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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고래 Jun 18. 2022

3. 기본이 결여된 인간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 기본이 결여된 인간 >

윌리 : 어떤 때는 제가 애들을 잘못 가르치는 게 아닌가 두렵거든요. 형님, 애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요?
벤 : 윌리엄, 정글로 걸어 들어갔을 때 나는 열일곱이었어. 걸어 나왔을 때는 스물한 살이었지. 그리고 나는 부자였어!
윌리 : 부자였다고! 내가 애들에게 심어 주고 싶은 것이 바로 그런 기백이야! 정글로 걸어 들어가는 것! 내가 맞았어! 내가 맞았어! 맞았어!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59~60쪽)


기백이란, 굳센 기상과 진취적 정신으로 뜻을 '펼치는 기운'이다. 뜻을 펼치기 위해서는 수련과 훈련이라는 수렴의 과정을 온전히 통과해야 한다. 인고의 시간 동안 '응축의 기운'으로 자신을 단련하는 것이다. 두 기운을 순리대로 펼면. 훈련을 통해 자신을 갖추고 세상에 나와, 당당한 기백을 품고 냉혹한 사회를 헤쳐 나가는 것. 수렴과 발산을 적절한 때를 맞춰 행하기에 탁월함을 발휘하게 된다. 하지만 아들 비프는 순리와는 정반대의 삶다.


린다 : 이번엔 집에 계속 있을 거냐?
비프 : 모르겠어요. 좀 둘러보며 뭘 할지 봐야겠어요.
린다 : 비프, 평생을 둘러보며 살 수는 없지 않겠니?
비프 : 뭘 지그시 붙들고 있지를 못하겠어요, 어머니. 뭐든 죽 붙들고 있을 수가 없다고요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62쪽)


비프의 고질병은 무얼 하든 지그시 붙들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다져진 실력. 꾸준한 성실함. 긍정과 자신감. 비프는 세상에서 인정받기 위한 덕목을 무엇하나 갖추지 못해 어디서든 밑바닥에 위치한다. 그는 높은 이상과 완전히 동떨어진 현실에 허덕인다. 윌리의 그늘에서 장밋빛 환상에 길들여져, 인고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비프. 유일한 탈출구는 지난한 과정을 생략하고 단숨에 도약하는 것이다.


해피 : 아버지, 형이 빌 올리버 사장을 만나러 간대요.
윌리 : 올리버 사장? 아니 왜?
비프 : 올리버 사장은 항상 제게 장사 밑천을 대 주겠다고 했거든요. 이제 사업을 해보고 싶어서 장사 밑천을 좀 꿀까 하고요.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72쪽)


올리버 사장에게 사업자금을 빌리려는 비프. 구체적 계획도 없이 큰돈을 빌려 새 출발을 꿈꾼다. 자신의 실력과 경험으로 쌓은 토대가 없으니. 타인을 성공의 수단으로 삼는다. 높은 이상에 단숨에 도달하기 위해 빌리는 금액은 많을수록 좋다. 과거 자신이 농구공 한 박스를 도둑질하여 회사에서 도망 나온 사실은 외면한 채. 결국 올리버를 만난 비프. 계획은 역시 허황된 망상이었다. 올리버 사장은 말단 배송 직원이었던 비프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윌리 : 비결이...... 비결이 뭐냐?
버나드 : 무슨 비결이요?
윌리 : 넌...... 넌 어떻게 한 거냐? 왜 걔는 영영 못 따라오지?
버나드 : 저야 알 수 없지요, 윌리 아저씨.
윌리 : 너는 그 애가 어렸을 때부터 잘 알고 지냈지 않니. 내가 알 수 없는 게 있어. 에버트 구장 경기 이후 걔 인생은 끝나 버린 것 같아. 열일곱 살 이후로 좋은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어.
버나드 : 어떤 것에 대해서도 훈련을 쌓지 않았어요.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110쪽)


버나드는 비프가 실패한 원인을 꿰뚫었다. 모든 활동의 근간인 훈련을 쌓지 않았다는 것. 비프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근원에는 윌리의 잘못된 교육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의 교육은 자신의 이미지를 잘 가꾸어 밖으로 보이는 모습에만 초점이 맞춰있었다. 결과는 타인의 욕망을 갈구하는 인간. 겉만 그럴듯한 실속 없는 인간. 속 빈 강정 같은 인간을 길러냈다.


윌리 : 버나드는 학교에서 최고 우등생 일지는 모르지만, 업계에 뛰어들면 너희가 다섯 배쯤 앞설 거다. 우리 아들 둘 다 어찌나 미끈하게 잘 빠졌는지 하느님께 감사한다니까. 업계에서는 외모가 준수하고 개인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 앞서가는 법이거든. 인기가 있으면 부족할 게 없단다. 나를 봐. 나는 바이어를 보기 위해 줄을 설 필요가 없어. "윌리 로먼이 여기 왔네!" 그러면 알아서 모셔 가지.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37쪽)


수학 F 학점 위기에 처한 아들에게 윌리가 건넨 말이다. 윌리는 학생의 본분인 자식의 공부를 도외시했다. 학생의 기본을 망각했다. 자신이 속한 세계의 기준으로 비프를 훈육했다. 인기와 호감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두었다. 성실한 자세. 정밀한 훈련. 작은 성취를 쌓아 큰 성취를 이루는 원리는 가르치지 못했다. 어릴 적 내재한 습속은 스스로 각성하지 않는 이상 벗어나지 못한다. 기본이라는 튼튼한 뿌리가 내리지 않았으니, 자신을 가로막는 냉혹한 현실을 버틸 수 없다. 외부의 작은 충격에도 존재가 흔들린다. 그럴 때마다 도둑질하며 자포자기에 빠진다. 어디서도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 무엇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인간. 비프는 기본이 결여된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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