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회 경주남산순례를 다녀와서
수학여행 이후 20여 년 만에 다시 찾게 된 신라의 고도 경주. 며칠 전 받아본 무지막지한? 일정표는 설렘 가득한 경주여행을 머뭇거리는 마음으로 바꾸어 놓았다. “만 원밖에 내지 않았으니, 가지 않아도 기부하는 셈 치면 되지”라는 생각이 출발 전까지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약속’이었다. 선택에 대한 과보를 온전히 받아들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약속을 지켜야했다. 모든 일에 고(苦)와 락(樂)이 있듯이 경주남산순례, 도반들과의 친교, 법륜 스님과의 조우는 필연적으로 고생을 겪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편한 것만 취하고 싶은 얕은 마음이, 가치 있는 다양한 경험과 그로 인해 얻게 될 가능성을 가로막으려 했던 것이다.
경주행 버스에 오르고 도반들의 얼굴을 보니 다시 여행의 설렘이 차올랐다. 버스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드디어 도착! 입김이 나올 정도의 차가운 공기는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졸음에서 깨지 못해 멍한 정신으로 입재식을 치른 후 산행에 올랐다. 잠을 쫓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지만, 수면 부족의 후유증은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보수법사님의 설명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신비로운 불상도 눈에 각인되지 않았다. 그 중 유일하게 나의 감각을 깨운 것은 도반들이었다.
정토회 불교대학을 두 달쯤 다녔지만, 짧은 나누기 시간만으로는 도반들과 친교를 맺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몸과 몸이 상응하는 여행의 현장에서 어색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무런 목적 없는 가볍고 맑은 마음은, 경쾌한 리듬을 만들어냈다. 서먹했던 도반들과는 산에 오르는 동안 어느새 스스럼없이 웃고 떠드는 사이가 되었다. 음식을 나눠 먹고, 함께 호흡하고, 서로 격려하며 올랐던 산행이, 여러 번의 나누기 시간보다 서로를 더욱 깊이 교감케 한 것이다.
어느덧 정상에 올라 경주를 한 눈에 내려 보았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었다. 탁트인 공간에 평야와 산천이 어우러진 시원한 전경을 보고 있으니, 갖가지 공해로부터 찌들었던 심신이 편안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남산은 마치 나에게 “적체되어 있던 모든 것을 털어 내라” 말하는 듯했다. 그렇게 도반들과 함께 정상에서 망중한에 취해 있었다.
하산 후 군것질로 푸짐한^^; 점심을 먹고,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이 시작되었다. 그때까지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즉문즉설이 고행의 시간이 될 줄은. 우리가 자리한 곳에는 그늘막도, 의자도, 물도, 변변한 화장실도 없었다. 한여름과 같은 뙤약볕, 쏟아져 오는 졸음, 쌓아두었던 용변, 물은 떨어지고 목은 마르고, 맨땅에 몇 시간을 앉아있으니 온몸이 쑤셔왔다. “부처님의 고행이 바로 이런 것이었을까?” 하는 얼토당토않은 생각까지 머릿속을 스쳤다. 몰려오는 졸음에 정신은 아득해져 갔다. 그때 문득, 나만 힘든 것이 아닐 거란 생각에 주변을 살폈다. 대부분 평온한 얼굴로 스님의 법문을 듣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모습이었다. 좋은 시설과 서비스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그와 같은 환경에서도 짜증 한번 내는 것을 볼 수 없었다. 깨달음을 향한 열망이 열악한 환경에서도 대중을 평온함과 진중함으로 이끈 것이다. 그리고 천 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인 행사를 한 치의 잉여도 없이 소박하게 치루는 정토회의 모습을 보며, 그때서야 나는 너무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경주남산순례의 모든 일정이 수행의 장이었다는 것. 앎과 행동, 수행과 삶이 일치되는 법륜스님과 같이 일상의 매 순간을 수행자의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함을.
가벼운 나들이쯤으로 생각했던 경주행은 생각지 못한 고행길로 귀결되었다. 물론 그 여정 속에서 간직하고 싶은 소중한 추억도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 삶이란 이처럼 고(苦)와 락(樂)을 쉼 없이 넘나드는 과정의 연속이다. 그 속에서 중요한 건 겪고 있는 것의 본질을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야만 희망과 절망, 기쁨과 고통에 사로잡히지 않고, 순간에 충실하여 지금 여기를 온전히 살아갈 수 있기에.
순례를 다녀온 후 몸은 천근만근이였지만, 마음은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육체의 고단함 속에서 불필요한 마음의 찌꺼기가 태워진 것이다. 고행을 하듯 몸은 고되고 힘들었지만, 마음은 즐겁고 편안했던 여정! 하여, 나에게 경주남산순례는 즐거운 고행길이라는 형용모순과 같은 추억으로 간직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