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의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다

― 에트르타 절벽

by 씨네진


눈 내린 파리에서 출발

파리에 눈이 내렸다. 겨울에도 좀처럼 눈을 보기 힘든 이 도시에서 거의 20년 만에 찾아온 눈이라고 했다. 창문을 여니 도시 전체가 흰빛 속에 잠겨 있었다. 밤새 쌓인 눈이 지붕 위와 발코니 난간을 부드럽게 덮고 있었고, 돌로 깔린 골목길은 희미한 빛을 머금은 채 길게 이어졌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지나가는 사람의 발자국 하나 없는 거리였다. 맞은편 집의 파란 창문이 하얀 눈 속에서 유난히 선명했다. 마치 겨울의 캔버스 위에 남겨진 한 번의 붓질처럼 보였다.


그 순간 익숙한 파리가 낯선 도시처럼 다가왔다. 이 도시에서 눈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여름에만 찾아왔던 파리였기에 겨울의 풍경은 더욱 설레게 다가왔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의 또 다른 표정을 발견한 것처럼 나는 한동안 창가에 서서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날 아침, 우리에게는 낯선 파리의 겨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오늘 우리는 파리를 떠나 약 360킬로미터 떨어진 몽생미셸로 향할 예정이었다. 하루 대부분을 길 위에서 보내야 하는 거리다.자갈과 석판으로 이루어진 파리의 도로는 아름답지만, 눈이 내리면 쉽게 미끄러워진다고 했다. 낭만적인 풍경 뒤에는 늘 작은 불편과 위험이 숨어 있다.눈 덮인 도로, 정해진 약속 시간, 그리고 낯선 동행까지. 여러 생각이 스치며 마음 한편에 불안이 스쳐갔다.


그때 2층 방까지 은은한 닭죽 냄새가 올라왔다. 식탁 위에는 김이 피어오르는 여섯 그릇의 닭죽이 놓였다. 하얀 쌀알 사이로 닭고기와 채소가 단아하게 어우러졌다. 첫 숟가락을 뜨자 따뜻함이 속으로 번졌다. 먼 길을 떠나는 날이라 속 편히 먹으라고 끓인 죽이다. 자극 없이 담백한 맛. 이 닭죽은 식사라기보다, 눈 내린 아침의 걱정과 추위를 먼저 풀어주는 온기였다.

에트르타로 가는 길


오전 6시 30분. 눈은 여전히 흩날렸다. 우리는 도시 외곽의 지하철역에서 예약한 차량을 만났다. 새벽 공기는 서늘하다 못해 음산하게 느껴졌다. 한국인 가이드, 낯선 여행자 한 사람, 그리고 우리 일행이 9인승 밴에 올랐다. 차는 곧장 파리를 빠져나갔다. 곧 출근 시간이 시작된다고 했다. 우리는 여행 중이라 파리가 평일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도시는 서서히 뒤로 밀려났다. 어둠은 천천히 빛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들판 사이로 잎을 모두 떨군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가지 위에는 둥근 덩어리처럼 매달린 겨우살이가 보였다. 온통 흰 눈으로 덮인 풍경 속에서 그 초록만 또렷하게 떠올랐다. 눈 쌓인 들판에서 겨우살이를 보다니, 그것도 노르망디 해변을 향해 달리는 길 위에서라니. 그 순간 가슴이 작게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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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비워진 계절에도 떨어지지 않는 색. 기생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겨우살이는 끝까지 생을 붙들고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아침에 먹은 닭죽이 마음의 긴장을 풀어주었듯, 겨우살이의 초록은 겨울 한가운데에서 묵묵히 제 시간을 버티고 있었다. 차는 그렇게 노르망디의 겨울 풍경 속을 천천히 가로질러 달리고 있었다.


절벽의 문을 마주하다

에트르타에 도착하자 우리는 잠시 말을 잃었다. 바닷가를 따라 늘어선 석회암 절벽은 이미 수없이 보아온 풍경이었다. 미술책과 오르세 미술관에서, 사진 속에서 익히 마주했던 장면이다. 그러나 실제의 에트르타는 그 모든 기억을 단번에 밀어냈다. 화면 속 풍경이 설명에 가까웠다면, 눈앞의 절벽은 감각 그 자체였다.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 해안에 자리한 이 작은 마을은 지도 위에서는 점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 번 다녀오면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19세기 초, 이 고요한 해안은 화가들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외젠 부댕,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 구스타브 쿠르베, 그리고 클로드 모네, 그들은 이 절벽을 단순한 자연의 형상으로 보지 않았다. 빛이 바뀌는 순간, 바다의 색이 달라지는 찰나를 하나의 이야기처럼 읽어냈다. 이곳의 바다는 늘 다른 얼굴로 다가왔고, 빛은 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았다. 오전과 오후, 폭풍 전과 후의 하늘은 전혀 다른 감정을 품었다. 화가들은 그 미묘한 차이를 붙잡으려 했다. 캔버스 위에서 빛은 형태보다 먼저 숨을 쉬었다.

모네가 그린 에트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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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8: 클로드 모네, 〈에트르타 해변 위의 배〉, 1880, 시카고 미술관 소장


이 그림에서 에트르타는 더 이상 장소가 아니다. 한순간의 기분이며, 빛이 남긴 단 한 번의 잔상이다. 모네는 절벽을 그리면서도 절벽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가 붙잡으려 한 대상은 해안의 형태가 아니라, 그 위를 스쳐 지나간 빛의 상태였다.

해가 기울 무렵 하늘은 노란빛과 녹색, 미묘한 황금의 층위로 흔들린다. 색은 분명하지만 경계는 굳지 않는다. 하늘은 바다로 스며들고, 바다는 절벽의 그림자로 되돌아온다. 색은 사물을 나누기보다 서로를 이어 붙인다. 우리는 절벽의 윤곽을 또렷이 보는 대신, 그 주변을 감싸는 빛의 흐름 속에서 절벽을 감각한다.

화면 한쪽의 아치는 어둡지만 무겁지 않다. 그 어둠은 형태를 강조하려는 그림자가 아니라, 빛의 강도를 드러내는 흔적이다. 쿠르베가 바위를 하나의 덩어리로 세웠다면, 모네는 바위를 빛 속에 풀어놓는다. 절벽은 단단히 고정된 자연물이 아니라, 저녁 공기 속에서 서서히 흩어지는 존재처럼 다가온다.

바다 위에 흩어진 작은 배들은 중심이 아니다. 그것들은 리듬이다. 짧고 반복되는 붓질이 수면 위에 박자를 새기고, 물결은 하늘의 색을 받아 다시 부수며 흘려보낸다. 바다는 배경이 아니라, 빛이 시험되고 흔들리는 공간이 된다.


몸으로 풍경을 기억하다

언덕 위에서 우리는 코끼리 바위를 내려다보았다. 분홍, 노랑, 파랑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천천히 바다를 향해 걸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바다로 들어가는 여인들의 의식 같았다. 색색의 외투가 이어졌고, 그 엇갈림은 모네의 색채처럼 부드럽게 번졌다.


약속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같은 리듬으로 움직였다. 형형색색의 스카프가 바람에 날리자 한 손으로 스카프를 붙잡고 음악에 맞춰 걸었다. 마치 물동이를 이고 가는 여인들의 행렬 같았다. 완만한 언덕 위에서 우리의 몸은 화폭 위 색의 점처럼 놓였다. 코끼리 바위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바다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그 장면 속에 스며든 하나의 색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걷던 발걸음이 어느 순간 춤이 되었다. 그날 우리는 에트르타의 언덕에서 춤이 아닌 듯 춤인 듯 춤을 추었다. 음악에 맞춰 걷다가 자연스럽게 몸이 흔들렸고, 걸음은 리듬을 따라 흘렀다. 그것은 기록도 공연도 아니었다. 특별한 제안도, 거창한 의미도 없었다. 아름다운 바다와 절벽 앞에서 몸이 먼저 반응했을 뿐이다.

수많은 화가와 여행자, 파도와 바람을 지켜본 절벽 앞에서 우리의 색과 움직임은 작았다. 우리의 발걸음은 곧 사라졌지만, 그 순간만큼은 또렷하게 기억 속에 남았다. 언덕을 내려와 다시 차에 올랐다. 그날 우리는 하루 종일 다른 장소로 이동하며 새로운 장면들을 만나야 했다.


그러나 몸은 여전히 그 춤으로 에트르타를 기억한다. 지금도 에트르타의 코끼리 바위와 바람, 햇빛, 바람에 날리던 스카프가 함께 떠오른다. 그리고 쿠르베와 모네가 바라보았던 에트르타의 모습도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그날 우리는 눈으로만 그곳을 본 것이 아니었다. 몸으로도 그곳을 지나며 그 장면을 읽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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