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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예수는 어떻게 신의 외아들이 되었나?

교회의 권위주의의 산물이다.

by Francis Lee

기독교 교리에서 예수를 호칭할 때 흔히 '독생자', '외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그리스어 μονογενες를 번역한 것이다. 다시 μονογενες 는 하나라는 뜻의 μονος와 종류라는 뜻의 γενες'의 합성어다. 그러나 이 또한 요한복음과 히브리서 외에는 공관복음을 비롯한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표현으로 나중에 신경을 만들면서 교리로 확립한 것일 뿐이다. 잘 알려진 대로 요한복음은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라고 보다는 이미 성립된 기독교의 신앙을 표현한 문서다. 그래서 그 내용은 역사라기보다는 신학적 주장에 가까운 내용으로 가득하다. 사실 예수는 자신이 신의 외아들이라고 주장하기보다는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자가 모두 신을 아빠로 부를 자격이 있는 자신의 형제자매라고 주장하였다. 관련 성경 구절을 보자.


예수님께서 아직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6~50)

그런데 왜 기독교 교회는 예수를 굳이 신의 유일한 아들, 외아들로 만들어야 했나? 그것은 당연히 예수의 가르침을 실행하기보다는 그를 신격화하여 숭배하는 종교 제도를 만드는 데 더 공을 들였기 때문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실천하기 어렵다. 그래서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예수 정도의 존재. 곧 신의 외아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니 인간은 그런 존재를 숭배하면 그만인 것으로 종교 제도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신의 아들을 대리하여 제사를 지내고 신자들을 통제하는 사제로 신부나 목사라는 계급을 만들어 버렸다. 예수는 신부나 목사를 임명한 적이 없는데도 자기들 마음대로 계급제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


물론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를 신의 외아들로 명시하고 있다. 관련 구절을 보자.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그런데 이 말씀의 지위는 신과 마찬가지로 창조주다. 관련 구절을 보자.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1~3)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에 나오지 않는 독자적인 신학이 전개되어 있다. 최소한 기원 후 100년 전후에 쓰인 것으로 예루살렘 공동체, 곧 초기 기독교 교회가 파괴된 이후에 소아시아에 수립된 교회, 곧 바울이 세운 교회에서 작성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무렵 신생 종교인 기독교는 주로 디아스포라 생활을 하는 유대교와 대립하면서 신자 빼앗기 쟁탈전을 벌이고 있던 터라 유대교에 대한 증오가 가득한 내용이 담겨 있다. 심지어 유대인을 예수를 죽인 죄인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이 죽인 예수를 신으로 격상시켜 유대교와의 차별을 보이려고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기독교가 점차 세력을 확장하면서 기독교 내부에서도 예수의 신성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영지주의에서는 예수의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그의 인성을 완전히 무시했다. 이에 맞선 양태론자들은 신이 때로는 예수로 그리고 어떤 때는 성령으로 다른 양태로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4세기 대표적인 교부인 아리우스(256~336)는 예수는 신이 창조한 피조물에 불과하며 신과 동등한 지위를 지닐 수 없는 존재라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바로 이 아리우스와 논쟁을 버린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나 아타나시우스, 그리거 바실리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와 같은 교부들은 삼위일체론의 체계를 확립하면서 아리우스 파를 이단으로 몰고 가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결국 삼위일체론을 주장한 이들은 니케아 공의회에서 니케아 신경을 수립하여 예수가 신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존재라는 교리를 확립한다. 이른바 호모우시우스(homoousius)의 개념을 정립한 것이다. 호모우시우스는 그리스어 ὁμο 와 οὐσία를 결합한 단어로 동일한 본질을 의미한다. 니케아 신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καὶ εἰς ἕνα Κύριον Ἰησοῦν Χριστὸν τὸν Υἱὸν τοῦ Θεοῦ, γεννηθέντα ἐκ τοῦ Πατρὸς μονογενῆ τουτέστιν ἐκ τες οὐσίας τοῦ Πατρος Θεὸν ἐκ Θεοῦ, Φῶς ἐκ Φωτός, Θεὸν ἀληθινὸν ἐκ Θεοῦ ἀληθινοῦ,


한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우리는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분은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아버지에게서 나셨으며, 곧 아버지의 본질에서 나셨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이시며, 아버지와 본질에서 같으시다.


이로써 예수의 지위에 대한 논쟁을 종결되고 이후 예수는 신이 되었고 인간을 멸망에서 구하는 구세주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 기독교 교회가 보여준 모습에서 예수가 인류를 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인류의 갈등과 분열의 단초가 된 사실이다. 기독교 내부의 다툼으로 이단 논쟁은 끊임없이 일어났고 같은 신을 믿는 이슬람교와 이른바 '성전'을 벌였고, 그것도 모자라 마침내 종교개혁을 자초하여 교파가 수백 개로 갈리는 재난을 초래했다. 예수가 신이고 신이 예수인 교리를 믿고 더구나 인류를 구하는 존재로 격상시킨 기독교가 오히려 인류의 파멸과 갈등과 분노와 증오와 탐욕의 역사를 이어온 것이다. 그리고 그 치욕의 역사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기독교만큼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종교는 인류 역사에 일찍이 없었을 정도다. 오로지 나만 옳다는 아집으로 다른 종교는 물론 기독교 교회 안에서도 다른 교파를 악마화하는 거의 유일무이한 종교가 되었다.


신이 직접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왔다고 주장하는 기독교는 요한복음의 다음 구절을 금과옥조로 여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그러나 그런 독생자를 믿는 기독교는 인류의 멸망을 가져올 큰 전쟁과 분열을 지난 2천 년 동안 계속 조장해 온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도대체 신의 아들이자 신 자신인 예수를 믿는다는 기독교 신자들이 왜 이렇게 사는 것일까? 역사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당장 현대 사회에 사는 이른바 독실한 기독교 신자는 오로지 예수 천국 불신 지옥만을 외치면서 자기들만 구원받는 특별한 존재라고 주장하며 예수 안 믿는 다른 사람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자 안간힘을 쓰는 것으로 보일 정도다.


사실 기독교의 모체라고 할 수 있는 유대교에서는 예수가 신의 독생자라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유대교에서는 모든 인간이 신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신은 아담, 곧 인간을 창조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예다. 그러니 지금 이 지구상에 살아 있는 모든 인간이 신의 자녀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믿는 유대교 신자들이 세운 이스라엘조차 팔레스티나의 주민들을 학살하지 못해 안달이 나 있다. 그리고 그런 유대인을 지옥에 갈 죄인으로 믿어온 것이 또한 기독교인들이다. 같은 신을 믿는 세 종교, 곧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사실상 집안싸움을 벌여온 것이 지난 2천 년 간의 인류의 역사다. 입으로는 구세주, 평화, 은총, 구원을 떠들어대면서도 정작 그들의 행위는 분열과 분노와 증오와 갈등과 욕망과 저주뿐이다. 그러고도 기독교에서는 그들을 특별히 사랑하고 구원하는 독생자를 믿는단다. 그렇다면 예수만이 신의 자녀가 되는 것인데 나머지 인간은 무엇이란 말인가? 신이 창조하지 않은 존재? 그래서 그렇게 지난 2천 년의 역사, 특히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자행한 살육이 정당화된 것일까? 그러면서도 오늘도 기독교인은 전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독생자 예수가 자기들만 구원해 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는 좋지만 예수쟁이는 싫다는 말이 나오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참으로 불쌍하다. 그래서 예수가 한 말이 떠오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다.(루카 23,34)


그러나 지금 벌어지는 '꼴'을 예수가 본다면 많이 슬퍼할 것이다. 그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역사가 흐르고 있으니 말이다. 그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을 실천하기를 바랐던 뜻이 전혀 왜곡된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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