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같은 약속보다 지금이 좋다네
영화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영화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감독:압바스 키에로스타미
제작: 이란 프랑스 2002
누구에게 죽음은 지루한 기다림이고 누구에게는 순리대로 지나가는 바람과 같은 것이다. 죽음을 촬영하기 위해 죽지 않는 사람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너무도 무료한 일이다. 반면에 마을 사람들은 느긋하게 자기 일을 한다. 죽음은 그들에게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계절과 같은 것이다.
영화의 제목이 시선을 끈다. 제목은 이란의 여류시인 포루흐 파로흐자드의 시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에서 차용한 것이다. 영화 속에서 읊조리는 파로흐자드 시는 그녀의 내밀한 욕망을 드러내 주기도 하고 체념을 가르치는 것 같기도 하다. 실제 영화는 다큐와 비슷한 흐름을 갖고 있어 건조하다. 영화 몇몇 장면에 그녀의 시가 나오는데, 다행히 이 시를 통해 누군가는 감정을 고양시키고 사색할 시간을 얻는다.
이란의 여류시인 파로흐자드는 1935년 이란의 테헤란에서 태어나 1967년 교통사고로 서른두 살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파로흐자드는 20세기 이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여류 시인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열여섯 살에 결혼하고 아들을 낳은 뒤 이혼한 파로흐 자드는 그때부터 주옥같은 작품들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시를 직접 읊는 장면이 있다. 주인공 베흐자드는 우유를 얻기 위해 컥라흐만 씨 집에 간다. 우유가 있는 외양간은 지하 어두운 곳에 있다. 외양간은 암전 된 듯 빛 하나도 없다. 마치 시인 파로흐 자드의 어두운 마음처럼 , 태초에 어둠이 있었던 것처럼 어둡다. 소녀는 지하 외양간에서 작은 등불 하나 들고 우유를 짜준다. 우유를 짜주는 소녀의 뒷 보습을 보며 베흐자드는 그녀에게 시를 읊어준다. 소녀는 젖을 짜고 남자는 상당히 농한 이 시를 읊어준다. '바람은 나뭇잎들과 밀회를 즐기네.'라는 부분에서 소녀는 무안하여 그의 시를 중단시킨다. 이 시는 아마도 사랑에 대한 열정을 가슴 안에 숨기는 여인의 마음을 노래하는 듯하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포루그 파로흐자드-
아 나의 짧은 밤동안
바람은 잎새를 만나려 한다.
나의 밤은 통렬한 아픔으로 가득하다
들어라
그림자의 속삭임이 들리는가
이런 행복은 내게 낯설구나
난 절망에 익숙해 있으니
들어라
그림자의 속삭임이 들리는가
저 어둠 속엔 무슨 일인가?
달은 붉고 수심에 차
언제 무너질지 모를 지붕에 매달렸다
구름은 비탄에 잠긴 여인들처럼
비의 탄생을 기다리는구나
한 순간이면 모든 것이 끝나니
창문 너머로 밤은 떨고 있구나
지구는 자전을 멈추었구나
창문 너머로 낯선 이 가
그대와 나를 걱정하고 있으니
푸르른 그대여
그대의 손
그 불타는 기억들을
내 부드러운 손 위에 얹고
생명의 온기로 충만한
그대 입술을
내 갈망하는 입술에 맡기라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시 속에 두려움도 있고 사랑에 대한 떨림도 있고 과감한 열정도 열망도 보인다. 하지만 절망해 가는 안타까움도 보인다. 절망에 중독되어 자신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 어쩌면 지하 외양간에서 젖을 짜는 소녀처럼 어두움 속에서 생명의 밥을 짓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바람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 줄까!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이 작품은 이란 감독 압바스 키에로스타미가 1999년에 만든 작품으로 그해 베니스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테헤란에서 700마일 떨어진 첩첩산골 마을 <시어 다레 > 마을에 베흐저드 촬영팀이 도착한다. 베흐저드는 마을 사람들에게 전화를 설치하는 기술자라고 이야기한다. 그들은 쿠르드족 마을의 최고령 할머니의 죽음과 장례 의식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온 촬영팀이다. 베흐저드는 할머니가 바로 죽을 줄 알고 짧은 일정을 잡았는데 할머니의 병세는 점점 좋아진다. 마을에서 체류 기간은 늘어나고 같이 온 일행들의 불만도 커져간다. 결국 그는 혼자 남게 되면서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시골에 도착하자마자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다. 베흐저드는 전화를 받기 위해 매번 높은 언덕 위 묘지까지 올라간다. 그곳에는 구덩이를 파는 사람이 혼자서 묵묵히 일을 하고 있는데 주인공은 전화를 받을 때마다 그를 만나고 담소를 나눈다. 그의 모습은 화면에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오로지 목소리만 나온다..
어느 날 그 구덩이를 파던 사람이 흙이 무너져 구덩이에 묻히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고 베흐저드는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 그를 구한다.
베흐저드는 구덩이를 파는 사람을 살려내고 의사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할머니의 집으로 간다. 할머니를 진찰하고 돌아오는 장면에서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있다. 두 사람이 탄 오토바이가 아름다운 황금색 들판을 달린다. 베흐저드는 그 시간에도 전화를 받느라 바쁘다. 전화 소리는 바람에 묻혀버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의사와 나누는 대화 속에는 죽음과 삶의 이유가 녹아있다.
베흐저드 : “여보세요. 바람 때문에 잘 안 들려요. 크게 말하세요. 끊어졌네.
무슨 병이죠?”
의사 : “병든 게 아니야. 늙고 약해진 거지. 뼈만 남았어. 상태도 아주 안 좋고.”
베흐저드 : “늙는 건 나쁜 병이죠.”
의사 : “하지만 더 나쁜 병도 있어. 죽음. 죽음이 제일 나쁘지. 이 세상의 아름다움, 경이로운 자연, 신의 은총을 떠나게 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거든.”
베흐저드 : “저세상이 더 아름답대요.”
의사 : “누가 저세상에 갔다 와서 거기가 아름답다고 말한 적 있나? 그녀는 선녀처럼 아름답다고 하지. 하지만 난 포도즙이 더 좋다네. 꿈같은 약속보다 지금이 좋다네. 저 멀리서 흥겨운 북소리가 들려와도 지금이 좋다네’.”
죽고 나면 천국의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의사는 시를 통해 말한다. 가보지 않은 세계를 어찌 알겠는가! 포도즙의 맛을 느끼고 흥겨운 음악이 들리는 현재가 좋다고.
여자가 차를 나르는 것도 노동일까?
베흐저드는 삶의 관찰자로 변하고 마을 사람을 응시한다. 영화 속에 죽음 외에 남성과 여성의 노동에 대한 관점이 아주 흥미롭게 묘사되어 있다.
주인공 남성이 하는 일은 전화만 하고 계속해서 노인이 죽는 것만 기다리고 있다. 반면 여성의 노동은 오히려 실질적이다. 베흐저드는 찻집에서
"여자가 차 나르는 건 처음 보네요"라고 말한다.
그러자 찻집 여인이 말한다
"댁은 하늘에서 떨어졌어요?"
당신을 낳아준 것도, 아버지에게 차를 갖다 주는 것도 여자라는 뜻이다.
여자가 하는 일은
낮에 하는 일,
저녁에 식구들 시중드는 일,
그리고 남편의 육체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밤일.
여성에게는 밤일도 노동일 수 있다.
한편으로 남성들은 차 나르는 일을 하찮게 표현한다.
노인은 자신은 뜨거운 태양 아래 밭일을 하고 왔는데
차를 나르는 일과 비교하며 여인이 차를 나르는 일이 무슨 대단한 일이냐며 비난한다. 여인은 그렇게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어찌 되었든 차를 준비하고 대접하는 것은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자 노인은 이제 차를 대접하는 것도 일이 되었다며 한탄한다.
가족에게 밥을 해 주고 차를 내주는 것은 일인가? 영화 속 여인들은 말한다.
"누군가에게 좋은 것을 주기 위해 내 몸을 쓰는 것 그것이 곧 일이다.''
노인은 남자도 밤일을 일로서 한다고 주장한다. 그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한다.
여성들은 항상 일을 하고 있다
밭에서 밀을 베고
지붕 위에서 곡식을 말리고 있고
반죽을 하고,
밥을 만들어 먹이는 일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아기를 낳고,
아이를 돌보고
청소를 하고
풀을 베어 창고에 들이고
가축을 돌보고
밀크를 짜고
탈곡을 하고
딸기를 따고
다른 등장인물들도 모두 일을 하고 있다.
언덕 위 묘지를 만들기 위해 구덩이를 파는 사람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
진료를 하는 사람
트랙터를 모는 사람
심지어 말똥구리도 일을 하고 있다.
그에 반해 주인공 베흐저드가 하는 행동은 차를 몰고 언덕 묘지로 올라가 전화하는 행위
면도하는 행위, 사진 찍는 행위밖에 없다. 다른 사람에게 시를 읊어 주는 일, 사진을 찍는 행동은 거의 마지막 부분 단 20초에 불과하다. 모두가 일하고 있는데 늙고 약해 죽어 가는 노인의 장례식을 촬영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주인공을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보았을까?
주인공은 기자로서 쿠르드족의 장례 풍경을 취재하려고 하지만 2주가 지난 후에나 장례식을 촬영한다. 기다리는 2주 동안 그는 죽음보다 삶을 관찰하며 변하기 시작한다. 죽음을 촬영하러 왔는데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얻고 간다.
마지막 그의 카메라는 일하는 사람들을 향해 셧터를 누른다. 그가 마지막 셧터를 일상의 사람들을 향해 누른 것은 어쩌면 삶에서 중요한 것이 현재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라는 진부하지만 당연한 진리를 말하고자 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발전하고 있는 현대의 모습을 따르지 않는다. 할머니의 병은 병이 아니고 늙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듯 그들에게 할머니를 데리고 가는 것은 병이 아니라 바람인 것이다. 이 마을의 모습이 아직 문명화되지 않고 원시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마을 사람들은 바람이 우리를 데려가듯 순리대로 살아갈 뿐이다.
영화는 2주 동안 잠시 멈춰 서서 죽음, 일, 삶을 바라보도록 그에게도 우리에게도 시간과 시각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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