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복제-회색빛으로 단죄하다

《움》(Womb) 리뷰

by 씨네진

“사랑은 복제될 수 있는가? 존재는 복제된 기억 속에서도 진짜일 수 있는가?”


영화 *움(Womb)*은 단순한 SF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그 안에는 감정과 윤리, 존재의 본질을 파고드는 철학적 서사가 숨어 있다. 헝가리 출신 감독 베네덱 플리고프는 이 작품에서 침묵으로 가득한 고립된 세계를 구축하며, 윤리적 물음과 정서적 충격을 조용히, 그러나 깊이 관객에게 던진다. Dealer, Milky Way 등에서 줄곧 인간 존재의 고립, 소외, 반복을 탐구해 온 감독은 Womb에서 가장 미니멀한 방식으로 가장 무거운 질문을 들려준다.


사랑을 복제하는 욕망


레베카는 어린 시절 사랑했던 토마스를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나지만, 재회의 기쁨은 곧 죽음으로 닫힌다. 그녀는 죽은 연인의 DNA를 복제해 아들을 낳고, 다시 ‘토마스’라 이름 붙인다.

이 영화에서 복제는 과학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감정, 더 나아가 상실을 다시 붙들려는 집착의 문제다.

사랑은 아이를 향한 것인가, 아니면 잃어버린 과거를 다시 소유하고자 하는 무의식적 충동인가. 영화는 이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는다. 대신 카메라는 레베카의 고요하고 불투명한 표정을 비추며 되묻는다. 이 사랑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존재의 혼란 — 아들인가, 연인인가


복제된 토마스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정체성의 균열 속에 놓인다. 그는 어릴 적부터 “누군가를 대신하는 존재”로 살아가며, 사회는 그를 감각적으로 타자화한다.

그는 어머니를 사랑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는 존재를 증명하고자 한다. 어머니와의 육체적 접촉을 시도하는 장면은 금기를 넘는 자극이 아니라, “나는 진짜로 존재하는가?”라는 절박한 감각의 외침이다.


회색빛 단죄 — 윤리적 형벌로서의 고립


영화는 레베카를 법이나 도덕의 이름으로 처벌하지 않는다. 대신 철저히 고립시킨다. 바닷가 외딴 오두막, 누구도 없는 풍경 속에서 그녀는 기술과 감정의 선택에 대한 무언의 대가를 치른다.

이 고립은 시각적으로 회색으로 구현된다. 하늘, 바다, 벽, 옷, 표정—모든 것이 물기 어린 회색으로 덮인다. 이 회색은 선도 악도 아닌, 판단이 유예된 상태를 상징한다.

그녀는 흑백의 윤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회색지대에 머문다. 그리고 그 공간은, 마치 프리드리히의 회화 속 인물이 서 있는 언덕과도 같다—홀로, 등지고, 응시한다.


상징으로 말하는 영화 — 자궁, 공룡, 달팽이, 뒷모습


움은 말보다 상징으로 말하는 영화다.

자궁은 생명의 기원이자 반복의 공간이며, 동시에 욕망의 시발점이다. 영화 속 자궁은 생물학적 장기 그 이상으로, 윤리적 질문의 심연이다.

공룡 인형은 생명을 흉내 내는 존재이며, 복제된 자아가 ‘가짜로 살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을 상징한다.

달팽이는 반복, 느림, 껍질 속 존재를 암시한다. 토마스는 껍질 밖으로 나올 수 없는 달팽이처럼, 대체된 존재의 감옥에 갇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주 등장하는 뒷모습들.

레베카의 뒷모습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그녀는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속 인물처럼, 넓고 텅 빈 풍경을 등지고 서 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의 인물이 자연 속 초월과 사유의 고요에 서 있다면, 레베카의 뒷모습은 죄책감과 고립의 풍경 위에 놓여 있다.

그 등은 말보다 많은 것을 말한다. 말을 하지 않기에 더욱 깊다.


성경적 암시 — 쌍둥이와 이름의 의미

이 영화에서 ‘레베카’는 우연한 이름이 아니다. 구약 성경 속 레베가는 쌍둥이 형제인 에서와 야곱을 낳는다.

영화 속에서도 레베카는 두 개의 ‘토마스’를 품는다—복제된 존재, 그리고 새로 잉태된 생명.

또한 ‘토마스(Thomas)’라는 이름은 ‘쌍둥이’라는 뜻과 함께, 부활한 예수를 의심했던 ‘의심하는 도마’의 의미를 함께 지닌다. 영화 속 토마스 역시 자신의 존재를 끝없이 의심하고, 감각을 통해 실재를 확인하려 한다.

이 성경적 구조와 상징은 영화의 철학적 층위를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감정은 윤리를 초월할 수 있는가?


레베카의 선택은 윤리인가, 폭력인가. 영화는 이 질문을 선악의 틀로 판단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는가?”

기술은 중립적이지만, 감정은 언제나 무게를 지닌다. 복제는 죄일 수 있다. 아니, 죄가 아니라 해도, 감정을 감당할 책임이 없다면 사랑은 폭력이 될 수 있다.

움은 이러한 윤리와 감정의 경계를 회색의 세계 속에 풀어놓는다. 관객은 흑백이 아닌 무한한 그레이의 층위에서 침묵 속의 질문과 마주해야 한다.


존재할 수 있는가, 이유 없이


“넌 지금 여기에 있어.” 레베카가 아이에게 속삭이는 이 말은 사랑의 선언이자, 죄의 고백이다.


움은 어떤 질문에도 직접 답하지 않는다. 대신 침묵과 풍경 속에 질문을 남긴다.

복제를 통해 사랑과 윤리, 존재의 뿌리를 되묻는 영화.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설득하고, 침묵으로 말하며, 회색으로 응시하는 작품.

그래서 이 영화는 오래 남는다.

불편하게. 아름답게. 그리고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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