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페스트]
우리의 도시에서는 이제는 아무도 거창한 감정을 품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은 단조로운 감정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젠 끝날 때도 되었는데." 하고 시민들은 말하곤 했다. 왜냐하면 재앙이 계속되는 기간 중에 집단적인 고통이 끝나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또 실제로 그들은 그것이 끝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말들은, 초기에 있었던 열정이나 안타까운 감정은 찾아볼 수 없는 채, 다만 우리에게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는, 저 빈약하기 짝이 없는 이성이 비쳐 보이는 말들이었다. 처음 몇 주일 간의 그 사나운 충동이 사그라지자 낙담이 뒤따랐는데, 그 낙담을 체념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역시 일종의 일시적인 동의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었다.
우리 시민들은 보조를 맞추었고, 흔히 사람들이 말하듯이 적응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달리 어쩔 도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에게는 아직 불행과 고통의 태도가 남아 있었지만, 더 이상 그것을 예리하게 느끼지는 않았다. 사실 예를 들어서 의사 리유가 지적했듯이, 불행은 바로 그 점에 있는 것이며, 또 절망에 습관이 들어 버린다는 것은 절망 그 자체보다 더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 알베르 카뮈, 「페스트」, 민음사, 238쪽 >
"그 모든 것을 누가 가르쳐 드렸나요, 선생님?"
대답이 즉각적으로 나왔다.
"가난입니다."
< 알베르 카뮈, 「페스트」, 민음사, 172~173쪽 >
이전에도 리유의 삶은 그러했다. 리유와의 깊은 대화에서 삶에 통달한 듯한 그를 보며 타루는 문득 묻는다. 리유의 대답은 매우 간단명료하다. 교육과 지식이라는 지적 소양이 아닌 바로 가난이라는 한 단어다. 그것은 리유가 가난으로 주어진 사회의 온갖 부조리를 겪어가며 부조리에 매몰된 것이 아닌 부조리를 극복하여 가난을 증오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닌 부조리를 경험으로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리유는 가난으로 인한 어려움이나 고난에 매몰되지 않고, 페스트와 같이 "거기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을 배우려고 노력"하였을 것이다. 배운다는 것은 대상을 객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하여, 객관화된 다양한 삶의 경험은 리유를 성숙한 인간으로 만드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리유는, 입 다물고 침묵하는 사람들의 무리에 속하지 않기 위하여, 페스트에 희생된 그 사람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기 위하여, 아니 적어도 그들에게 가해진 불의와 폭력에 대해 추억만이라도 남겨 놓기 위하여, 그리고 재앙의 소용돌이 속에서 배운 것만이라도, 즉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는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사실만이라도 말해 두기 위하여, 지금 여기서 끝맺으려고 하는 이야기를 글로 쓸 결심을 했다.
< 알베르 카뮈, 「페스트」, 민음사, 401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