는 주장도 하고 있다. 고양이는 비교적 늦은 기원전 7500년부터 기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현대적인 의미에서 동물을 반려의 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의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특히 개를 반려동물이자 사냥개로 기른 것이다. 그래서 당시에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은 일종의 사회의 특권층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19세기가 되자 경제적으로 윤택해진 신흥 중산층, 곧 부르주아 계급도 이러한 귀족들의 ‘취미’를 따라 하기 시작하였다. 반려동물의 확산을 목격한 자본가들은 새로운 사업을 개척하여 19세기 말에 이는 완전히 독립된 산업 분야로 정착하게 된다. 특히 동물 먹이 산업과 더불어 동물 병원도 붐을 이루게 된다. 당시 반려동물을 기를 수 있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풍요한 계층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엄청난 돈이 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의 품종을 보장하는 족보의 일종인 ‘혈통표’(pedigree)는 그 개를 소유한 귀족의 사회적 지위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중산층도 ‘귀족 개’를 소유하는 것으로 귀족들과의 교제(socializing)으 수단으로 삼을 정도였다.

     


오늘날 반려동물은 빅토리아 시대와는 다른 개념으로 보편화되었다. 그리고 지난 10년 전 세계적으로 그 숫자가 늘어난 것은 과거의 ‘귀족 따라 하기’와는 거리가 멀다. 반려동물을 기르면서 연대감을 강화하는 경험을 한다. 동물과의 직접적 연대감도 있지만 동물을 기르는 사람들과의 연대감도 강화된다. 그리고 ICT 시대에서 이 연대감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이루어진다. 그래서 Social Media 고양이나 개에 관한 기사가 오르면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온라인상의 연대감의 확산은 현실적 가족관계의 축소와 비례하여 강화된다. 현재 한국은 출산율이 OECD 국가 가운데 꼴찌이다. 이는 1980년 5위였던 것에 비하면 급격한 감소 현상이다. 그리고 1980년 한국 가구당 가구원수는 4.5명이었으나 2019년에는 2.4명으로 줄었다. 1970년의 5.2명에 비하면 50년 만에 절반 이하로 줄어든 것이다. 특히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1인 가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데 따른 결과이다.


1980년 한국의 1인 가구는 4.8%로 전체 가구 가운데 가장 작았다. 1990년에도 9%로 여전히 꼴찌였다. 그러나 2000년 15.5%, 2010년 23.9%로 늘더니 마침내 2019년 1인 가구는 30.2%를 차지하여 1위로 올라섰다. 1980년대 중반부터 2005년까지 표준으로 자리 잡은 부모와 2자녀 가정은 이제 2인 가구와 3인 가구에도 밀려 4위에 머물고 있다. 15년 만에 나타난 현상이다. 그리고 이 현상은 스마트폰의 출현과 정확히 맞물린다.

     


스마트폰은 과거의 휴대전화기와 모바일 인터넷 기기를 융합한 기계를 말한다. 흔히 2007년 Apple이 내놓은 I-Phone에서 스마트폰의 역사의 시작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기술적 바탕은 IBM, Hewlett-Packard, Nokia, NTT 등이 1990년대부터 마련해 왔다. 그러나 물리적 키보드를 없앤 I-Phone은 이후 모든 스마트폰의 form-factor로 자리 잡으며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사실 본격적인 터치스크린을 탑재한 스마트폰은 LG가 2006년 12월 출시한 LG Prada이다. 그러나 I-Phone에 밀리면서 빛을 더 이상 보지 못하였다. 이후 불과 10여 년 만에 스마트폰은 유아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미국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연령, 인종, 국가, 지역, 성별을 초월한 인류의 이른바 ‘최애품’이 되었다. 특히 한국은 2019년 기준 스마트폰 보급률이 95%에 이르러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미국의 81%, 일본의 66% 그리고 선진 25개국 평균 76%에 비해도 엄청난 수치이다.     

 

그리고 18세 이상의 성인 가운데 76%가 스마트폰으로 Social Media를 사용하여 이스라엘(77%)과 더불어 세계 최고를 차지하고 있다. 참고로 일본은 43%로 독일(44%)과 더불어 조사 대상 국가 가운데 꼴찌를 차지하였다. 그렇다고 이 나라들이 Social Media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들 국가는 스마트폰보다는 PC를 이용한 Social Media 접근을 더 선호하고 있는 것뿐이다. 왜 한국이 스마트폰 보급률과 활용률에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지에 대한 분석은 다각도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논점에서 벗어나는 것이니 추후에 다루기로 한다.     


다시 주제로 돌아가 보자. 반려동물과 스마트폰 시장이 한국에서 폭발적 성장을 구가하는 이유가 가정의 붕괴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매우 중요한 상관관계가 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농경사회였다. 그리고 농경문화에서 중요한 것이 가부장제도였다. 가부장제도는 대가족제도에 특화된 제도였다. 농사는 노동집약적 산업이라서 많은 구성원들의 유기적 협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에 가부장의 통솔력이 절대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2015년 기준으로 한국의 농업 인구는 25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5%에 불과하다. 1970년 1,400만 명에서 6분의 1로 줄어든 것이다. 더구나 이들 가운데 50% 가까이가 고령자이다. 한국은 더 이상 농경사회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가부장제도도 붕괴 과정에 있는 것이다. 가부장제도는 1970년 이전의 한국처럼 한 가정의 가구원이 최소한 6인 이상이 되었을 때 가능한 제도이니 말이다. 1-2인 가구가 60%를 넘는 한국 사회에서 가부장제도는 당연히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서 강화된 가부장제도는 합리적인 근대화를 거치면서 개인주의로 대체되지 못하고 일제 강점기와 군사독재 시기를 거치면서 한국 사회에서 독특한 형태로 지속되어 왔다. 그래서 현재 개인주의화된 사회에서 갈등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성차별과 맞물리면서 한국의 가부장제도는 이제 타파되어야 할 가장 커다란 사회악이 되고 있다.  

   

원래 가부장제도가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가부장의 도덕성과 책임이 담보되어야 했다. 곧 가정의 구성원들의 자발적 동의를 얻어내는 권위와 그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능력이 있어야 가부장다운 가부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농경사회에서는 가부장이 대부분 생계의 핵심인 농지를 소유하고 농사에 대한 지식이 갖추어져 있어서 이런 권위에 대한 자발적 동의가 가능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농지는 부동산 투자이 대상이 되지 않는 한 생계유지에 결정적 요인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농사에 대한 지식도 가부장이 아닌 전문가들이 더 깊고 넓게 보유하고 있다. 가부장은 더 이상 권위를 발휘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가부장이 전통적 권위를 내세운다면 그것은 더 이상 권위가 아니라 권위주의이고 이는 그 누구의 자발적 동의를 이끌어 내지 못한다.     

현대 선진 사회에서 이미 가부장제도를 극복한 개인주의가 정착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개인의 계몽도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은 제도적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개인주의(individualism)와 이기주의(egoism)는 엄밀히 구분되어야 한다. 이기주의는 농경사회의 대가족 안에서도 존속되어 왔던 것이다. 특히 가족 이기주의와 집단 이기주의는 농경문화에서 더 심하였다. 씨족 중심의 이기주의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학연, 지연, 혈연으로 여전히 굳건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집단주의 안에서 민주주의적 개인의 책임의식은 흐려진다. 그래서 범죄는 있으나 책임질 범인은 사라지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주의는 근세의 독재주의와 집단주의에 반발하여 나타난 사상으로 개인의 인격의 존엄과 자유 그리고 행복을 가장 높은 가치로 삼는 것이다. 특히 가부장제도 안에서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개인의 자유와 행복 나아가 그 인격의 존엄이 희생되는 역사적 질곡을 거쳐 나타난 것이 개인주의이다. 여기에는 근세의 실존주의와 자유주의가 중요한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이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자아실현 그리고 개인적 행복이 가장 중요한 가치이기에 한 사회 안에서 이를 방해하는 것은 모두 사회악으로 규정된다. 그래서 선진국의 헌법에서는 모두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최상의 가치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현대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개인주의적인 경제적 이익 추구를 극단에 이를 정도로 긍정하여 이기주의에 이르는 폐해를 낳게 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서양에서는 여전히 개인주의가 인간의 전체적 행복에 기본적 사상이라는 데에는 별 반론이 없다.     

그러나 고삐 풀린 개인주의는 반드시 이기주의로 변질되기 마련이니 이에 대한 적절한 조치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사회적인 법제도로 개인의 자유와 행복은 보장하되 그것이 타인의 자유와 행복의 침해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사회윤리는 바로 이러한 법제도의 정의로운 입법과 집행에 집중하고 있다.      



다시 원래 주제로 돌아가자. 한국의 가정에서 1-2인 가구가 대세가 되고 스마트폰이 최고의 Social Media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 이전 조선 말기에 극복되어야 했던 가부장제도가 1990년 초반 군사독재 정권 시대까지 제도적으로 이어져 온 모순적 역사 발전의 결과로 현재의 극적인 변화가 초래된 것이다. 한국 사회는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혁명적인 변화를 한꺼번에 맞이하였다. 한반도 역사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민주정부가 들어섰고, 가부장제도가 적어도 법적으로는 붕괴되었고, 집단 지성의 최고의 표현인 인터넷이 급격히 보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스마트폰이 본격적으로 확산되면서 개인주의가 걷잡을 수 없이 한국의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스마트폰과 개인주의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스마트폰은 Social Media에 접근하는 데에 가장 편리한 도구이다. 여기에서 잠깐 socal의 개념을 정의해 보자. 흔히 social하면 ‘사회적’으로 번역된다. 그래서 개인과 대립된 실체로 여기게 된다. 그러나 원래 social의 뜻은 ‘사교적인’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이다. 곧 social media는 ‘사회 매체’가 아니라 ‘사교 수단’ 곧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매체인 것이다. ‘society’는 라틴어 ‘societas’에서 왔다. 그리고 이는 친구 동료를 뜻하는 ‘socius’에서 온 명사이다. 그러나 일본이 근세에 서양의 society를 社會로 번역하면서 그 뜻이 오역되었다. 社會는 원래 중국말로 ‘제사(社)를 드리기 위한 모임(會)’이라는 뜻이다. 서양의 society와는 전혀 무관한 개념이다. 서양에서 사회는 처음부터 친구들, 곧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것이다. 그래서 친하지 않은 사람은 나의 사회 안에 존재할 수가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된다.      


개와 고양이 스마트폰은 개인의 사회성 증진과 자유 그리고 행복의 촉진을 위한 가장 최적화된 존재이자 수단이다. 그리고 이는 가부장제도의 척결의 최고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젊은이들만이 아니라 노인들도 반려동물과 스마트폰에 몰두하게 된 것이다. 특히 한국에서 말이다. 이에 반려동물과 스마트폰의 사회윤리적 의미에 대한 분석은 다음 장에서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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