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씨네진 은영 Mar 23. 2024

가끔 잘못 탄 기차가 우리를 목적지에  데려다준다

영화 <런치박스>

남편이 사서 먹는 식사가 맛이 없다고 하여 도시락을 싸주기 시작했다. 멸치조림, 달걀 프라이, 콩자반, 감자조림, 오이를 넣고 도시락을 싸줬다. 작은 손 편지로 가끔 시를 한 편 써서 보내기도 하고 예전에 주고받았던 연애편지 속에서 몇 구절을 인용하여 작은 쪽지를 도시락에 넣어준다.





힘든 남편의 하루가 이 작은 글로 위로가 된다면 그것으로 만족이다. 다 먹은 가벼운 빈 도시락은 나를 기쁘게 하고 ‘다 맛있었어’라는 말 한마디가 순간 행복을 좌우하기도 한다. 남편 도시락을 준비하면서 인도영화「런치박스」에 나오는 일라를 생각해 보았다.


 도시락


 인도영화 「런치박스」는 남편에게 보내는 도시락이 잘못 전달되어 벌어진 어떤 일상을 그리고 있다. 남편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아내 일라는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환상의 레시피를 받아 남편에게 정성껏 도시락을 싸서 배달원에게 보낸다.



인도 뭄바이에는 5000명이 넘는 도시락 배달원 다바왈라가 아내들이 만든 20만 개 도시락을 배달한다. 하버드에서 이 시스템을 연구했는데 결점이 없다고 할 정도로 완벽한 배달시스템이라고 한다. 이 영화에서는 사고 없는 배달시스템이 1600만 분의 1 확률로 일어날 수 있는 배달 사고를 낸다. 남편에게 보낸 일라의 도시락이 곧 명퇴를 앞둔 회계사 사잔에게 잘못 배달된다.


  



       

  인도 빵 푸리, 카레, 에그 플랜트, 콜리플라워, 파니르, 봄 사과를 이용한 요리 등은 영화 「런치박스」에 나오는 도시락 반찬이다. 일라는 도시락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작은 편지를 넣어 보내기 시작했고 아내와 사별하고 다른 사람과의 소통도 없던 사잔은 점점 도시락을 기다리게 된다. 똑같이 만들어진 식당 배달음식이 아니라 누군가 자신을 위해 만든 음식을 먹게 된 사잔은 점점 일라의 일상에 관심을 갖는다.



외로운  공간



영화 속 인물들은 사회 속에서 스스로 고립된 외로운 존재들이다.


마음을 닫고 회사에서도 혼자 밥을 먹고 집에서는 인스턴트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사잔,

집에 오면 핸드폰과 TV만 보는 남편,  

암에 걸려 병상에 누워 있는 친정아버지,  

평생 누워서  돌아가는 선풍기만 바라보는 남편을 돌보는 이웃집 아주머니,

고아지만  갖은 노력으로 사무원이 된 부하직원 세이크,

남편의 도움 없이는 살아가기 힘든 일라,  

아픈 남편에게 얽매여 사는 친정엄마.  


각각 자신이 정해 놓은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공간과 관계에 묶여있다.  굳어진 틈사이로 잘못 배달된 도시락 하나가 따뜻한 불을 지핀다.



내 몸에서 할아버지 냄새가 난다



드디어 사잔과 일라는 어느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한다. 일라는 예쁜 옷으로 차려입고 레스토랑에서 기다린다.   사잔은 어땠을까? 갑자기 사잔에게 마음의 변화가 생긴다. 사잔은 그녀에게 나타나지 않고 레스토랑 한쪽에서 그를 기다리는 일라를 바라본다.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은 이유는 목욕탕에서 갑자기 느낀  할아버지 냄새 때문이다.  그가 목욕탕에서 자신의 냄새를 맡는 장면은 ‘나 늙었다’라고 표현하는 것보다 더 슬프게 느껴진다. 그에게  그 냄새는 늙음을 의미했다. 그 단어는 주저함으로 연결되고 곧 체념으로 확장되었다.



행복을 위한 선택



영화는 사잔과 일라를 끝까지 같은 기차에 태우려고 노력한다. 일라는 핸드폰과 TV만 보는 남편, 여성으로 힘든 삶을 사는 친정엄마와 평생 병든 남편을 돌보는 이웃집 아주머니와 같은 삶을 살지 않기 위해  귀금속을 팔아 부탄으로 떠나려고 결심한다. 사잔은 더 늙기 전에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아보고자 다시 뭄바이로 돌아온다. 그에게 달려오는 기차를 타고 싶은 거다.  결국 영화는 끝까지 그들을 만나게 하지는 않는다. 사잔이 다마왈라들에게 일라의 집을 묻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가끔은 잘못 탄 기차가 우리를 목적지로 데려다준다



영화 대사 중에 ‘가끔은 잘못 탄 기차가 우리를 목적지로 데려다준대요’라는 부분이 있다. 이 대사처럼 간혹 잘못 탄 기차가 우리를 목적지로 데려다줄 수도 있다. 내가 탄 기차가 가는 데로 한번 따라가 보는 것도 나쁠 건 없다. 우리는 어쩌면 항상 목적지를 모르는 기차를 타고 떠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잘못 배달된 뜻하지 않은 점심 도시락이 사잔의 죽어 있던 심장을 뛰게 했고 늙음이라는 한계를 뛰어넘게 했다.



일라는 사잔과의 소통으로 다른 삶을 꿈꿀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때로는 누군가의 공감이 위로가 되고 용기를 준다. 남편을 위한 나의 도시락이 그에게 위안이 되고 살아가는데 용기를 주었을까? 따뜻한 밥 한 끼가 위로가 될 수 있듯이 갑자기 남편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