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토요일이었다. 여느 날처럼 아침 8시에 일어나 머리를 감고 모닝커피와 티라미수 케이크 한 조각으로 아침을 대신했다. 아기는 잠들어 있었고 남편은 서재에서 글을 쓰고 있었다. 워낙 잠이 없는 사람이었다. 새벽 2시까지 칭얼대는 아기에게 ‘아빠 맘마’를 먹이는 소리를 잠결에 들었는데 어느새 일어나서 서재에 가 있다. 커피잔과 접시를 개수대에 놓고는 드레스룸으로 가서 옷을 챙겨 입었다. 아기 침대에 누운 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도대체 저 아이의 어느 면이 나를 이토록 힘들게 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하필이면 나같이 약한 사람에게 저토록 힘든 아이가 왔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전생 인연법으로 이런 사달이 벌어진 것이겠지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남편에게 말도 안 하고 집을 나섰다. 아이를 낳은 지 1년 반 만에 처음으로 외출했다. 그것도 처음으로 혼자 했다. 연애 시절부터 남편은 늘 마부 구실을 했다. 가까이 있는 이마트에 장 보러 갈 때도 남편과 함께 차로 이동했다. 부산이나 남해로 놀러 갈 때도 남편이 6시간 동안 운전했다. 나는 운전이 싫었다. 무섭기도 했지만, 운전을 배우는 것 자체가 귀찮았다. 직장에 다닐 때도 늘 버스를 이용했었기에 차를 직접 운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막상 혼자 집을 나서니 버스 노선이나 지하철 노선에 대한 감각이 무뎌진 나를 발견할 수밖에 없었다. 집 앞 버스 정류장에 서서 어디로 갈지 잠깐 고민하였다. 일단 엄마가 세상에 살아계실 때 함께 살던 도곡동 집에 가보고 싶었다. 물론 그 집은 재개발이 되어 사라졌지만, 그 동네만이라도 보고 싶었다. 1151번 버스를 타고 강남역 근처에서 내려 420번 마을버스를 탔다. 그리고 한티역에서 내렸다.
내가 살던 곳에는 래미안도곡카운티아파트라는 길고 낯선 높은 건물이 서 있었다. 엄마와 함께 살면서 직장으로 출근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때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행히 길 건너에 엄마와 함께 장을 보러 가던 농협 하나로 마트는 그대로 있었다. 그 뒷골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강남은 늘 그랬다. 대로변은 자주 변하고 더 화려해졌지만, 한 블록만 뒤로 들어가면 오랜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곤 하였다. 남편과 결혼하기 전 연애 시절, 이 동네 골목을 함께 돌아다녔다. 내가 먹고 싶은 음식점을 순례하면서 말이다. 낯을 몹시 가리는 나는 결코 식당에서 먹지 않고 꼭 남편의 차 안에 먹었다. 둘만 있는 장소에서 먹어야 맘이 놓였기 때문이다. 다시 강남 세브란스 병원 쪽으로 걸어 나왔다. 그 건너편에 골목으로 가보니 남편과 연애 시절에 즐겨 가던 칼국수 집이 여전히 있었다. 소박한 맛을 주던 음식이었다. 그 뒤쪽에 있는 도곡 공원을 향했다. 이곳에 있는 공원에서 엄마와 배드민턴을 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나 엄마와 함께하던 장면이 지나가고 다시 남편과 함께 걷던 길이 보인다. 그렇게 연애 시절에 남편과 이 동네를 밤늦게 돌아다니곤 했다. 그러다가 12시가 되면 남편을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 시절이 아주 먼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갑자기 남편과 함께 가던 봉은사가 떠올랐다. 내가 믿던 신앙마을에서는 불교를 악마의 종교라고 했다. 그래서 절에 가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남편을 만나고 절에 처음 가보고 나서 내 생각은 전혀 달라졌다. 남편은 종교가 가톨릭이었음에도 모든 종교에 열려 있었다. 특별한 종교를 비난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남편을 따라 봉은사에 가본 것이다. 어느 날은 전에 살던 도곡동 집에서 봉은사까지 둘이 손을 잡고 걸어간 적도 있었다. 그 길을 혼자 가보기로 했다.
도곡로를 따라가다가 은마아파트 입구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돌아 삼성로를 따라 계속 걷다 보면 삼성중앙역이 나온다. 거기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꺾어 조금만 더 가면 봉은사 입구가 나온다. 혼자 걷지만, 이상하게 남편이 함께 있는 것만 같다.
봉은사 입구인 진여문에서 직선거리로 가장 멀리 떨어진 북극보전까지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남편이 말해준 것이 있다. 이 북극보전에는 칠성도가 있다. 불교에서는 치성광여래로 불리는 북극성과 북두칠성을 의인화한 그림이다. 이 작은 법당에서 소원을 빌면 무엇이든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퍼졌다는 말도 남편이 해주었다. 그래서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 이 법당 안에서 소원을 빌곤 했다. 어차피 신앙마을의 살아 있는 하나님이 더 이상 힘을 못 쓰게 된 현실에서 무엇이든 내 소원을 들어줄 절대자가 간절히 필요했다. 북극보전에 들어가 절을 하고 기도를 시작했다. 그러나 맘은 더욱 어지러워질 뿐이었다. 역시 내게는 기도가 아니라 결단이 필요했다.
봉은사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전에 엄마와 살던 집을 지나 양재천 공원 근처에서 내렸다. 내가 어릴 때 즐겨 걷던 곳인 양재천변을 향했다. 그런데 그곳에도 남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와 처음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퇴근 후에 거의 습관적으로 가던 곳이다. 그곳에서 만난 우리는 양재천변을 산책하곤 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나는 늘 남편에 붙어살았다. 그의 껌딱지가 되어 지내온 삶뿐이었다. 내가 진정한 의미의 출가를 하려면 나는 남편과 이어진 이 질긴 붉은 실을 끊어내야 했다. 그러나 그 실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 아이가 태어났기에 부부만 살 때보다 더욱 힘든 상황이 되어버렸다. 서울만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간 강원도와 부산의 모든 거리에도 남편의 흔적이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지워야만 나는 진정한 자유인이 될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지울 수 있다는 말인가?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날이 어두워졌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결국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돌아와 보니 난리가 났다. 남편은 경찰에 내 실종 신고를 하고 10분이 멀다 하고 계속 내게 전화를 했었다. 휴대전화를 켜보니 부재중 통화가 수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 번호는 모조리 남편의 것뿐이었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고 주방으로 가서 먹을 것을 찾았다. 내가 샤워하는 사이에 남편은 경찰에 전화한 모양이다. 경찰에서 내게 전화가 왔다. ‘무사 귀환’을 알리고 끊었다. 식탁을 보니 내가 좋아하는 따끈한 찌개와 밥이 소박하게 놓여 있었다. 어제 내가 끓여 놓은 것이다. 반찬으로 달걀부침, 전라도식 김치, 돌김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하루 종일 거의 안 먹은 속이 뒤집히는 소리가 들렸다. 말없이 수저를 들고 밥을 먹기 시작하는데 아이가 엄마를 빤히 쳐다본다. 그러더니 아빠 품에 얼굴을 푹 파묻는다. 남편이 밥 먹는 나를 두고 아이를 안고 안방으로 들어간다. 그러든 말든 그냥 두고 계속 밥을 먹었다. 나는 결국 집에 돌와와도 혼자일 뿐이었다. 이 고독을 달래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없었다. 남편도 아이도 결국 남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자유가 더욱 필요했다. 그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완전한 자유인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나의 첫 가출은 실패로 돌아갔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완전한 자유를 찾는 방법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남은 남편의 흔적을 지워야 했다. 그리고 이 답답한 현실에서 도망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길을 갈 결심은 이미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