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의 시대, 그 외부를 꿈꾸다
고미숙 [계몽의 시대]
모든 주체들은 이미 견고하게 짜여진 틀 위에서 사유하고 기억하도록 '코드화'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가 시도해야 할 것들은 이러한 기억들의 배치를 변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상상의 잠재력을 가능한 한 증식하는 것. 이것이 무의식의 심층을 탐사하는 진정한 목표이다.
< 고미숙, 「계몽의 시대」, 북드라망, 183쪽 >
「계몽의 시대」는 1894년 갑오개혁부터 1910년 경술국치까지의 근대 격동기에 일어났던 계몽운동이 현재 우리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계몽운동이란 청일전쟁 이후 본격화된 일본의 조선침략 야욕에 맞서 국권 회복과 근대국가 건설을 위해 국민을 계몽하려는 운동이었습니다. 놀라운 건 현재 우리의 사고방식과 관념, 세계관이 100여 년 전의 근대 계몽운동으로부터 구조 지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 시절 우리는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 서구를 받아들이게 되었을까요. 「계몽의 시대」는 근대 계몽기로의 계보학적 탐색을 통해 계몽운동이 우리에게 주입하려던 것과 그 흡수 과정을 낱낱이 목격하게 합니다.
< 계몽의 시대 >
대한제국이 문명개화에 뒤떨어져 있으니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 것은 당연하고 거기에서 벗어나려면 우선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것이 문명 개화론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수용한 서양사상은 백인들의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논리가 되었던 사회진화론이었습니다. 이것은 곧 자본주의로 강대국이 된 서유럽식의 근대화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자본주의의 가장 큰 가치와 척도는 무엇일까요. 바로 화폐입니다. 따라서 화폐를 축적하여 부국강병을 이루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민중은 농경사회에서 자연과 함께 호흡하였던 삶의 리듬을 순식간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성해야 했습니다. 과거의 가치들은 모두 저급한 것으로 매도되었습니다. 자급자족의 농업국에서 자본주의 사회로의 탈바꿈을 위하여 낯설고 이질적인 서구적 관념을 급격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시공간의 균질화, 인간중심주의, 민족, 계몽적 지식과 교육. 「계몽의 시대」는 이러한 요소들의 계보학적 탐색으로 근대가 그 이전과 어떠한 과정으로 단절되었는가를 다양한 근거 자료를 통해 보여줍니다. 오늘날까지도 근대적 가치관에 지배되어 그 외부를 꿈꾸지 못하는 현대인들을 조명합니다. 그리고 이 지배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근대로부터 벗어난 새로운 가치의 생성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한편으로는 단절되어버린 근대 이전의 우리의 삶과 의식을 일깨우며 서구적 관념으로 고착되어버린 인식의 전환을 일으킵니다. 근대로부터 현재까지도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사유, 표상, 가치, 진리가 반드시 따라야 할 숙명이 아님을 환기합니다.
< 신체성이 결여된 앎 >
몇 해 전부터 우리 사회에는 인문학 열풍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서점에는 삶을 성찰하는 내용의 서적들이 쏟아지고 인터넷으로 수많은 인문학 강의를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쉽고 가볍게 다듬어진 철학, 심리학 서적들은 삶과 인간관계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는 현대인들에게 구체적이며 세부적인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몸과 마음은 늘 그랬듯이 자본의 명령과 유혹에 허덕이며 인간관계는 더욱 가벼워지고 협소해져만 갑니다. 헬조선을 외치는 사람들. 그들은 이미 수많은 채널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를 간파하고 그 외부를 사유할 수 있는 지혜를 만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삶은 변화하지 않습니다. 넘쳐나는 인문학은 그들의 머리를 끄덕이게 할 순 있지만 존재를 움직이게 하지는 못합니다. 주류를 혐오하고 있지만 기회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주류에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은 소거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여태껏 우리가 습득하였던 앎은 도대체 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일까요. 머릿속으로 들어온 그 많은 지식과 지혜는 어디로 증발해 버린 것일까요. 우리는 왜 알면 알수록 더욱더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걸까요.
근대적 지식은 비판과 분석을 주요 방법으로 삼는다. 근대 이전의 공부법에 비추어 보면, 비판과 분석은 매우 기이한 방법이다. 비판과 분석이라는 척도에는 일단 지식이란 오직 언어, 곧 논리의 영역에서만 이루어진다는 전제가 작동한다. 하지만 근대 이전에는 어떤 담론도 언어와 그 외부, 혹은 주체와 대상 사이의 간극을 설정하지 않았다. 언어 혹은 논리는 앎을 표현하는 여러 방편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신체를 통해 터득되는 직관, 우주적 합일에의 충동, 물아일체 등이 앎의 근본 전제이자 목표였기 때문에 앎이란 언어를 통해 표현되긴 했지만, 늘 언어의 외부를 사유하고자 하였다. 근대적 이성은 '언어의 제국' 위에 구축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제국의 번성과 더불어 언어 외부, 직관이나 감정의 영역, 다시 말해 '신체성'은 증발되고 말았다.
< 고미숙, 「계몽의 시대」, 북드라망, 210쪽 >
신체성이 결여된 앎. 이것이 바로 앎으로 인해 자유를 얻지 못하는 왜곡된 근대적 앎의 배치입니다. 앎이란 오직 언어를 매개로 하는 논리의 영역에서만 이루어진다는 전제. 삶의 현장과 몸이 배제된 이성적 사고의 추구. 이와 같은 근대적 앎의 배치는 지식의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가 묶여있는 왜곡된 중력 장치입니다. 앎은 오직 두뇌의 활동으로만 국한되었으며 삶은 이성적 사고의 틀에 갇혀버렸습니다. 하지만 삶은 결코 언어화된 논리와 이성적 사고만으로 규정지어질 수 없는 온갖 모순과 역설이 뒤섞인 카오스의 세계입니다. 오늘날의 인문학은 어떠한가요. 삶의 현장과 그 현장을 점유하고 있는 몸에 대한 통찰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삶은 오직 생각에서 일어나는 논리와 이성적 사고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이러한 영역만을 잘 갈고닦는다면 이상적인 삶을 실현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삶의 현장과 신체성이 배제된 인문학은 공허합니다. 이것은 마치 마라톤 선수에게 코스와 체력, 기술에 대한 실전 훈련은 배제한 채 이론과 멘탈 훈련만을 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방법은 기록 단축에는 별다른 영향을 끼칠 수 없는 정신과 신체가 분리된 비현실적인 훈련일 뿐입니다.
수많은 지혜와 접속하는 현대인들이 그 지혜와 동떨어진 삶을 사는 이유가 바로 이와 같지 않을까요. 신체성이 결여된 앎은 체화되지 못한 채 교양으로 머물며 자신을 치장하는 용도로만 쓰일 뿐입니다. 삶은 결코 이성적 사고만으로는 변화하지 않습니다. 이성적 사고에는 반드시 삶의 현장과 신체성이 포괄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앎과 생각, 신체가 일치되어 끊임없이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만이 존재와 삶을 변화시키는 방법일 것입니다. 근대 이전의 앎 또한 이와 같았습니다. 신체의 분포도를 바꿈으로써 우주의 역동적 흐름과 접속하는 것. 이것이 앎의 궁극적 목표였습니다.
< 앎과 신체성의 새로운 비전 >
근대 이전의 앎은 언제나 신체의 문제였습니다. 지식과 몸이 분리되어 그저 텍스트만 외우고 논리만 갈고닦는 공부법은 없었습니다. 쉼 없이 수행하여 신체를 조성하는 요소들의 변환을 일으키는 것이 깨달음이며 깨달음은 곧 충만함이었습니다. 앎은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해 평생을 닦아야 할 삶의 양식이었습니다. 머릿속의 생각으로만 이루어지는 우리의 앎에 대한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현대인들은 앎의 즐거움을 잃어버렸으며 앎을 통해 자신의 번민을 구제하지도 못합니다. 앎은 부와 권력을 위한 수단이거나 과시 혹은 교양의 도구로 전락하였습니다.
앎의 영토에서 민족, 국가, 자본의 흔적을 지워 버리기! 물론 그게 끝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주체와 타자, 지식과 일상, 인간과 자연 혹은 인간과 기계 등 이 모든 항들을 대립적으로 설정하는, 근대적 인식론의 뇌관을 전복하려는 무모한 열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때서야 진정, 우리는 새로운 앎의 매트릭스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므로.
< 고미숙, 「계몽의 시대」, 북드라망, 225쪽 >
여러분은 삶에서 앎은 어떠한 형식으로 작동하고 있나요. 더 이상의 앎은 필요 없다고 치부하여 무지성의 삶을 살고 있나요. 혹은 간혹 책을 읽으며 덮으면 바로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는 의미 없는 앎을 행하고 있나요. 혹은 TV와 유튜브를 통해 잡다한 지식만 쌓고 있나요. 혹은 앎으로 인한 결과물을 생산하지 못한 채 앎의 습득에만 집중하고 있나요. 앎은 평생을 곁에 두고 살아가야 할 벗입니다. 만일 당신이 성숙한 인간이기를 원한다면 높은 수준의 사유를 흡수해야 할 것입니다. 습득한 높은 수준의 사유로 세계를 통찰하는 시도를 지속하고 자신의 언어를 새롭게 정립해야 합니다. 또한 당신이 앎을 통해 즉각적으로 자신을 고양시키고 싶다면 앎으로 인한 결과물을 생산해야 합니다. 수준 높은 결과물을 생산하기 위해 습득하는 앎은 고밀도로 체득되는 원리를 가집니다. 그리고 결과물을 생산하기 위한 치열한 과정 속에서 앎은 어느새 자신에게 완전 흡수되어 이전과는 다른 존재로 진화하게 됩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의 앎은 목적 달성에 실패할 경우 우리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앎이 지겨워지는 부작용을 낳습니다. 앎을 통해 내적인 충만함을 느껴본 이는 자신을 더욱더 성숙게 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내면을 고양하는 충만함은 잠들어있던 뇌세포와 말초신경까지를 모두 자극하여 자신을 끊임없이 깨어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기존의 통념과는 다른 앎의 형식을 통해야만 우리는 계몽의 시대, 그 외부를 꿈꾸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