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디자인 스튜디오로 살아남기
디자인 스튜디오는 100% 인적 자원으로 굴러간다.
그렇기에 그 중요성에 대해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한 부분이 '디자이너의 역량'.
어떤 디자이너가 함께 하고 있는가에 따라 곧 그 디자인 스튜디오의 역량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디자이너를 채용해야 하는 경우엔 많은 심사숙고를 하게 된다.
어감이나 그 규모적인 면에서 디자인 스튜디오라고 쓰고 있지만 결국 디자인 ‘대행업’이다.
자체적인 디자인이 필요한 것이 아닌 외부 파트너사들이 필요로 하는 디자인을 대신 작업해 주는 일. 보통은 에이전시라는 말이 더 익숙한 분야. 그렇기에 짧은 기간에도 다양하고 밀도 높은 경험을 할 수 있기도 하지만… 이 분야는 정말이지 고달프다.
이 고달픔은 이미 업계에서도 너무나 유명하기에 거듭 말하기 입 아플 정도. 그렇기에 모든 예비 시각 디자이너들은 디자이너로써 꿈을 키우며 인하우스와 에이전시 사이에서 고민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정말 디자인적인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어!’라고 호기롭게 이쪽 분야에 발을 내디뎠다가도 그 매콤함에 화들짝 놀라, 허둥지둥 도망가는 경우도 비일비재. 간혹 트라우마가 깊게 남은 경우에는 디자인 자체에 회의감을 느끼고 디자인을 그만두는 경우도 흔하다.
이런 것을 업계 은어로 ‘갈려 나간다.’라고 표현하던가.
지금의 우리 스튜디오도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여기서 완전히 예외는 아니다.
최대한 그렇게 되지 않도록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마음 쓰고 있지만 현실적인 여건 상 쉽지 않다. 이것은 이 일의 숙명과도 같다고 할 수 있으리라. 아무튼 그렇기 때문에 이 사업을 운영하다 보면 종종 의도치 않게 디자이너 채용 공고를 내야 하는 순간이 숙명처럼 다가온다.
위에서도 말했듯 디자이너는 우리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자산.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채용 시 가장 중요하게 보게 되는 것은 역시나 포트폴리오.
당연하지 않은가. 경력도 보고, 거주지도 보고, 희망연봉도 보고, 대화 시의 태도도 보지만 디자이너에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뭐래도 역시 포트폴리오다.
자, 아무튼 이렇게 디자이너 채용 공고를 내면… 이렇게나 어려운 업계인 것을 알면서도 한 번의 공고에 수십, 많게는 세 자릿수가 넘어가는 지원자들이 몰리기도 한다. 그만큼 대한민국에 쏟아져 나오는 디자이너가 넘쳐난다는 증거이기도 해서 씁쓸하지만… 그중에서 우리와 여건이 맞고, 디자인 결이 맞는 디자이너를 찾아 포트폴리오의 옥석을 가리는 것 또한 생각보다 쉽지 않다.
어쨌거나 그렇게 매년 나는 의도치 않았더라도 수많은 디자이너의 포트폴리오를 보게 된다.
그렇다 보니, 나름대로 포트폴리오를 보는 기준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이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보려 한다. 그리고 이는 역시나 개인적인 기준이기에 다른 인사담당관들 모두가 이와 같은 기준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미리 밝혀 둔다.
1. 포트폴리오의 편집 디자인
엄청 중요하다.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있는 작업물들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있는 작업물 보다 더 중요시 보는 부분이기도 하다. 작업물은 개인작업이 아닌 팀작업이었던 부분이 들어가는 경우도 많으며, 그런 경우 명확한 기여도 체크가 쉽지 않다. 그리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허위 작업물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포트폴리오 자체의 디자인은 늘 해당 디자이너의 기본기를 체크할 수 있는 가장 첫 번째 척도가 된다. 시각 디자인 분야에서 타이포와 편집력은 언제나 모든 작업의 베이스가 되는 기본기다.
2. 디자이너 취향이 편향적으로 드러나는 작업물 구성
포트폴리오는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보다 지원처가 원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간혹 본인의 취향과 스타일만 가득 담은 포트폴리오들이 있는데…
“난 이런 느낌의 디자인을 해요.”
“난 이렇게 감각적이고 개성 있는 디자이너예요.”
하고 본인의 개성을 어필하고 싶은 마음인 것 같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작업물은 한두 개면 충분하다.
디자이너는 작가가 아니다. 특히 디자인 에이전시 혹은 스튜디오라면 더더욱 - 타인의 니즈에 맞는 디자인을 뽑아낼 줄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너무 자기 색이 강한 디자이너는 오히려 마이너스.
고집만 세서 피드백을 받으려 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디자인만 하려는 디자이너로 보이기 십상이다. 당연히 좋게 보일 리 없다. 지원처의 공고문을 잘 살펴보고 그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이 어떤지, 그 회사에 입사하게 된다면 어떤 작업을 주로 하게 될 것인지 잘 살펴보고 그에 맞는 작업물로 구성을 함이 옳다.
3. 불필요한 자기소개나 미사여구
이 부분은 개인적인 취향의 영역일 수도 있음을 먼저 밝힌다.
자, 아무튼 접수된 포트폴리오들을 검토하다 보면… 간혹 포트폴리오와 이력서 혹은 자기소개서가 결합된 형태의 포트폴리오들이 나온다. 최대한 예쁘게 찍은 본인의 사진이 들어가기도 하고, 자신이 다룰 수 있는 디자인 툴에 점수를 매겨 표기하기도 한다. 제목은 또 어떠한가.
꿈꾸는 디자이너 OOO
달보다 별처럼 빛나는 디자이너 OOO
이런 경우 포트폴리오의 내용이 훌륭하다면 굳이 마이너스가 되지는 않지만 좋을 것도 없다.
디자인 취업 학원이나 대학교 졸업반 등에서 포트폴리오를 시킬 때 가르치는 패턴 중 하나 같아, 단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실무 경험이 좀 부족한 친구인가 싶은 마음이 먼저 드는 것이 사실.
실제 필드에서 일하며 많은 디자이너 면접자들을 만나다 보면, 실무에 대한 경험과 작업물이 충분한 경력자의 포트폴리오일수록 점점 이런 미사여구가 사라짐을 느낄 수 있다. 작업물을 보여주고 어필하고 집중시키기도 아까운 지면을 불필요한 정보로 채울 이유가 없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 외에도 디자이너가 실무적인 디자인 툴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것은 기본이다. 툴 활용능력에 점수를 매기는 것도 ‘A+’ 혹은 ‘상’이 디폴트 값이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니까, 굳이 지면을 할애할 필요가 없다. 만약 ‘C’ 혹은 ‘중하’ 이렇게 적혀있다고 하면... 글쎄, 굳이 그 디자이너를 면접자리까지 부를까?
사진도 대면 미팅이나 이력서에서 충분히 확인 가능하다. 굳이 포트폴리오에서 까지 어필할 이유가 없다.
포트폴리오는 그 사람이 어떤 디자인을, 작업을, 얼마만큼, 어떻게 하는지 보고자 하는 것이다. 작업물에 자신이 있다면 담백하게 본인의 디자인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어떤 부분을 어필해서 보여줄 것인지에만 집중하자.
4. 작업물 구성은 꼭 보여줘야 할 것만
자, 이 부분은 오히려 경력이 좀 있는 디자이너들이 종종 하는 실수.
실무를 오래 하다 보면, 이것저것 다양한 작업물들이 넘칠 정도로 생기기도 하는데… 이를 다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다. 당연히 ‘특정 포지션에 대한 작업만 하겠다.’ 혹은 ‘그 분야만 할 줄 안다.’는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라는 것이 아니다.
면접은 괜히 보겠는가. 다양한 작업이 가능하고 열린 태도를 가졌다는 것은 면접 시 충분히 서로 이야기하며 어필할 수 있을 것이다.
포트폴리오에서는 보여줄 것만 보여줄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선택과 집중의 문제다.
할 수 있고, 해본 적 있다고 모든 것을 다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전문성이 떨어지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차라리 본인의 작업물 중 일부를 포함하지 않더라도…
본인이 지원한 포지션에 연관성 있는 작업물 위주로, 그리고 해당 직군에 어필할 수 있는 포인트가 있는 작업물, 완성도가 높은 작업물로 엄선함이 옳다. 그리고 그 작업물에서도 어떤 부분을 어필할 것인지 포인트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 좋다.
5. 장문의 설명글
물론 디자인 결과물만큼이나 기획, 전략, 프로젝트에 대한 맥락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을 한정된 지면에 빽빽하게 욱여넣고, 장문의 글로 작성할 경우…
면접관은 이를 굳이 시간 들여 읽지 않는다. 많을 경우 세 자릿수의 포트폴리오를 검토해야 하는데, 이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다 읽을 여유가 없다.
그러니, 이런 것들은 하나의 프로젝트에 페이지를 조금 더 할애하더라도…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레이아웃과 인포그래피를 사용하여 확실히 어필 포인트를 보여줄 수 있는 구성을 하는 것이 좋다.
6. 디자인 스케치
포트폴리오에 따라 간혹 디자인의 초기 스케치나 러프한 콘셉트 드로잉이 포함되는 경우가 있다.
사실 이런 대부분의 경우 작업물이 부실한 경우 페이지 늘리기, 설득력을 높이기 위한 의도로 넣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스케치의 특성상 언제나 그 완성도가 높기 어렵다.
그래서일까? 그런 스케치컷이 굳이 있어서 플러스요인으로 작용한 경험이 없다.
과정과 내용을 어필하고 싶다면 차라리 기획이나 전략을 보기 좋은 인포그래피로 잘 정리하여 보여주는 것이 좋다. 스케치컷이 '있어' 보이려면 정말 ‘보여주기 위한’ 콘셉트 스케치 이미지 작업이 따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그 정도의 노력을 들여가며 포트폴리오에서 페이지 공간을 할애할 가치가 있는 이미지일까 싶다. 그 노력으로 집중할 수 있는 곳에 집중하자.
이상으로 위에 열거한 내용들만 잘 반영한 포트폴리오라면… 누구라도 시선이 가는 포트폴리오가 되지 않을까 싶다.
사담이지만 1년? 아니, 2년 전쯤의 일이다. 10여 년도 더 전(내가 미대생이던 시절)에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내가 미대 입시미술을 가르쳤던 제자가 오랜만에 연락온 적이 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다 보니, 어느덧 그 녀석이 30이 넘은 나이에 늦깎이 첫 취업을 준비하던 취준생이었던 것. 내게 연락한 용건은 취업을 위한 디자인 포트폴리오에 대해 피드백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약속을 잡고, 오랜만에 밥과 술 한잔을 사주며 봐주게 된 그 녀석의 포트폴리오는 솔직히 처참했다.
참고로 내가 강사고, 그 아이가 학생일 때의 나는 착하고 친절한… 동네 형 같은 강사였다.
그래, 솔직히 그 당시에는 학생이 학원을 그만두게 해서는 안 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림을 아무리 못 그려도 최대한 자신감을 북돋고 ‘열심히 하면 된다! 노력하면 대학 갈 수 있다.’ 했었지만…
나는 차마 이 순간에도 그런 스탠스를 취할 수는 없었다. 그 녀석을 위해서라도.
“OO아, 미안한데 이 포폴로 만약 우리 회사에 지원하면 난 너 안 뽑아.”
독하게 마음먹고 얘기해 줬다.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 조목조목. 하나하나 짚어줄 때마다 급격하게 어두워지던 그 녀석의 표정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아마 내가 강사 때처럼 어깨도 두드려주면서 자존감을 북돋아 주기를 바랐던 모양.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연락이 없었던 것을 보아…
역시 마음에 상처를 받았나 싶다. 씁쓸하지만 후회되지는 않는다.
그저 내 조언에서 무엇 하나라도 건져서 잘 적용했기를 바라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