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로스코의 색, 자코메티의 선

-루이비통 미술관2-

by 씨네진


성소로 들어가는 길


거대한 마크 로스코의 성소를 방문하기 위해 우리는 루이 비통 미술관에 마치 배에 오르듯 입장했고, 그곳을 나온 뒤에는 쉽게 일상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로스코의 그림은 여운 그 이상이었고, 그것은 색에 젖어드는 침잠의 시간이자 감정이 스며드는 내면의 공간이었다.


저녁 식사 후 우리는 레드 와인 샤또 라 플뢰르 쁠레장스(Château La Fleur Plaisance – Saint-Émilion) 한 병을 열었고, 프랑스 생떼밀리옹 지방의 메를로 품종으로 만든 이 와인은 부드럽고 따뜻한 자두와 블랙체리 향에 흙내음을 머금고 있었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어지고 조용히 열리는 맛이었다. 마치 로스코의 붉음처럼 잔 속에서 색채가 일렁였고, 누군가 Max Richter의 ‘On the Nature of Daylight’를 틀자 현악기의 잔잔한 울림이 어둠을 가르며 스며들었으며, 그 첫 음부터 마음이 붉게 젖어들었다. 그 음악은 기억과 상실, 희망과 후회를 되돌아보게 하면서 동시에 놓아주는 힘을 가지고 있었고, 마치 오래된 편지 한 장을 펼쳐 읽는 듯한 감정, 말하지 못한 감정의 물결을 조용히 흔들어 깨우는 음악이었다. 그것은 단지 듣는 음악이 아니라, 감정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것이었고, 마치 로스코의 색을 한 모금 마시는 듯한 기분을 남겼다. 와인은 잔잔한 색의 파장을 남기고, 음악은 우리를 감정의 어두운 동굴 속으로 데려갔다.


다시 떠오른 장면들


우리는 다시 미술관의 한 장면으로 돌아갔고, 누군가 “자코메티의 조각, 기억나요? 무너져도 계속 걷는 사람 같았어요.”라고 말하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스코의 색이 무너진 감정이라면, 자코메티의 형상은 그 감정 속에서도 꿋꿋이 걸어가는 인간의 형상이었다. 누군가는 그림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던 관람객을 떠올렸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고, 그 고요 속에서 우리는 같은 파동을 느끼고 있었으며, “그 사람, 말없이 울고 있었죠. 꼭 성당 같았어요.”라고 또 다른 이가 말했다. 그 순간, 예술은 해석이 아니라 감정과 마주하는 다리라는 사실을 실감했고, 말보다 와인 한 잔이, 음악 한 줄이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기억 속에서 조용히 감정을 꺼내고 있었고, 누군가는 유년 시절 잃어버린 붉은 복주머니를 떠올렸다. 잊힌 줄 알았던 감정이 로스코의 색을 통해 다시 살아났고, 로스코는 형태를 지우고 감정만을 남겼으며, 자코메티는 살을 깎아내고 존재의 본질만을 조각했다. 덜어낸다는 건 단순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어지는 일이었고, 그날 밤 식탁 위의 적막은 하나의 언어였으며, 로스코의 그림은 각자의 색으로 존재했다. 와인 한 잔이 그림이 되고, 그림이 마음이 되었고, 우리는 각자의 마음속에 조용히 한 점의 붉은 그림을 품었다.


형상과 색, 두 예술가의 조우


그 밤, 나는 시인 한강의 시 <마크 로스코와 나>를 찾아 낭독했다. 그 시는 단순히 화가를 칭송하는 헌사가 아니라 마음속 깊이 스며든 색, 말없이 전해지는 고통, 아무 말 없이 적시는 침묵의 언어였다. 로스코의 그림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붉은 색이지만, 그 색은 단순히 보이는 색이 아니었고, 선명하거나 화려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흐리고 서서히 가슴 안으로 번져 들어오는 색이었다. 마치 오래된 상처가 천천히 아파오듯, 시인은 “내 실핏줄 속으로 당신 영혼의 피.”라고 썼고, 그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땐 조금 무서운 느낌이 들었지만 곱씹을수록 정확한 표현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로스코의 붉음은 살아 있는 피가 아니라, 지나간 고통, 오래된 기억, 상처 난 감정들이 응고되어 다시 떠오른 흔적이었고,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 앞에 서면 마음이 울리는 그런 색이었다. 그 색은 외치는 소리가 아니라 참으며 꾹꾹 눌러 쓴 마음 같은 색이었고, 그래서 어떤 사람은 울고 또 어떤 사람은 오래도록 그 앞에 앉아 있게 되었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그림, 느끼면 그만인 그림. 그의 그림은 감상자가 완성하며, 누군가는 유년의 기억을, 또 다른 누군가는 이별을 떠올렸고, 그렇게 로스코의 붉음은 각자에게 다른 절정의 시간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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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어냄과 깊어짐의 미학


루이 비통 미술관의 마지막 전시실, 회색 벽면에 걸린 로스코의 그림 앞에서 나는 문득 멈춰 섰고, 그 옆에는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조각 《걷는 사람》이 서 있었다. 이 조합은 의외였지만 의외로 완벽했고, 회색과 검정의 평면이 짓누르는데 색과 형상이 서로 다른 듯 보였지만 그 공간에선 말 없는 울림으로 합주를 하고 있었다. 처음엔 하나는 커다란 색면이고, 다른 하나는 앙상한 인체라서 이해되지 않았지만, 침묵 속에서 둘은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로스코는 붓 대신 스펀지로 그림을 그렸고, 형체를 지운 채 색만 남겼으며, 그 색은 번지고 스며들고, 말없이 가슴을 울렸다. 그는 붉음과 검정, 회색을 사용해 화려함 대신 덜어냄으로 감정을 말했고, 그의 그림은 그림이라기보다 감정의 방이자, 고요한 기도처 같았다. 자코메티는 반대로 형상을 끝까지 붙들었지만, 그가 붙든 형상에는 살도 안정감도 없었고, 인간의 본질만 남은 가느다란 몸은 바람에 흔들릴 듯 위태로웠지만 여전히 앞으로 걷고 있었다. 로스코는 ‘형상’을 덜어냈고, 자코메티는 ‘무게’를 덜어냈으며, 그 텅빈 공간에 우리는 오히려 더 많은 감정을 쏟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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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덜어내고 무엇을 붙들 것인가


절제는 공허가 아니었고, 오히려 우리 안에 남은 것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로스코는 색으로 고통을 그렸고, 자코메티는 형태로 고독을 세웠으며, 표현 방식은 달랐지만 그들이 던지는 질문은 같았다. “당신은 무엇을 덜어내고, 무엇을 끝까지 붙들며 살아가고 있습니까?”라는 그 질문은 깊게 마음속에서 울렸고, 그것은 예술의 질문이자 삶의 질문이었다.


파리 루이 비통 미술관에서 로스코의 작품들을 시대별로 마주할 수 있었다는 건 내게 정말 큰 행운이었다. 그날 본 그림들은 아마 평생 내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이고, 오래된 친구처럼 곁을 지켜줄 것이다. 이제 나는 예술을 굳이 말로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작품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림 앞에서 멈추고, 울고,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 감정이 시작되는 그 순간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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