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에 대한 단상 (1)]
제국주의의 마수가 중국을 집어삼키고 있던 1926년. 나치의 선전장관 괴벨스의 말과 같이 열강들의 침략으로 인해 중국인들은 세 분류(콜라보레이터, 레지스탕스, 대중)로 분열되었다. 일본 제국주의를 등에 업고 중심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한 콜라보레이터 돤치루이 정부. 광저우에서 중심지역으로 혁명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던 레지스탕스 국민군. 그리고 의식 있는 몇몇 대중들은 단체를 연합하여 국민군을 지지하였고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기 위해 잠들어 있는 대다수의 대중을 깨우고자 했다.
3월 18일 베이징 시민 3만여 명이 제국주의 열강들의 통첩에 반대하는 대중집회를 열고 회의 끝에 시위를 시작했다. 일부 학생들과 각계 대표들이 돤치루이 정부에 청원하기 위해 행정부 앞에 이르렀을 때 돤치루이는 맨손인 이들을 향해 사격을 명령하였다. 그 자리에서 40여 명이 사망하고 2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망자 중에는 루쉰과 함께 베이징여자사범대학에서 맞서 싸워온 동지이자 전우였고 제자들인 류허전, 양더칀이 있었다.
루쉰은 자신의 제자들과 많은 청년이 비참하게 학살당한 것에 비통함을 느꼈다. 피비린내 나는 이날을 “민국 이래 가장 어두운 날”이라 말하며 절망에 몸부림쳤다.
“3월 18일에 돤치루이 정부가 맨손으로 청원하러 온 시민들과 학생들을 학살한 사건은 언어도단의 만행으로, 내가 사는 이곳이 결코 인간 세상이 아니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사지」,『화개집속편』,337쪽
언어도단. 말할 길이 끊어졌다. 절망에 빠진 루쉰의 애통함이 단 네 글자로 뼈저리게 전해져 온다. 글쟁이가 언어로써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형언할 수 없다는 것은 곧 세상을 등지고 싶을 정도의 참담함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루쉰은 절망하고 있었다. 자신이 사는 곳이 결코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 아니라고.
절망이란 무엇인가? 절망이란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극단으로 치닫게 하는 강력한 감정이다. 절망에 지배된 자는 심연의 늪에서 허우적대며 몸과 마음을 파괴당한다. 또한, 그 무게와 고통,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때때로 삶을 포기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이처럼 절망은 몸속에 박힌 칼날과 같이 인간의 생과 사를 넘나들게 하는 매우 위험한 감정이다. 칼날을 빼내고 상처를 치유한 자는 예전처럼 살 것이오. 빼내지 못한 자는 평생을 고통 속에 살 것이며 치명상을 입은 자는 죽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루쉰은 자신에게 박힌 절망의 칼날을 어떻게 어루만졌을까?
“청년들 40여명의 피가 내주위에 차고 넘쳐서 숨도 쉬지 못하고 눈도 뜰 수 없는데 무슨 할 말이 남아있겠는가? 글을 지어 애도하는 것도 비통이 멎은 다음 일일 것이다.” 「류허전 군을 기념하며」,『화개집속편』,346쪽
비수가 날아와 꽂혔다. 루쉰은 제자들의 죽음으로 인해 슬픔을 집어삼켰고 중국인들의 비인간성으로 인해 분노를 집어삼켰으며 인간성의 말살을 목격함으로 인해 환멸을 집어삼켰으리라. 루쉰의 영혼 곳곳에 박힌 비수의 칼날은 그를 절망의 늪으로 침잠하게 했다. 숨 쉬는 것조차 힘든 이 심연 속에서 루쉰은 글을 지어 죽은 청년들을 애도하려하지 않는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이 비통함을 어서 추슬러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루쉰은 충분히 비통하고 충분히 절망해야 했다. 그렇게 축적된 절망의 파괴적인 에너지로 다시 적에게 비수를 날리기 위해서.
“그런데 몇몇 학자와 문인들이 발표한 음험한 논조는 나를 더욱 슬프게 했다. 나는 이미 분노에서 벗어났다. 나는 비인간적이며 캄캄한 세상에서 비애와 쓸쓸함을 깊이 음미하고자 한다. 가장 침통한 비애를 인간 아닌 인간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내 고통으로 즐거워하게 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나중에 죽을 사람의 보잘 것 없는 이 제물로 죽은 이들의 영전에 봉헌하리라”「류허전 군을 기념하며」,『화개집속편』,346쪽
“학생들이 총에 맞아 쓰러진 것은 학생들 자신이 스스로 사지에 뛰어든 것이다.” 세 치 혀로 돤치루이 정권의 학살에 정당성을 부여코자 했던 천시잉의 천인공노함은 루쉰을 심연의 늪으로부터 지상으로 솟구치게 했다. 그는 적을 확인함과 동시에 자신에게 박혀있던 절망의 칼날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집어삼킨 절망을 차근차근 음미하였다. 자신이 삼킨 만큼의 절망을 적들에게 똑같이 돌려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루쉰은 뽑아 쥔 비수로 다시 적들을 겨누었고 그들의 피를 재물 삼아 억울한 죽임을 당한 영혼들을 달래고자 했다.
“진정한 용사는 참담한 인생을 두려움 없이 마주 대하며 흥건한 피를 직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다. 이 얼마나 슬프면서 행복한 일인가?"「류허전 군을 기념하며」,『화개집속편』,346쪽
절망에 빠진 인간은 자신의 절망을 직시하지 않는다. 절망을 직시한다는 것은 곧 벌거벗고 초라한 자신의 민낯과 마주하는 고통스러운 것이기에. 하여, 외면하고 피해가며 털어내기에 급급하다. 절망의 시련 속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로. 루쉰은 자신에게 닥친 절망의 시련을 온전히 마주한다. 참담한 인생을. 흥건한 피를. 어찌 고통스럽지 않겠는가? 하지만 절망의 터널을 온전히 지나온 사람은 알 수 있다. 터널 끝에는 새로운 삶의 지평이 열린다는 것을.
“조물주는 늘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낡은 흔적을 씻어버리고 흐리게 변해버린 핏빛과 희미한 슬픔만 남도록 설계한다. 이 흐린 핏빛과 희미한 슬픔속에서 사람들은 또 잠시나마 삶을 구차하게 이어가면서 인간세상인 것 같지만, 비인간적인 세계를 영위한다. 이러한 세상이 언제 가야 끝날지 나는 모르겠다! 우리는 여전히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간다. 나는 진작 뭔가를 좀 써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낀다. 망각이라는 구세주도 곧 강림할 것이다. 이때 나는 뭔가를 좀 써야 할 필요가 있다.”「류허전 군을 기념하며」,『화개집속편』,346~347쪽
망각이라는 지우개는 신이 인간에게 내린 축복이다! 지난날의 모든 고통과 괴로움들을 죽는 날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면 결코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카오스와 같은 비인간적인 세계를 살아가기 위해선 망각해야 한다. 하지만 루쉰은 청년들의 죽음을 망각할 수 없었다. 루쉰은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비인간적인 현실을 고통스러워하며 또한, 직시하였다. 비통의 심연에 침잠하여 절망의 터널을 오롯이 통과했으며 망각으로 절망의 고통이 잊히기 전에 적들을 향해 예리한 비수를 날렸다. 그것이 죽은 청년들을 애도하는 최선의 방법이었을 터.
“루쉰은 이 준엄한 투쟁의 격랑 속에서 사상의 변화를 크게 겪고 있었으며, 급속하게 비약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낡은 것을 향해 투창을」,『루쉰전』(신영복, 유세종 옮김) 301쪽
그렇게 루쉰은 자신에게 닥쳐온 절망을 발밑까지 집어삼키고 그 어둠의 에너지를 통해 존재의 변환을 이루고 있었다. ‘절망 속에 존재의 도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