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속에서 깨어난 영혼의 이성

— 루브르 고대 조각관

by 씨네진

감각의 포화, 몸의 호출


수많은 그림과 조각 사이를 걷다 보니 감각이 먼저 지쳤다. 눈은 더 보려 했지만 몸은 그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 허기는 한참 뒤에야 올라왔다. 시각이 앞서고 육체가 뒤늦게 신호를 보내는 순간, 감각의 균형이 흐트러졌다. 루브르 1층 카페는 파리 골목의 여유와는 거리가 멀었다. 직원은 눈을 맞추지 않은 채 주문을 받았고, 진열장에서 꺼낸 바게트 샌드위치를 건넸다. 이곳은 잠시 휴식 공간이라기보다 한 끼 때우는 페스트 푸드점에 가까웠다.


바게트를 베어 물자 겉의 단단함과 속의 부드러움이 입맛을 돋구었다. 햄과 치즈는 차가웠지만 쫀득한 식감과 풍미가 오래 남았다. 커피는 금세 식어 쌉싸름해졌으나 고소한 향은 여전히 코끝에 머물렀다. 단출한 한 끼가 흩어진 감각을 다시 모았다. 작품을 소비하듯 스쳐 지나던 흐름이 멈추고, 비로소 제대로 바라볼 힘을 되찾았다.


그 한 끼는 루브르 복도에서 바게트를 서둘러 먹던 이십 대의 가난한 여행자를 떠올리게 했다. 처음 루브르를 찾았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은 카페에 나란히 앉아 있는 듯했다. 그 시절에는 유명한 작품들을 쫓아 정신없이 전시실을 오갔다. 지금도 또렷하게 남아 있는 것은 코가 잘려 나간 조각상들이다. 처음에는 세월이 남긴 흔적이라 여겼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 거친 자국은 영혼의 숨을 끊어 우상을 지우려 했던 역사의 흔적이었다. 그 조각상에 대한 궁금증이 오래도록 이어지는 것을 보니, 이번 여행은 훗날 어떤 장면으로 내 안에 남게 될지 문득 궁금해졌다.


잠든 몸, 흔들리는 경계


점심을 마치고 조각관을 걷다 한 작품 앞에서 발길이 멈췄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평온하게 잠든 여인의 등과 몸의 곡선이 먼저 들어온다. 매끄러운 대리석 위로 시간의 자국이 내려앉아 있고, 인물은 하얀 쿠션에 몸을 기댄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다.


그러나 그 평온은 곧 낯선 당혹으로 바뀐다. 푹신해 보이던 쿠션 역시 차가운 대리석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인식의 바탕이 흔들린다. 가장자리는 자연스럽게 부풀어 있고, 몸이 닿은 자리는 지그시 꺼져 있다. 천의 미세한 주름과 결까지 정교하게 새겨진 모습은 단단한 돌이 부드러움을 연기하는 듯하다. 현실과 재현의 경계가 어긋나는 장면이다.


조각의 뒤편으로 돌아서면 또 다른 반전이 드러난다. 여성의 몸이라 믿었던 형상에 남성의 성기가 나타난다. 작품의 이름은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 이미 알고 있는 작품이지만, 마주하는 순간 여전히 낯설고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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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7: 헤르마프로디토스(Hermaphroditos), 기원전 2세기, 루브르 박물관


이 조각의 원형은 기원전 2세기 헬레니즘 그리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늘날 루브르에 있는 것은 서기 2세기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대리석 복제품이며, 작가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우리가 감탄하며 바라본 매트리스는 1620년경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덧붙인 것이다. 헬레니즘의 조형 감각과 로마의 복제 문화, 그리고 바로크의 감각적 개입이 한 몸 위에 겹겹이 쌓여 있다.


돌로 빚은 푹신함 위에 성별의 긴장이 겹친다. ‘아름답다’는 단어는 이 작품 앞에서 충분하지 않다. 감각과 판단이 동시에 흔들리며 일어나는 감정의 결이 복잡하기 때문이다.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전령의 신 헤르메스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태어난 소년이다. 숲속 샘에서 만난 님프 살마키스는 그와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결국 두 몸은 물속에서 합쳐졌다. 이것은 축복일까, 벌일까. 누군가에게는 사랑이겠지만 다른 이에게는 침입일 수도 있는 이야기가 몸 안에 흐른다.


이 신화는 전설로만 머물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감정이 섞이고, 그로 인해 나의 경계가 흔들리는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이 조각은 ‘남자인가, 여자인가’를 묻지 않는다. 대신 한 몸 안에 무엇이 함께 존재하는지를 보여 준다. 그것은 혼란이라기보다 겹침에 가깝다. 하나의 몸 안에 두 이야기가 함께 살아 있다는 사실. 어쩌면 그것이 인간의 모습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조각 속 인물은 잠들어 있었지만, 나는 그 앞에서 내가 지녀온 기준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마지막으로 본 작품


폐관 시간이 다가오자 우리는 프랑수아 1세의 초상화를 보기 위해 복도를 서둘러 걸었다. 수많은 방과 갈림길을 지나 마침내 왕의 초상 앞에 섰다. 눈빛은 과장되지 않았고, 권위를 과시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절제된 침묵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모피와 장식 뒤로 단단한 의지가 배어 나왔다. 전쟁을 치르면서도 예술을 품었던 군주, 칼과 붓을 함께 쥔 왕. 그 얼굴 앞에서 묻게 된다. 권력은 무엇으로 남는가. 영토인가, 제도인가, 아니면 문화인가. 그의 이름은 전쟁보다 루브르 박물관과 함께 기억된다. 그 그림을 끝으로 우리는 미술관과 작별했다.


잃어버린 휴대폰

전시실 문이 닫히고, 경찰과 경비원이 관람객을 정리하던 무렵 뜻밖의 일이 생겼다. 일행 중 한 명이 전시실 어딘가에 휴대전화를 두고 나왔다는 것이다. 이미 문은 닫혔고, 경비원은 단호했다.


“내일 다시 오세요.”


하지만 다음 날은 휴관일이었다. 루브르의 일정은 우리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이틀 뒤 다시 그 거대한 미술관으로 돌아왔다. 재방문의 이유치고는 썩 낭만적이지 않았다. 명화를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을 찾으러 온 것이었으니까.


직원은 서랍을 열더니 휴대전화 두 대를 꺼내 들었다. 반짝이는 새 기기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이게 당신 건가요?”

순간 머릿속에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가 번쩍 스쳤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직원은 살짝 웃더니 이번에는 우리 일행의 낡은 휴대전화를 들어 보였다.

“그럼 이건요?”

나는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는 씨익 웃으며 기기를 건넸다. 마치 짧은 상황극을 준비해 둔 사람처럼 능숙했다. 그 순간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 우리는 고대 신전에서 판결을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서 있었지만, 결말은 다행히도 유쾌했다.

전화기는 무사히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다음 날이 우리가 파리를 떠나는 날이었다면 어쩔 뻔했을까. 사소한 사건이었지만 오래 남았다. 무엇보다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는 순간에 건네진 그 가벼운 농담이 마음을 붙들었다.


그날 이후, 뜻밖의 곤란한 상황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 직원의 미소를 떠올린다. 금도끼 은도끼처럼 가볍게 웃어 넘길 수 있다면, 인생의 작은 위기도 조금은 부드러워진다는 것을 그가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술관에서 많은 것을 보았고, 동시에 적지 않은 것을 놓쳤다. 다음에 루브르에 온다면 미처 보지 못한 작품을 보러 오리라 생각했는데, 결국 잃어버린 것을 찾으러 돌아온 셈이다. 그곳에서의 마지막 기억은 모나리자도, 사모트라케의 니케도 아니었다. 되찾은 작은 물건 하나, 그리고 그것을 손에 쥐었을 때 밀려오던 안도감이었다.

돌아보면 예술 감상이란 단지 ‘보는 일’에 머물지 않는다. 놓쳤던 생각을 다시 만나고, 내가 누구였는지 확인하는 일에 가깝다. 여행도 그렇다.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길을 잃어야 비로소 가던 길이 또렷해질 때가 있다. 그렇게 헤매고, 돌아보고, 다시 손에 쥐는 순간들. 그 반복의 과정이 여행을 오래 남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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