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캠과 먹방을 탐닉하다 (본능 vs 지성)
[ 인문칼럼 ]
이성은 욕망들을 넘어서는 욕망이다.
- 화이트헤드 -
요즘 인터넷 방송에서 여캠과 먹방 등을 진행하며 막대한 수입을 올리는 BJ들이 화제다. 그만큼 많은 젊은이가 그들의 콘텐츠에 자신의 시간과 금전을 쏟고 있다는 것이다. 청춘들은 무슨 이유로 여캠과 먹방을 탐닉하는 것일까? 이러한 욕망은 그들의 삶에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여캠과 먹방은 성욕과 식욕을 기반으로 하는 포르노그래피의 변주다. 그리고 우리 시대 많은 젊은이에게 성욕과 식욕에서 공통으로 왜곡된 부분이 있다. 바로 욕망의 억압이다. 자본과 미디어는 끊임없이 식욕을 불러일으키고 한편에선 다이어트를 부추긴다. 삶의 스트레스로 과다해진 식욕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들과 타인의 시선, 몸짱 이미지에 갇혀 다이어트가 평생의 과업이 된 이들에게 먹방은 해방구가 되어준다. 성욕 또한 마찬가지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연애와 결혼은 뒷전으로 밀린 채 스펙 쌓기에 몰두하는 청춘들. 그들의 에로스는 침묵 되었고 억압된 성욕은 여캠으로 향한다. 따라서 여캠과 먹방은 젊은이들의 억압된 욕망의 탈출구가 되어주는 것이다.
욕망의 해소를 위해 방송을 탐닉하는 청춘들. 하지만 미모의 BJ는 나의 애인이 아니며 먹방의 음식들은 나의 뱃속을 채워줄 수 없다. 익숙해진 자극은 더욱 강렬함을 열망하고 쾌락은 지속할 수 없기에 중독으로 이어진다. 하여, 여캠과 먹방의 탐닉은 욕망의 해소가 아닌 욕망의 확대와 재생산이다.
젊은이들은 자신의 욕망에 지배되어 삶을 망각하였고 자본은 성장을 위한 투자와 위험성을 감내할 필요가 없이 BJ와 시청자가 벌이는 판에 기생하여 배를 불리고 있다. 결국, 청춘들은 인터넷 방송의 프레임에서도 자본의 욕망을 극대화하기 위한 도구이자 수단으로만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청춘의 에너지를 자양분으로 하는 자본의 프레임이 또 하나 형성되었다. 섬뜩하고 위태롭다. 우리는 자본과 미디어의 판타지로부터 결국 미망에 빠질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인간은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는 인지적 구두쇠라고 한다. 인간이 뇌를 활성화해 생각하는 것에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기 때문에 항상 굶주려왔던 인류가 에너지의 보전을 위하여 생각을 줄이도록 뇌를 세팅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이론에 따른다면 인간이 각종 미디어에 중독되는 이유는 유혹에 빠진 인간의 어리석음 때문이 아닌 과열된 뇌를 식히기 위한 자연스러운 인간 본능의 작용 때문이 아닐까?
현대사회 우리의 뇌는 어떠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는가? 쏟아지는 정보, 과잉된 지식, 경쟁에서의 스트레스 등등 진화적으로 수렵과 채집에 최적화된 우리의 뇌가 과부하로 피로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따라서 사회가 복잡다단화 될수록 인간은 과열된 뇌의 휴식을 위해 본능적으로 생각을 줄이고 원초적 본능을 자극하는 미디어에 더더욱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추론으로 현대인들을 바라본다면 인간이 미디어의 판타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상구는 쉽사리 보이지 않는다.
생명이란 엔트로피의 비탈길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노력이다.
- 베르그송 -
하지만 인간이 인지적 구두쇠로만 머물렀다면 어찌 퇴화의 길을 걷지 않고 지금의 문명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생명의 진화는 자연의 흐름, 곧 물리적 변화를 거역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생각을 줄이려는 자연의 흐름 또한 그에 거역하는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반역의 힘은 지성일 것이다. 더욱 풍요로운 삶을 위한 인간의 욕망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는 극복과 진화를 이루게 하였다.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이 이성을 작용케 하여 천지 만물을 분석하기 위한 지성을 일구어 나아간 것이다. 이렇듯 생각을 줄이려는 본능의 이면에는 우주와 삶, 생과 사에 대해 끊임없이 깨치고자 하는 욕망 또한 작용하고 있다. 바로 지성의 욕망이 인지적 구두쇠로의 엔트로피에 반역하여 인간을 진화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인 것이다.
결국, 미망은 선택의 문제이다. 인지적 구두쇠로 미디어의 노예가 될 것인가? 부단한 지성으로 어떠한 유혹에도 자유로운 존재가 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스스로 노예이길 원하는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