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Francis Lee
Sep 15. 2024
19. 내 운명을 완전히 바꾼 둘째의 탄생
사람은 한 치 앞도 모르는 법이다.
까무룩 잠이 들었나 보다. 문득 눈을 떠보니 혜담 스님이 내 왼팔을 베고 내 왼쪽 젖꼭지를 물고 있는 채로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내 팔이 아프지 않도록 베개를 살짝 베고 있었다. 젖꼭지를 살살 빼고 나서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잘 생겼다. 짙은 눈썹과 쌍꺼풀이 선명하다. 코도 오뚝하다. 잎술은 도톰하고 단정하다. 몸도 적당히 근육이 붙어 아름다웠다. 그러고 보니 처음에 50대라고 생각했던 나이도 훨씬 어려 보였다. 이리 잘 생긴 남자가 왜 승려가 되었나? 그것도 업보인가? 정말로 전생에 내 아들이었다는 말인가? 태어나자마자 저승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지금이 몇 시지? 시계를 보니 저녁 9시가 다 되어 간다. 아이를 어린이집 맡긴 아이를 찾을 시간이 훨씬 넘었다. 남편도 집에 이미 돌아왔을 시간이다. 휴대전화기를 확인해 보니 남편에게 걸려 온 전화가 수십 번이었다. 늘 습관대로 전화 소리를 무음처리 했으니 들리리 만무한 일이었다. 그런데 전혀 마음이 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집으로는 가야 할 일이니 서둘러야 했다.
잠든 혜담 스님이 깨지 않게 왼팔을 가만히 빼고 옷을 챙겨 입고 나왔다. 사무실에는 여직원이 있었다. 그는 예의 300만 원을 요구했다. 이 늦은 시간까지 퇴근을 안 했다는 말인가?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서둘러야 했다. 재빠르게 계좌 이체를 하고 밖으로 나와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탔다.
집에 와 보니 남편이 아이를 안고 달래고 있었다. 그 아이의 칭얼대는 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아직 잠이 안 든 모양이다. 당연한 일 아닌가? 새벽 2시 이전에 잠든 적이 없는 아이다. 저녁잠이 많은 내게 그것은 지옥이었다. 뜻밖에 남편은 화나 있지 않았다.
“늦었네. 어디 다녀온 거야?”
“어.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서 좀 멀리 갔는데 차가 너무 막혀서...”
내가 생각해도 한심한 변명을 했다.
“밥은 먹은 거야?”
그러고 보니 점심과 저녁을 먹지 않았다. 먹보인 내가 그럴 수 있다니. 내가 생각해도 신기했다. 그런데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다.
“어... 친구를 만났는데 당연히 먹었지.”
“그러면 어서 씻어 피곤하겠다.”
남편다웠다. 나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마치 성인군자가 되기로 작정을 한 사람 같았다. 도대체 이 사람은 왜 이러는 것일까? 나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그토록 큰 것인가? 아니면 내 생각대로 나를 완전히 포기한 것인가? 무엇이든 간에 내가 제일 싫어하는 소란 떨기를 안 하는 것이 좋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아무 잘못이 없으니 말이다. 그저 내 ‘병’을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남편에게 ‘부끄러울 짓’을 한 것이 없지 않은가? 내가 건강해지면 남편도 좋은 일이다. 그러니 내가 무엇을 하든 ‘선’을 넘지 않으면 그만일 뿐이다.
그렇게 다시 일상이 이어졌다. 한 달쯤 지난 다음 혜담 스님의 말이 생각이 나서 임신 테스트기를 구매해서 체크를 해보았다. 물론 그동안 남편에게는 이에 관해 전혀 말을 하지 않았다. 소변에 테스트기를 담근 지 5분도 되지 않았는데 대조선과 거의 동시에 검사선의 선명한 붉은색이 보였다. 임신이다! 그런데 아이가 들어섰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히 생리가 며칠 안 남은 때라서 임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그러나 의심은 잠깐이고 마음에 잔잔한 감동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주 오랜만에 희망이라는 느낌이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14살 이후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한 감정이다. 물론 대학교 때 여러 남자들을 만나면서 즐거운 기분이 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 희망은 뭐라고 할까? 나의 지겨운 악몽과도 같은 과거와 결별할 때가 되었다는 일종의 직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남편에게는 언제 알리지? 남편도 매우 난감해할 것 같은데. 그러나 아이를 내 눈에는 지나치게 좋아하는 사람이니 부정적인 반응이 나올 리가 없다. 그날 남편이 퇴근하고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마주 앉은 남편에게 시나브로 말을 했다.
“여보 나 임신한 거 같아.”
그런데 남편의 반응이 전혀 뜻밖이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라니? 임신 테스트기로 두 번이나 해 보았어. 나도 처음에는 믿어지지가 않았어. 물론 테스트 결과가 다 맞는 거는 아니니 내일 산부인과에 가서 체크해 보려고.”
“여보. 임신일 리가 없어. 그동안 당신에게 말을 안 했지만 나는 정관수술을 했어. 당신이 아이를 증오하기에 만약을 대비해서 다시는 아이를 안 가지려고 말이야.”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렇다면 이 아이의 아빠는 누구란 말인가? 내 평생 ‘깊은 육체적 접촉’을 가진 남자는 남편밖에 없다. 혜담 스님과는 ‘관계’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여자의 직감으로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임신테스트기가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산부인과에 갈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언제나처럼 아이를 품에 꼭 안은 남편과 함께 산부인과를 갔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문자 그대로 만감이 교차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임신이 아닌가? 차례가 되어 간단히 의사와 대화를 나눈 다음 초음파 검사를 시작했다. 복부에 차가운 젤리가 묻는 느낌이 서늘했다. 의사가 초음파 기계를 내 배에 댄 지 1분이나 되었나? 의사가 단호하게 말을 한다.
“축하합니다. 임신입니다. 6주 되었습니다.”
순간 희망이 더욱 강하게 밀려왔다. 그런데 남편이 평소답지 않게 약간 들뜬 목소리로 질문을 한다.
“확실한가요?”
“네 확실합니다. 저기 검고 길쭉한 구멍 같은 것이 보이시지요? 그것이 아기집입니다. 거기에 자세히 보면 아주 작은 콩알 같은 것이 보이죠? 그것이 아기입니다. 착상이 아주 잘 되어 아기집 크기가 40mm 정도입니다. 6주가 된 것이 확실해요.”
의사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런데 남편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요.”
순간 의사가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오래전에 정관수술을 했거든요. 그런데도 임신이 되나요? 그것도 1년 넘게 금욕하다가 단 한번 관계를 가진 것인데요.”
“아...”
의사가 조금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마치 기적과 같은 일이지요. 제 환자 가운데 아주 가끔은 정관수술을 했고 나이가 40이 넘었는데도 임신이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경우가 아닐까요?”
의사는 마치 윤리 교사나 된 듯이 남편을 열심히 설득하고 있었다. 사실 남편 설득은 내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나는 설득할 뜻이 전혀 없었다. 임신한 내가 그 과정을 정확히 알고 있는데 무슨 부끄러움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남편을 설득하는 길은 아이를 낳고 친자검사를 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나는 자신이 있었다. 남편의 아이가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임신한 여자가 아이의 아빠를 가장 잘 아는 법이다. 그래서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당황해하는 남편을 끌고 진찰실을 나왔다.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남편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앞만 보고 운전하고 있었다. 그런 남편이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어차피 진실은 나중에 다 밝혀질 일 아닌가? 자신만만한 마음으로 그런 남편을 무시하기로 했다.
이후 남편은 나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답게 더 이상 아무것도 따지지 않았다. 삼십을 훌쩍 넘긴 나이에 아이를 낳는 것이 약간 두렵기는 했지만 둘째 아닌가? 이미 경험이 있었기에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산부인과의 이혜진 원장이 매우 믿음이 갔다. 자상하지는 않았지만 너무나 프로페셔널했다. 늘 마치 나를 VVIP 대하듯이 해주었다. 나는 그렇게 나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사람을 보면 무조건 의존하는 성향이 있다. 그래서 마음이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를 낳는 것이 자신 있었다. 이번에는 잘 낳고 잘 기를 것만 같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첫째는 그렇게 불편했는데 둘째는 나오기도 전에 이렇게 내 맘을 기쁘게 해 주다니. 이것도 운명이라는 말인가?
그렇게 산달이 찼다.
함박눈이 쏟아져 앞이 안 보일 정도였다. 남편이 조심스럽게 아주 천천히 차를 몰았다. 스노타이어를 장착했음에도 차가 자꾸 미끄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병원에 들어서자 이미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혜진 원장이 나를 반갑게 맞이하며 말했다.
“오늘은 현주님만 받을 거예요. 다른 환자의 예약은 모두 취소했어요.”
“네에? 아니 왜 그러셨어요? 제가 뭐라고.”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 마음이 뛸 듯이 기뻤다. 나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이 세상에 있다니. 그것도 의사가 나를 이리 대하다니. 정말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선생님. 이번에는 무통분만을 하고 싶어요. 첫째 때는 그냥 했다가 너무 아파서 고생을 정말 많이 했어요.”
“걱정 말아요. 다 준비가 되어 있으니. 그저 맘을 편히 가져요. 어서 산실로 갑시다. 아니 일단 침실로 가야겠네요. 왜 내가 이리 서두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
침실에서 2시간 정도 기다리니 산통이 느껴졌다. 이혜진 원장이 관찰하더니 말했다.
“양수가 터졌고 머리가 보일락 말락 하네요. 이제 산실로 갑시다.”
적당히 어두운 산실에 들어서니 아로마 향기가 났다. 은은한 클래식 음악도 흐른다. 조무사들이 나를 침대에 누이고는 배를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남편 분도 들어오세요.”
그 말을 고분고분 따르며 남편도 산실에 들어선다. 그러고는 캠코더로 녹화를 시작한다. 첫째 때와 똑같다. 남편은 그랬다. 결혼 전부터 보여준 모습에서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그것이 내게 안정감을 주었지만 한 구석으로 답답했다. 나의 모든 것을 받아주고 내게 온 정성을 기울였지만 때로는 그것이 나를 숨 막히게 했다. 나는 돌보아야 할 아기가 아니라 한 사람의 여자 아닌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진통이 강하게 시작되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머리가 완전히 보이네요. 마취를 시작합니다.”
무통분만을 위해 마취전문의가 들어와서 주사를 놓았다.
“배에 힘을 주세요. 하나, 둘, 셋. 자 쉬었다가 다시 하나, 둘, 셋...”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자 거의 다 나왔어요. 다시 한번 힘차게. 하나, 둘, 셋...”
정신이 아뜩해졌다. 앞이 캄캄해져서 아무것도 안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배가 쿨렁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힘찬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기 입 속의 이물질을 석션기로 빼내는 소리가 들렸다.
“축하합니다. 아들입니다.”
원장은 탯줄을 끊기 전에 아기를 내 가슴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내 아기야. 내 귀여운 아기야.”
아기에게 젖을 물렸다. 부풀 대로 부풀고 검게 변한 젖꼭지를 아기가 허겁지겁 물었다. 내 왼쪽 젖꼭지를 힘차게 빤다. 첫째인 딸과 힘이 다르다. 아 이것이 아들의 힘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아이의 머리를 꼭 끌어안았다. 몸은 완전히 기가 빠졌지만, 마음 저 깊은 곳으로부터 무한한 희망이 샘솟았다. 고개를 돌려 남편을 보니 어깨를 들먹이며 울고 있었다. 늘 느끼는 대로 참으로 우유부단한 남편이었다. 나는 강한 남자가 좋은데, 왜 내 남편은 저리도 유약할까?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다.
다시 루틴이 시작되었다. 탯줄을 끊고, 아이 목욕을 시키고, 발 도장을 찍고... 그 과정을 남편이 울면서도 열심히 카메라로 따라 찍고 있었다. 참 착한 남편이다. 그런데 착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내게는 강한 남자가 필요했다. 나를 완벽하게 보호해 주는 신과 같은 남자 말이다.
산실에서 회복실 침대로 옮겼다. 아이도 아기 방으로 갔다. 남편이 침대 옆에 앉아서 나를 촬영하고 있었다.
“여보 그만 찍어.”
“알았어”
카메라를 내려놓은 남편이 내 침대 이불을 정리한다. 방은 적당히 더웠다. 그러나 몸이 약간 으슬했다.
“조금 춥네.”
“그래? 기다려봐. 물주머니 가져올게.”
산부인과로 올 때 바리바리 물건을 챙긴 남편이었다. 독일제 보온 물주머니 두 개에 뜨거운 물을 담아 내 양 겨드랑이에 끼워주었다. 몸이 따스해진다. 고마운 남편...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자상하고 나를 마치 아빠처럼 돌보아 준 남자. 그렇다. 이 남자가 없었다면 내게 이미 무슨 일이 생겼을 것이다. 특히 첫째와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시댁과도 이미 갈라섰고. 그런데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아쉬움이 남는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간호사가 들어왔다.
“수유 시간입니다.”
침대를 세워 수유하기에 편한 자세로 앉았다. 수유 쿠션을 깔고 아기를 그 위에 누였다. 아기를 안고 젖꼭지를 꺼내니 눈도 안 뜬 채 허겁지겁 내 젖꼭지를 물고 힘차게 빨아댄다. 남편은 그런 모습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는다. 그러고 보니 남편은 하루 종일 식사를 안 했다.
“여보 당신도 뭐 좀 먹어야지.”
“알았어. 걱정 마. 나는 배가 안 고파.”
“아냐. 그래도 먹어야 해. 이건 명령이야. 어서 식당에 가서 먹어.”
밤 9시에 아이를 낳은 이후 남편은 꼬박 밤을 새운 터였다. 시간을 보니 아침 10시다.
“그래 알았어. 햄버거나 먹으러 갈게. 당신도 먹을래?”
“그래 내가 좋아하는 거 사와.”
그렇게 남편을 내보내고 아기와 둘만 방안에 남았다.
“내 아기야. 내 귀여운 아기야.”
그렇게 말하면서 머리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새 인생이 시작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회복실 옆으로 난 아이보리색 프레임의 창문 밖에는 여전히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온 세상이 설국이 된 느낌이었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지 눈송이가 정신 없이 춤을 추고 있었다. 아늑한 방 안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니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샘솟았다. 그래 나는 이제 새 출발 하는 거야! 그러나 그 운명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그때까지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