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한 때는 훌륭한 그림쟁이가 되고 싶었다
어머! 이 '선' 좀 봐봐. 살아있네!
한 때는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고1 때 우연히 미술을 접하게 되고 금강미술학원 원장 선생님의 파우더보다 더 향긋했던 '선이 살아있네! 마술가루'에 엄마가 눈이 멀고, 나 또한 눈이 멀어 선택하게 된 그 길을 따라 나는 지금쯤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가 되어 있었어야 했다.
금강미술학원: 서울 강남구 일원동 상가 건물 2층에 있었다. 창문에는 ‘비너스’와 ‘아그립파’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었고, 주로 일원동 현대아파트와 한신아파트 애들이 많이 왔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흔히 돈이 있을 법한 오해를 안고 사는 자식들이었고, 그런 오해마저도 부러웠던 나와는 차원이 다른 애들이었다. 하필 그중에 여자 애 하나가 마음에 들었고, 미술학원 원장 선생님을 적극 도와 엄마의 눈에 마술 가루를 뿌렸다. 난 원래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자가 꿈이었다.
월급이 100만 원이라고? 그거 가지고 되겠어? 월급 120만 원 형님이 담배 하나 꼬나물고 실실 웃었다. 제길... 디게 부러웠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4학년이 되던 98년 당시, 교수님 추천으로 '한국색채연구소'에 입사했다. 당시 한국색채연구소는 기존 KBS로부터 시작된 재단법인이었기에 나름 '가오'가 있었다. 하지만 연구소 타이틀 빼고는 월급이 100여만 원에 불과해 늘 120만 원 받는 충무로 편집디자이너 선배가 낄낄거리며 놀려댔었고, '이놈의 타이틀이 뭐가 중헌디' 하면서 내심 돈 많이 버는 그 선배를 부러워했었다. 그러다 정보통신 기반의 대기업으로부터 웹디자이너 오퍼가 들어와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들어온지 벌써 20년이 흘렀다. 만일 그때 내가 그 자리에 남아 있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세계 최고의 색채 디자이너가 되어 있지 않았을까?
한국색채연구소는 1990년대 컬러방송제작을 위해 설립된 KBS색채연구소로부터 분리되어 재단법인으로 출범하였다. 당시 소장님은 나름 색채 연구학에 있어 국내 일인자이셨고, 우리가 예전 미술책에서 봐 왔던 색상환과 색채학의 이론을 정립하신 분이다. 다만, 비즈니스는 영 아니셔서 당시 몇몇 직원들로부터 돈 떼임이나 이상한 사업에 꼬임 당해 상당 부분의 회사 재산을 잃다시피 했다. 연구학자가 비즈니스를 하기에는 도사리는 위험들이 참 많다. 당시 여비서가 매 달 부도나지 않게 하려고 은행 마감시간에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여직원은 나름 매력 있었는데, 한 번은 1톤짜리 용달차 하나가 회사 건물에 주차하더니 '며칠 전 나이트에서 만난 사이'라고 회사를 쳐 들어와 몸으로 막았던 기억도 난다.
디자이너로서의 성장은 기대하기 어렵다?
99년도 인터넷 붐이 터졌다. 덩달아 몸 값도 오르고 여럿 벤처기업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들어왔다. 네띠앙에서 제의가 들어왔을 때엔 내 어깨가 5센티 정도는 올라갔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직을 하지는 않았다. 어깨뽕이 뭐 대수라고... 딱 1년 일해보니 오롯이 웹디자이너로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기는 어렵겠다 판단이 들었다. 다른 동료들보다 좀 더 일찍 업무 전환을 했다. 디자인보다는 기획을, 영업을, 프로젝트 관리를 하였고 실제 디자인 업무는 웹에이전시를 통해 진행하였다. 기획 및 관리 업무가 상위 업무라 생각을 했었고, 최고의 소프트웨어는 '포토샵'이 아니라 '엑셀'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동료 디자이너에게 배신자 소리도 들었지만, 그 뒤로 많은 동료들 또한 디자이너에서 자신만의 살 길로 직무를 바꿔 나갔다. 만일 그때 내가 디자인 업무를 계속 했었더라면, 나는 어쩌면 세계가 아니더라도 꽤 괜찮은 그래픽 디자이너로서의 자부심을 안고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디자이너, 그 비상을 꿈꾸다
사실 웹에이전시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꽤 괜찮은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이름을 알리고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있는 일은 매우 어렵다. 수 많은 웹에이전시가 훌륭한 그래픽 디자이너를 양성하고 있지만, 디자이너로서의 생명은 매우 짧은 편이다. 다수는 어느 순간 웹기획자가 되어 있고, 견적서를 작성하고 있으며 30대 후반쯤 되면 한 부서의 조직장이 되어버리기 일쑤다. 라떼(나때는말야)의 디자인 경험은 하루 지난 라떼처럼 아메리카노보다 못한 희뿌연 꼰대가 되어 버린다. 세계적인 디자이너로서의 꿈은 아득한 추억이 된다.
‘행복한 삶’의 고민 끝 결론은, 언제나 ‘내가 좋아하고 내가 잘 하는 것’을 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매일 글 쓰고 그림 그리면서 살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다. 하지만 우선 돈부터 벌고, 어느 정도 물 틀면 찔끔이라도 좋으니 단수가 안되길 바라는 마음이 먼저다 보니, 글 쓰고 그림 그리면서 사는 인생은 내 인생의 제일 뒤편에 배치되어 있었다. 엄마 눈에 ‘마술가루’를 뿌리던 그 미술학원 원장 선생님은 정말로 내가 세계적인 그림쟁이로 성장하길 바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내가 좋아라 하는 마음이 그 한신아파트 여자 애 뿐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와! 너는 정말 ‘선’이 살아있구나”라는 이 말 한마디가 나에게 안겨 준 그 꿈이 그립다.
브런치를 통해 글을 쓰다 보니 그림도 그려보고 싶어 진다. 또 다음날이면 새벽별을 보며 회사로 출근하겠지만, 내 행복한 시간을 인생의 저 맨 끝에 놓는 일은 없어야겠다. 틈틈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다 보면, 정말 내 인생의 끝에서는 나름 ‘알아주는 디자이너’가 되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림쟁이들은 ‘선’만 봐도 그 사람의 그림 솜씨와 재능을 가늠할 수 있다. 노래 잘 부르는 사람들의 평소 ‘목소리’만 들어봐도 얼추 느낌을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어설픈 ‘선’과 좀 더 세련된 ‘선’은 어떤 것일까? 재미로만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