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계나 법조계에는 서울대 법대 출신의 수재들이 잔뜩 모여 있다. 그런데 국민대에서 허술하기 짝이 없는 관상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김건희를 아무도 이기지 못하는 기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이제는 마치 김건희가 난공불락의 성, 최고 지존의 존엄을 지닌 여신의 경지에 있는 모양새까지 연출되고 있다. 세간에서 무슨 말을 하든 김건희는 오늘도 내 인생 내 맘대로 살겠다는 정신으로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런 김건희에 대해 뭐라 한 마디라도 하면 남편인 윤석열은 분기탱천하여 진노를 연발한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는 없는 것 같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제 이 나라는 by the 김건희, of the 김건희, for the 김건희의 세상이 되었다. 좌우 진영을 떠나서 모든 언론 매체는 김건희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하기 바쁘다. 김건희를 증오하는 매체조차 그의 손과 얼굴은 물론 시선 처리까지 기삿거리로 삼는다. 저잣거리의 필부필부도 김건희를 안줏감으로 놓고 술잔을 기울이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다. 정치계와 거리가 먼, 생계를 이어가기 급급한 이들도 툭하면 김건희를 들먹이기 일쑤인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윤석열 정권이 들어선 이후 ‘김건희 리스크’로 나라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마치 당장 어떤 결말이 날 것처럼 야권에서 으르렁댔지만, 거대 야당의 구도가 세우진 이후에도 지금까지 그 어떤 정치인도 김건희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절대 지존의 권력을 휘두르는 김건희를 견제할 장치가 이 나라에는 전혀 없어 보인다.
물론 이런 상황이 전개된 데에는 윤석열의 책임이 가장 크다. 아내인 김건희의 ‘김’ 자만 나와도 분기탱천하는 그를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자들이 쪼그라들어 버렸으니, 변방에 있는 이들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일 아닌가? 대선 시기에 자기 아내에 관한 모든 추문을 부인하였지만 결국 김건희 자신이 공개적으로 자신의 여러 ‘부족함’을 고백하고 조용히 살겠다고 약속한 것도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김건희가 이리 방자하게 나서서 이리저리 휘젓고 다닐 수 있는 이유는 누구나 다 알지 않는가? 한국 정치 서열의 정점에 있는 윤석열을 남편으로 둔 덕분이다. 윤석열이 후보 시절에 김건희가 한 기자와 나눈 대화가 기억에 새롭다. “내가 권력을 잡으면...” 김건희가 자기 입으로 분명히 말했다. 남편인 윤석열이 아니라 아내인김건희‘내가’ 권력을 잡으면 다들 알아서 길 것이라고 한 그의 예언이 이토록 적확하게 들어맞을 줄은 정말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물론 윤석열은 자신의 입으로 말한 대로 겨우 5년짜리 권력을 잡았을 뿐이다. 세간에 흉흉한 소문대로 친위 쿠데타나 다름없는 계엄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이제 그의 권력은 3년도 안 남았다. 비록 나라가 이미 2년여 만에 초토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면 또 2년 안에 환골탈태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용산’은 사라지고 청와대가 재건될 것이다. 그리고 무기력하고 부도덕하기 짝이 없는 국민의힘은 야당으로 전락할 것이다. 물론 수구 세력은 이재명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고 그들의 기획이 성공을 거둘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 그래도 차기 정권은 민주당 진영으로 넘어갈 것이 거의 분명해졌다. 이재명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와도 국민의힘의 한동훈 정도는 가볍게 이길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아직 3년 가까운 시간이 남았다. 그동안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by the 김건희, of the 김건희, for the 김건희의 나라로 남을 것이다. 김건희가 정말로 흑마술이라도 부리는 탓인가? 아무리 남편이 대통령이라고 해도 이 정도로 설치는 ‘영부인’은 한국 역사에 단 한 번도 없었다. 추석 인사 사진을 ‘개 판’으로 만들어 놓고 자랑스럽게 미소 짓는 김건희를 보면서 실소를 금하지 않을 국민이 과연 몇이나 될까? 장애인 시설을 방문하여 변함없이 화보 찍기에 여념이 없는 김건희를 보고 한숨을 쉬지 않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나라 전체가 오로지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는 모습이 김건희의 사진에 적나라하게 보인다. 그래도 그의 측근 가운데 아무도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 모양이다. 아니면 그런 사실을 김건희가 이미 잘 알고 있음에도 그냥 무시하고 내 꼴리는 대로 살겠다고 작정한 모양인가?
과거 문재인 정부 시절 조은산이라는 자가 나서서 뜬금없이 시무 7조를 날려 이름을 날린 적이 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보수 진영에서 난리가 났다. 조중동은 신나게 그 내용을 퍼 나르면 확대 재생산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현재 윤석열 정권이 싸 놓은 X이 그때보다 더 역한 냄새를 피우는 데도 그 잘난 조은산은 꿀 먹은 벙이리가 되어 있다. 그도 결국 이 나라가 by the 김건희, of the 김건희, for the 김건희의 나라라는 사실을 정확히 인정하고 쪼그라들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뭐 이런 상황에서 목숨을 내놓고 나라를 구한다고 해서 조중동이 눈하나 깜짝 안 할 것을 잘 알고 있겠다 싶다.
그래서 문득 나라도 나서서 시무 10조를 올려볼 생각조차 든다. 그러나 최치원의 시무 10조나 조은산의 짝퉁 시무 7조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저 진영 논리와 개인적 이익 다툼에 함몰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윤석열이 침이 마르게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를 구현한 미국의 링컨이 한 연설을 상기해 보고자 한다. 그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문이다.
Four score and seven years ago our fathers brought forth on this continent, a new nation, conceived in Liberty, and dedicated to the proposition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Now we are engaged in a great civil war, testing whether that nation, or any nation so conceived and so dedicated, can long endure. We are met on a great battle-field of that war. We have come to dedicate a portion of that field, as a final resting place for those who here gave their lives that that nation might live. It is altogether fitting and proper that we should do this.
But, in a larger sense, we can not dedicate—we can not consecrate—we can not hallow—this ground. The brave men, living and dead, who struggled here, have consecrated it, far above our poor power to add or detract. The world will little note, nor long remember what we say here, but it can never forget what they did here. It is for us the living, rather, to be dedicated here to the unfinished work which they who fought here have thus far so nobly advanced. It is rather for us to be here dedicated to the great task remaining before us—that from these honored dead we take increased devotion to that cause for which they gave the last full measure of devotion—that we here highly resolve that these dead shall not have died in vain—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위 글의 속 뜻을 살려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87년 전, 우리 선조는 이 대륙에 자유 안에서 잉태된 새 나라를 세워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신념에 봉헌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 나라가, 또한 그러한 신념과 헌신으로 세워진 그 어떤 나라든 오래 존속할 수 있을지 시험하는 중대한 내전을 치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전쟁의 위대한 싸움터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그 싸움터의 일부분을 이 나라의 존속을 위하여 이곳에서 목숨을 바친 이들을 위한 마지막 안식처로 바치기 위해 이곳에 모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일을 기꺼이 수행하는 것이 매우 마땅하고 올바른 일입니다.
그러나 더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우리가 이 땅을 봉헌할 수도, 축성할 수도, 거룩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싸운 용감한 남성들, 그들 가운데 산 이와 죽은 이가 이미 이 자리를 축성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미약한 힘으로는 그것에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습니다. 세계는 우리가 여기서 하는 말을 거의 주목하지도, 오래 기억하지도 못할 것이지만, 그분들이 이곳에서 한 일은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우리는 이곳에서 싸운 분들이 추진한 미완의 과업에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그분들이 최선을 다해 헌신한 대의를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돌아가신 분들이 헛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음을 굳게 믿고, 이 나라가 신의 가호로 새로운 자유의 탄생을 맞이하고, 국민이 만들고 국민이 운영하고 국민을 위하는 정부가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
government of the people은 정부라는 것이 일반 시민들로 구성되어 바로 그 시민을 대표해야 한다는 말이다. government by the people은 정부가 민주적 절차를 통해 시민이 선택하고 운영한다는 말이다. government for the people은 정부가 시민의 권리와 복지를 보장하고 시민을 위해 봉사하고 시민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작금의 대한민국의 상황은 어떤가? 대통령이라는 자가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민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by the 김건희, of the 김건희, for the 김건희의 나라를 만드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대한민국을 이 지경으로 만든 정부는 더 이상 링컨이 말한 그 ‘정부’라고 할 수 없다. 여러 지저분한 소문이 자자한 사인 김건희의 남편으로 머물고 싶은 자가 자유민주주의 국가 政府의 수장이 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여기에서 굳이 공자의 正名論과 맹자의 易姓革命論까지 들먹일 필요조차 없어 보이지만 사족을 더할 수밖에 없다.
<맹자> 양혜왕 하편에 나오는 말이다.
“제나라의 선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과인이 듣기로는, "제후였던 탕은 주군 걸을 몰아내고 천자가 되었고, 역시 제후였던 무왕은 주군 주를 쳐내고 천자가 되었다" 하던데, 이것이 사실입니까?"
맹자가 답했다.
"전해오는 기록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왕이 말했다.
"그들, 걸주가 폭군이었다고는 하지만, 신하 된 자로서 제 임금을 시해한 것이 도리에 맞는 일이겠습니까?"
그렇다. 왕이 왕 답지 못해 나라의 질서와 화합을, 더 나아가 백성의 안위를 손상시킨다면 그는 더 이상 왕이 아니다. 아무리 손바닥에 ‘王’ 자를 100개씩 쓴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를 끌어내리는 것은 반국가세력의 음모가 아니라 역성혁명, 곧 성씨를 갈아치워 하늘의 명을 새롭게 하는 의로운 일일 뿐이다. 한 여자가 나라를 이렇게 뒤흔들고 있는데, 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르고 한반도 주변의 정세는 최고의 위기 상황에 있는데도 나라의 지도자가 이토록 무기력하게 자기 임무를 소홀히 하고 그 주변의 간신배들은 사익을 채우기에 여념이 없는 꼴을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는 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