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의 혼인 잔치>앞에서
멈춘 시간

루브르 박물관1

by 씨네진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를 묻는 장소


루브르는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이기보다, 나의 인식을 시험하는 장소에 가까웠다. 그곳에서 나는 그림을 본다기보다, 내가 알고 있다고 믿어온 것의 범위를 확인했다. 익숙한 작품 앞에서는 안도감이 생겼다. 이름과 시대, 화가를 안다는 사실이 나를 당당하게 했다. 그러나 낯선 화면 앞에 서는 순간, 그 당당함은 쉽게 흔들렸다. 나는 보면서도 설명하지 못했고, 감탄하면서도 근거를 말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루브르를 떠올릴 때 몇몇 상징적인 작품을 먼저 기억한다. 모나리자, 사모트라케의 니케, 밀로의 비너스. 우리는 그 이름과 이미지를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앎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오래 바라본 결과인가, 아니면 반복된 학습의 축적일 뿐인가.


어떤 이에게 루브르는 거대한 캔버스 한 장으로 남는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앞에서 붉은 망토와 황금빛 왕관의 장엄함 속에 권력의 연극성을 읽어내기도 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프랑스 국기를 들고 전진하는 여인의 모습에서 혁명의 열기를 느끼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오래 기억한다. 작품은 각자의 시선과 결합해 서로 다른 의미로 남는다. 그러나 그것이 온전히 ‘나의 감상’이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익숙함은 종종 이해로 오해된다. 많이 보았다는 사실이 깊이 보았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나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알고 있다는 감각’만을 붙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전혀 모르는 작품 앞에 설 때는 오히려 정직해진다. 설명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순간, 시선은 더 오래 머문다. 지식이라는 지름길이 없기 때문이다. 눈은 색을 따라가고, 인물의 손끝과 빛의 방향을 더듬는다. 무지는 불안이지만 동시에 출발점이다. 방대한 전시실을 걸으며 수천 점을 스쳐 지나갔지만, 또렷이 남은 것은 극히 일부였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담을 수 없기에 일부만을 붙든다. 그 선택은 취향이자 선입견이며, 학습된 시선의 결과다. 결국 루브르는 작품의 총합이 아니라, 나의 선택이 남긴 흔적의 총합으로 기억된다.


기적이 일상이 되는 자리, 〈가나의 혼인 잔치〉


모나리자 앞은 늘 붐빈다. 사람들은 사진을 찍고 짧은 감탄을 남긴 뒤 곧 자리를 옮긴다. 그런데 바로 그 뒤편에는 비교적 차분하게 관람객을 기다리는 또 하나의 거대한 그림이 걸려 있다. 가로 10미터에 달하는 화면, 화려한 색채와 분주한 인물들, 음악 소리까지 들려오는 듯한 장면. 베로네세의 〈가나의 혼인 잔치〉다. 나는 그 앞에 오래 머물렀고, 어느 순간 연회 가장자리에 앉은 사람처럼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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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6: 가나의 결혼 잔치, 파올로 베네로세, 1562-1563, 루브르 박물관, 가로 990cm 세로 677cm


이 작품은 요한복음 2장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첫 기적을 행한다. 그러나 베로네세는 이 장면을 경건한 기적의 순간으로 고립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삶의 축제 한가운데에 놓는다. 신성한 사건은 현실의 풍경과 나란히 자리하며, 특별함과 일상이 쉽게 갈라지지 않는 장면을 만든다.


그림에는 130명이 넘는 인물이 등장한다. 예수는 중앙에 앉아 있지만, 모든 시선이 그에게 향하지는 않는다. 귀족들은 담소를 나누고, 하인들은 분주히 음식을 나르며, 악사들은 연주를 이어간다. 이 장면은 성서의 재현이면서 동시에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의 삶을 담은 거대한 무대처럼 펼쳐진다. 예수의 손짓은 분명하지만 과장되지 않는다. 오히려 연회의 활기와 인물들의 움직임이 더 또렷하다. 포도주는 흐르고, 대화는 이어지며, 음악은 화면을 채운다. 기적은 여기서 예외적인 사건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연회 한가운데 놓인 한순간으로 머문다.

이 축제 속에는 실제 역사 인물로 해석되는 이들도 등장한다. 프랑수아 1세와 술레이만 대제로 읽히는 인물들, 그리고 티치아노와 틴토레토로 여겨지는 화가들. 비올라를 연주하는 인물이 바로 이 그림의 화가 파올로 베로네세라는 해석도 있다. 그 사실을 알고 다시 바라보자 화면 속 음악이 한층 또렷해졌다. 관람자는 더 이상 구경꾼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나 역시 그 자리에 함께 앉은 사람처럼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에서 식탁으로 이어진 잔치


그림 속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그 자리에서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각자 마음속으로 루브르에서 데려온 몇 점을 머릿속에 안고, 그 여운을 하루의 끝까지 끌고 가기로 했다. 여행 중이라 손님을 부를 수는 없었지만, 대신 우리 자신에게 은밀하게 초대장을 내밀었다.


미술관을 나설 때까지 머릿속은 묵직했다. 높은 천장 아래를 오래 걸으며 쌓인 피로와 색채의 잔상이 이마 뒤에 남아 있었다. 동네 마켓의 자동문이 열리자 차가운 냉장 코너의 바람, 과일 진열대에서 올라오는 단내, 갓 들어온 채소의 흙내가 뒤섞여 코끝을 스쳤다. 우리는 닭 두 마리와 큼직한 감자, 흙이 묻은 당근, 색색의 파프리카를 골랐다. 와인 한 병을 장바구니에 눕히는 순간, 오늘의 무거운 앎의 체면이 확 사라졌다,

주방은 벌써 음식 냄새로 가득했다. 우유에 잠시 몸을 담갔던 닭은 잡내가 빠진 채 희고 부드러운 살결을 드러냈다. 간장과 고추장이 섞이며 짙은 붉은빛을 띠었고, 그 안으로 감자와 당근, 양파가 천천히 잠겼다. 양념은 끓는 숨을 내쉬며 채소 사이로 스며들었다. 국물이 졸아들수록 향은 깊어졌고, 매콤한 기운이 혀끝을 먼저 깨웠다. 마지막으로 초록 피망과 빨강 파프리카를 넣자 색이 번쩍 살아났다. 불을 줄이고 뚜껑을 덮는 순간, 주방은 달콤하고 매콤한 김으로 가득 찼다. 창문을 조금 열자 그 향이 골목 쪽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식탁 위에는 넓은 접시에 오늘의 메인 요리가 여왕처럼 앉아 있다. 젓가락으로 살을 가르자 결이 부드럽게 흩어졌고, 감자는 혀에 닿자마자 포슬포슬하게 부서졌다. 매콤함 뒤로 은은한 단맛이 따라왔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시니 혀에 남아 있던 양념의 열기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우리는 아침 10시부터 저녁 5시까지 이어진 루브르의 하루를 되짚었다. 그림 앞에서 오래 서 있을 때 느꼈던 다리의 묵직함, 수많은 시선 사이에서 작품과 단둘이 마주하던 고요, 무심히 지나쳤다가 설명을 읽고 다시 돌아섰던 순간들. 알고 보니 전혀 다른 표정으로 다가왔던 장면들이 식탁 위로 하나씩 올라왔다. 말이 이어질수록 기억은 더 또렷해졌다. 예술은 단순히 ‘보는 일’이 아니라, 몸으로 견디며 ‘머무는 일’에 가까웠다. 오래 바라볼수록 색은 더 깊어지고, 붓질의 결은 손끝에 닿을 듯 선명해졌다. 루브르는 마치 속삭이듯 말했다.


“다시 오세요.”

예술은 한 번의 방문으로 닫히지 않는다. 익숙함과 낯섦 사이를 오가며 우리는 조금씩 가까워진다. 그림 이야기를 나누며 따뜻한 식사를 이어 갔다. 그렇게 눈과 코와 혀로 완성한 작은 잔치였다. 그날의 루브르는 식탁 위에서 다시 한번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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