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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네진 은영 Mar 28. 2024

철학은 삶의 무기가 될 수 있는가

영화 <다가오는 것들>

감독 미아 한센-러브(2016)

출연 이자벨 위페르|에디뜨 스꼽|로만 코린카|앙드레 마르콩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무엇이 나를 일으켜줄까! 다 떠났다고, 믿음이 깨졌다고 다 버리기에는 너무나 아직  살아있는 기억과 감정들을 어찌하면 좋을까!

우리에게 남아있는 소중한 것들은 같이 나눈 시간들뿐인가! 영화가 끝난 후 삶에 대한 질문이 되돌이표로 나에게 돌아온다.  



주인공 나탈리는 고등학교 철학교사이고 가정도 화목하다. 겉으로 보기에 성공한  중년의 여성이다. 그녀의 견고한 일상에 '균열'이 시작된다. 남편의 외도와 이혼, 그녀를 붙잡고 있던 어머니의 죽음 등 밀려오는 상황 앞에서 나탈리는 분노하고 좌절하는 대신, 변화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다. 배우  이자벨 위페르는 나탈리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파도와 같은 갈등을 놓치지 않고 작은 몸짓과 표정 하나하나로  나탈리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나탈리는 자신의 존재를 현 상황에 비추어 실존적 존재로 다시 끌어올린다.  그녀에게 다가온  불행을 인지하기 전에는 안주하고 인정하는 즉자적 존재였으나 상황을 극복했을 때는 의미 있는 실존적 자아로 돌아온다.  존재한다는 것은  실존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실존에 대한 시몬느 보봐르의 말을  덧붙여 본다.


’ 실존이란 어떤 것을 선택하는, 이른바 상황에 몸을 던지는 기투(企投)적 행위에서 시작된다. 모든 선택 앞에는 구체적인 상황이 놓여있다. 따라서 어떤 선택을 하는 데는, 상황을 돌파해야 하는 적극적 의지와 결단이 동반되어야 한다.'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안주하는 것은 돌멩이, 나무, 풀 등 즉자적 존재나 할 일이다. 실존적 인간, 즉 대자적 존재는 현재의 상황을 향해 몸을 던지는 행위를 통해 실존성에 이른다. ‘  



그녀가 부딪혀야 하는 실존에 대한 문제는 이미 영화 초반부에  암시하고 있다. 영화는 현재가 아니라 아이들이 어렸을 때  그녀의 삶의 멘토 샤토브리앙의 묘지에서부터 시작한다.  왜 그랬을까? 처음에는 한때 행복한 가족여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영화 속 철학자들의 사상과 나탈리의 생각을 연결시켜 보았다. 샤토브리앙은 19세기 타지에 나가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경험하고 글로 썼던 사람이다. 그는 마지막에  죽으며 '나는 저 바람소리만 듣다 죽고 싶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도입 장면은 안정적인 나탈리의 삶과  파도와 같은 샤토브리앙의 삶을 대비시켜 나탈리의 삶을 미리 예견하고 있다.



 

 영화가 다루는 시간은 중년이 된 나탈리지만 노인으로서 여성어머니, 남편의 이혼 통보로 힘들어하는 그녀와 아기를 낳은 딸 여성 3대의 모습을 통해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면서 늙어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그녀들의 삶은 버림받음과 상실의 연속이다. 나탈리의 어머니는 한때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하는 모델로 활동하며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결국 남자들에게 모두 버림받는다. 결국 불안증에 시달리며 딸 나탈리에게 의존하다가 외롭고 비참하게 세상을 떠난다.


같은 철학 교사 동료이자, 평생 자신을 사랑하리라 믿었던 나탈리의 남편은 다른 여자와 함께 살림을 차리겠다며 나탈리를 버리고 떠난다. 나탈리의 딸은 마지막에 아이를 출산하지만, 나탈리가 이미 갈라선 남편에 대해 말을 내뱉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아이를 안고 엉엉 운다.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 자리에서 그녀가 되새김질하는 동시에 예감했던 허무를 말하고 있다.


20대 시몬느 보봐르의 <제2의 성>을 읽으며 너무나 여성적인 여성이 아니길 소망했었다. 여성 해방론자는 아니어도 불평등한  대우를  받지 않고, 상실의 시간이 오더라도 견뎌내는 힘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혼하여  부부라는 관계로 살다 보니 혼자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이 점점 약해져 가고 관계에 의지하게 된다.  이것도 습관이겠지만.... 또한 이것이 사랑인가? 의심하기도 한다.  사랑이겠지 생각하고  비겁하게 상대방의 남성적 우월주의에 언제나 귀여운 고양이처럼 한 바탕 연극으로 상황을 무마한다. ‘ 이렇게 점점 늙어가는 가보다.  그럭저럭 살다가지 뭐,  그러다가도 불뚝 화가 난다.  남자들은 종종 외도라는  무기로 관계 이탈을  한다.  이럴 때  시몬느 보봐르 <제2의 성>에  나온 말처럼 남자들은  외도를 방패 삼아 일방적으로 관계를 청산한다.


'남자가 여자에 대하여 협력과 친절한 태도를 가질 때 그는 추상적인 평등의 원리만을 내세우고, 자기가 확인한 구체적인 불평등은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남자가 여자와 불화 상태에 들어가자마자 사태는 역전한다. 그는 구체적인 불평들을 이론화하여, 추상적인 평등마저 부인하려고 그것을 방패로 삼는다.'   

- 시몬느 드 보봐르 <제2의 성>-



갑자기 떨어지는 폭포 같은 불행에  준비를 못한  여성들은 무너지기도 하고  자신의 실존에 대해 직시하고 받아들이면 단단해지기도 한다.  미리 타인에 대한 아니 남성에 대한 지식이 있었더라면 여성들은 당당하게 관계를 청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즘 관계 청산의 주도자는 남녀가 따로 없는 듯하다.




이 영화는 마치 한 배우  이자벨 위페르의 삶을 들여다보는 듯한다.  배우 연기가 주는 영향력이 큰 영화이다.  이 작품을 만든  미아 한센 러브 감독은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배우 이자벨 위페르를 생각하며 작업했다고 한다.  이자벨 위페르가 아닌 다른 배우는 상상한 적이 없다며 그녀가 지금껏 선보였던 지적이면서도 섬세한 감정 연기는 물론 보다 풍성하고 깊이 있는 모습을 담아내고자 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녀의 연기는 결코 겉으로 현란하거나 시선을 독차지하지 않은 감정 표현은 에 대한 탁월한 감각은 관객에게 감동을 준다.


남편이 나탈리에게 외도를 고백하자 , 나탈리는 이렇게 말한다.

"왜 나한테 말했어? 그냥 혼자 담아둘 순 없었어"


이 대사는  나탈리가 살아가기 위해 택한 삶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진실을 외면하면서 자신이 만들어 놓은 안전망 안에서  살아가려는 모습이다. 그녀는 자신만의 철학적 사유를 통해 치열하게 생각하지만  결국  자신이 만든 안락한 삶을 위협하는 큰 변화는 원하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남편은 타인에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지만 정작 남편은 아내 몰래 바람을 피우는 등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이다.  파비앵은 나탈리의  위선을  조롱한다.  진보적이며 공동체 생활을 하는 급진적 실천 주의자인 제자 파비앵은  생각과 행동을 일치하려고 평생 노력했다는 나탈리 말을 비판한다. 그날, 나탈리는 실망하고 고양이 판도라를 끌어안고 서럽게 운다. 엄마가 키우던 늙고 뚱뚱한 고양이 '판도라'에 집착하는 나탈리의 모습을  보면  논리적으로 보이는 나탈리가 얼마나 인간적인지 알 수 있다.





판도라가 사라졌을 때 파비앵은 야성이 있으니 걱정 말라고 하고 나탈리는  결국 숲 속에서 죽게 될 거라 걱정한다. 다음 날 돌아온 판도라는 천연덕스럽게 물고 온 들쥐를 나탈리의 신발 속에 내려놓는다. 판도라가 야생에서 살아남는 모습은  나탈리의 미래를 암시한다. 나탈리도 판도라처럼 새롭게 다가오는 변화 앞에 담담하게 적응해 나가야 한다.


영화에서 나탈리가 아이들에게 준 논술 주제가 '타인을 이해할 수 있을까'이다. 영화 시작부터  나탈리가 고민하는 철학적 주제들이 간접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학생들의 학교 폐쇄와 농성 때는 신의 정치에 대한 루소의 <사회계약론> 한 구절을 읽는다.  엄마의 장례식 때는 인생의 상실과 슬픔에 대한 <팡세>의 한 구절을 추모사로 읽는다.


’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건 암흑뿐이다. 자연은 내게 회의와 불안의 씨만 제공한다. 신을 나타내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부정으로 마음을 정할 것이다. 도처에 창조주의 표적을 볼 수 있다면 나는 믿음 속에 안식할 것이다.‘ -팡세-



인간이기에  생활의 자유와 지적 만족이 밀려오는 공허와 슬픔을 상쇄시켜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그녀 역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살아가다 보면  이런 철학적 단상들이   선택을 빠르게 도와줄 수도 있지 않을까?



마지막 강의에서 욕망이 이뤄지는 것을 상상하며 오히려 그 안에서 더 큰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모두가 떠나고 난 삶의 끝에서  그녀는 정신적인 사랑과 풍부한 상상력의 가치를 언급한다.


 

"상상하는 것'을 통해 부재하는 것들을 대체하고

관능적 쾌락을 대신하기 위해 노력한다.



마지막에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저서는 루소의 <심 엘로이즈>이다. 심 엘로이즈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연애소설이 자 8세기 최고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이다. 쥘리는 지난 열정을 회상하지. 생프뢰와 못 이룬 열성을. 그와 함께할 행복을 희망하다가 희망 자체로 행복해진 거야. 꿈을 현실로 대체함으로써 만족할 수 있었으니까. 그녀는 쥘리와 생프레가 이뤄질 수 없는 사랑 속에서 어떻게 더 고결한 행복을 얻게 되었는지를 학생들에게 이야기해 준다. 이뤄질 수 없는 연인들은 즉각적인 충족이 아닌, 욕망을 끊임없이 지연시키는데서  만족감을 얻는다고 언급한다.

  

무엇보다 나탈리의 삶을 뒤흔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녀가 그리워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나탈리는 남편의 외도와 이혼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평범한 일상에서  우는 딸의 아이를 달래며 자연스럽게 살아간다. 하지만 그녀가  못내 그리워하는 것은 남편 소유의 별장에서 함께 보낸 22년간의 소중했던 추억이다. 그녀를 슬프게 한 것은 사라진 것들 중에서  특별한 것이 아니라  소소한 일상이다. 공들여 가꾼 정원과 별장에서의 시간을 그리워하며 그녀는 결국 눈물을 흘린다.





"우리는 행복을 기대한다. 만약 행복이 안 온다면 희망은 지속되며 이 상태는 자체로서 충족된다. 그 근심에서 나온 일종의 쾌락은 현실을 보완하고 더 낫게 만들기도 한다. 원할 게 없는 자에게 화 있으라. 원하던 것을 얻고 나면 덜 기쁜 법. 행복해지기 전까지만 행복할 뿐"



-나탈리가 수업 중에 인용하는 알랭의 '행복론'-



행복이 올 때까지 우리는 기다린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말하고 있다.  계속 만족하지 말고 안주하지 말고 살라는 뜻 같기도 하다. 존재나 역할 책임이 제로인 경우는 없는 법이다. 죽을 때까지 새롭게 나타나는 책임과 역할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이 영화의 주제에 맞는 수업 내용이다.



제자 파비앙이 있던 공동체 마을에서 돌아와 판도라를 들고 혼자 자신의 집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탈리의 모습이 씁쓸하다. 가족을 만드는 일이  인간의 숭고한 임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쉽게 무너지는  모래성들 같은 관계가 너무도 많다. 우리는 결국 혼자  살아야하는 것이 맞는가?  혼자 살 수도 있다는 가정을 언제나 해야할 것 같다. 그것도 인간이 떠들어대는 사랑과 우정이 유한하고      행복을 기다리는 동안만 행복하다는  말도 되새기며  철학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다가오는것들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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