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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Sep 14. 2024

18. 어두웠던 나의 '과거'

전생의 인연은 무서웠다.

남편은 놀라지 않았다. 거의 2년 만에 잠자리를 같이 하자는 데도 어색한 구석이 조금도 없다. 그래서 내가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남편은 이미 나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작정을 한 상태였다. 다른 말로 하자면 나를 포기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하자는 대로 모든 것을 해 왔고 잠자리도 그 연장 선상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우리가 연애 시절부터 하던 대로 남편은 나의 오른쪽 젖꼭지를 혀로 애무하며 빨기 시작했다. 아주 부드럽게 천천히 시작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나의 왼쪽 젖꼭지를 애무했다. 그러다가 다시 발기된 성기를 내 몸 깊은 곳으로 넣었다.      


“아...”     


순간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남편과 정말 오랜만에 몸을 섞는데도 마치 어제 하고 또 하는 기분이 들었다. 남편이 천천히 리듬에 맞추어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늘 그랬다. 남편은 나를 보물 다루듯이 조심조심 관계를 가졌다. 그러면서 속삭였다.     


“당신은 참 아름다워.”     


나도 모르게 나도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남편이 말했다.    

 

“그런데 얼굴은 귀부인인데 섹스할 때는 아주 노련한 창녀 같아.”     


늘 그가 하던 말이었다. 몸이 달아올랐다. 그래서 남편을 더욱 조였다. 그러자 남편도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정말 오랜만에 우리가 한 몸이 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연애 시절 우리는 정말 한 몸이었다. 유약해 보이기 그지없는 남편은 나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내가 사달라는 것, 먹고 싶다는 것을 모두 가져다 바치곤 했다. 아이가 없던 그 시절은 정말 행복했다. 그러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는 그 천국과 같은 시절은 꿈처럼 사라져 버렸다. 나는 그런 변화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하거나 위로해주지 않은 채 시간이 흐르고 변화를 주체할 수 없는 나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몸을 떤다. 사정이 다가왔다는 신호다. 나는 남편의 몸을 더욱 조이고 나의 느낌에 최대한 몰입했다. 남편은 사정을 하고 나서도 늘 그렇듯이 한동안 내 몸 위에 머물렀다. 그러고 나서는 천천히 내 몸을 벗어나 뒤에서 나를 껴안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아이가 잠에서 깨어나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남편이 서둘러 일어나 속옷을 챙겨 입고 아이 방으로 달려간다.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우리 부부 관계를 망치는 존재가 아닌가? 나의 세상이 달라지지 않았다. 나를 괴롭히는 현실이 다시 다가왔다.


남편의 존재 의미는 무엇일까? 매우 헌신적이고 나의 모든 것을 받아주고 증오스러운 아이와 나 사이에 서서 하나의 든든한 방어벽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늘 무엇인지 부족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무엇인가가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근원을 알 수 없는 답답함이 늘 남편과 나 사이에 존재했다. 한 마디로 그는 나의 깊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이 무엇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다정하고 나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남편이지만 늘 거리감이 있었다.    

 

일주일 후 해운 선원의 여직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2차 치료받으러 오셔야 합니다.”     


매우 건조한 사무적인 말투였다.     


사실 그로테스크하고 미심쩍은 ‘치료’를 받은 이후 다시는 혜담 스님을 보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한 차였다. 그런데 나는 이미 해운 선원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지난번과 똑같은 절차대로 나는 다시 혜담 스님과 둘만 있는 방에 있었다.     


“보살님, 몸은 어떠신가요?”     


사실 그 ‘치료’ 이후 나의 몸과 마음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스님.”     


“오늘은 보살님의 전생에 대해 말씀드리고 나서 치료를 시작하겠습니다.”   

  

전생? 사실 나는 전생 같은 것은 별로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저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 아닌가? 아무런 증거도 없이 만들어 낸 허구에 불과한 소설일 뿐이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보살님과 저는 깊은 인연을 맺은 사이입니다.”    

 

어떤 인연인데 이 생에서 이런 관계로 만난다는 말인가?     


“보살님 할머니 이야기를 아시나요?”     


할머니? 엄마가 얼추 전해 준 것이 전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살밖에 안 된 어린 나의 아빠를 버리고 집을 나가 이 남자 저 남자를 전전하며 살다가 돌아 가셨다는 말만 들었다.    

 

“할머니께서 남편이 죽고 나서 집을 나갔지요? 외아들인 보살님의 아버님을 버리고.”  

   

그 사실을 어찌 안 다는 말인가? 내 뒷조사라도 했나? 설사 했다고 해도 가족의 아주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어찌 안다는 말인가?     


“그런데 그 할머니는 세 번째 남자의 아이를 낳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뭐라고? 처음 듣는 소리다. 아 아니다. 기억해 보니 엄마가 말해 준 것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여러 남자를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되풀이하다가 어느 유부남과 동거하며 아이를 낳았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다.     


“그런데 그때 그 아이도 같이 죽었습니다.”     


어디까지 믿어야 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서서히 커지는 나의 호기심을 막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그 남자는 할머니와 사산된 아이의 장례를 잘 치러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는 보살님 할머니를 전정으로 사랑해서 이혼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보살님 할머니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돌아가시자 어쩔 수 없이 다시 자기 원 가정으로 돌아갔지요. 그렇게 보살님 할머니와 아이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습니다. 보살님의 친척들도 부끄러운 일이라 쉬쉬하면서 알려고 하지 않았고요. 그런데 그 할머니가 보살님으로 환생하고 그 죽은 아이가 바로 저로 태어난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만나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는 말인가요? 우리가 모자 관계였다면 왜 이런 식으로 만나는 것이지요? 그리고 지난번에 저의 몸을 더듬고 심지어 몸을 섞은 이유는 무엇이지요?”    

 

혜담은 대답 대신 한참 동안 나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보살님. 아니 어머님. 저는 전생에 당신의 죽은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이 엄마의 몸을 만지는 것이 이상한 일인가요? 그리고 저는 그 당시 제가 희생 제물이 되어 보살님의 원죄를 대신 거두어 갈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살님이 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제가 죽자 따라 죽은 것이었습니다. 보살님의 지극한 사랑이 운명을 거부한 것이지요. 그때 저만 죽었다면 보살님을 14살부터 따라다니고 있는 그 원귀도 물러났을 것입니다.”    

 

더욱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만 듣게 되니 마음이 더욱 답답해졌다. 이 방에 단 둘이 앉아 있는 두 남녀가 엄마와 아들의 관계였다니. 그것도 전생에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은 아이가 환생한 승려와 남편을 일찍 잃고 첫 아이를 버리고 이 남자 저 남자를 전전하다가 허망한 죽음을 맞이한 내 할머니가 환생한 내가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남편은 무엇이지요? 그리고 제 아이. 저를 그토록 괴롭히는 제 아이는 누구이고요?”   

  

“지금 남편 분은 할머니의 죽은 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보살님이 낳은 아이는 그 원 가족의 자녀였고요. 할머니는 그 유부남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아이를 낳을 결심을 했습니다. 그 아이가 바로 소승이고요. 보살님의 할머니는 도화살이 넘치는 분이었기에 남자 없이는 살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남에게 의지하려는 성격이 매우 강했지요. 보살님과 마찬가지로 을목 일주였기에 갑목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지금 남편분의 일주도 갑목인 것이 맞지요?”     


내 뒷조사를 얼마나 했다는 말인가? 남편의 일간이 갑목인 것이 맞다. 그리고 내 사주에서 관성과 합이 되기에 나는 남편과 떨어질 수 없는 속정을 느끼며 살아왔다고 생각한 차였다. 뭔가 남편과 알 수 없는 거리감이 있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나는 전생에 유부남과 통정한 나의 할머니였다는 말인가? 그러고 보니 대학교 시절 엄마와 같이 점집에 간 생각이 난다. 내 사주를 본 술사가 한 마디 했다.     


“남자를 엄청 밝히네. 어머니가 간수를 잘하셔야겠어요.”     


그러나 내 양심을 걸고 나는 이 남자 저 남자를 전전해 본 적이 없다. 본능적으로 결혼할 남자 아니면 몸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고 살아왔고, 지금의 남편에게 나의 몸을 처음 열어주었다. 신혼 날 침대 시트를 선홍빛으로 적신 피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나는 그 술사의 말을 듣고 매우 기분이 나빠 굳게 결심하고 살아온 터이다.     


“저는 정조 관념이 강하고 윤리·도덕적인 면에서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런 저를 아무 남자나 만나고 결국 부끄러운 죽음을 맞이한 할머니와 비유하는 것이 기분 나쁩니다.”     


혜담 스님이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날 바라보면서 조용히 웃는다.     


“훌륭하십니다. 보살님. 그런 마음이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해원을 하고 업보를 끊어낼 수 있는 것이니까요.”     


해원... 업보...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들이다. 사실 나도 14살부터 지속된 지긋지긋한 고통을 겪으면서 전생의 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게는 죄가 없었다. 학교 때나 직장에서나 그리고 결혼 후에나 나는 고통을 당한 사람이지 누구에게도 고통을 준 적이 없었다. 나 같이 연약하고 심약한 사람이, 그리고 극히 내성적인 사람이 누구를 괴롭힐 수 있다는 말인가?     


“남편 분과 오랜만에 정을 나누신 기분이 어떤가요?”     


도대체 혜담 스님은 나의 어디까지 알고 있다는 말인가?      


“이제 둘째가 생길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가 생기면 보살님의 인생이 크게 바뀔 것입니다.”     


둘째? 말도 안 된다. 가임기가 아닌데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오늘도 치유를 시작하겠습니다. 옷을 벗으시지요.”     


도대체 무슨 치유를 을 벗고, 그것도 이 내밀한 방에서 남녀가 몸을 마주하면서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나는 마치 주술에 걸린 것처럼 이미 옷을 벗고 있었다. 혜담 스님은 지난번처럼 내 몸을 정성껏 쓰다듬고 나서 자기도 옷을 벗고 내 몸 위로 올라왔다. 그러고 나서 이번에는 내 옆으로 누워서  내 왼쪽 젖꼭지를 물고 부드럽게 빨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분이 이상했다. 남편이 애무하는 것과 다른 느낌이었다. 정말로 아기가 빠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눈을 뜨고 혜담 스님을 바라보니 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 혜담 스님을 쳐다보면서 나도 모르고 그의 머리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면서 내 입에서 저절로 말이 나왔다.     


“내 아가야. 내 귀여운 아가야.”     


그러자 혜운 스님은 흐느끼며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나는 조용히 도닥거렸다.     


그 자세로 우리는 오랫동안 가만히 있었다. 향의 연기와 아로마 오일 향기가 방안에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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