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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솜 Dec 07. 2019

니체를 조심하며 읽는 법

철학 초보자의 <도덕의 계보학> 해설

철학? 내겐 이해하기 어려운 분야이다. 십 년 동안 독서모임을 해 왔지만, 철학서는 손에 꼽을 정도로 읽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철학은 멋지다. 과학 분야에서 인간이라는 종의 특징 그리고 진화의 기원을 /뜨릴/하며 읽었는데, 비슷한 감탄이 철학에도 있다. 인간을 해석하고 그 기원을 찾는 /뜨릴/. '선과 악', '양심'을 느끼는 인간은 어떤 특질이 있지? 그 개념의 기원은 무엇이지? 등. "그 사람은 선한 사람이야", "넌 양심도 없냐"라며 익숙히 쓰지만, 관련된 인간성과 개념의 시작을 알지 못한다. 이러한 물음과 추적이 철학의 매력이다. 


이번 독서모임에서 읽은, 니체 <도덕의 계보학>도 마찬가지다. 시뻘건 표지에 지루할 것 같은 제목. 배경지식이 없다면 본문을 여러 번 읽는다고 깨닫게 되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도덕'-선과 악, 양심, 금욕을 통한 지향점-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고, 어떤 도덕을 지향해 나갈 것인지 생각하게 한다. 덧붙여 사람들과 읽으며 얻은 결론은 "조심히 읽어야 한다"였다. "히틀러도 감명을 받으며 읽었다"는 말이 이해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책의 매력과 위험성을 함께 나누어 보자. 



사회 병리학 서적 혹은 자기 계발서

사회 병리학은 특정 사회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심신의 질병 그리고 이를 발병시키는 구조에 대한 학문이다. 자기 계발서는 개인이 더 나은 자신이 되기를 돕는 책이다. <도덕의 계보학>은 사회 병리학 서적이자 자기 계발서로도 읽혔다. 그는 당대 유럽인들이 그가 정의하는 '노예의 도덕'으로 인해 고통을 겪고, '약자' 상태에 머물러버린다고 믿었다. 이 문제의 기원은 '기독교적 윤리'에서 찾았다. 그러면서  개개인이 '주인의 도덕' 즉 '강자' 상태로 나아가야 하며, 이는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과정이라 보았다. 



주인-강자의 도덕, 노예-약자의 도덕

거칠게 정리하자면 주인 도덕을 지닌 자는 강자, 노예 도덕을 지닌 자는 약자이다. 이 분류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고통' 그리고 '자유'다. 강자는 고통이 삶의 필연이라고 보기에 피하려고 하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고통의 상태를 덤덤하게 감내한다. 스스로가 옳다는 감정을 바탕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외부의 기준에 갇혀있지 않는 그는 자유롭다. 반면 약자는 고통을 피하려고 하고 자연 상태라고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어떠한 의미라도 부여하려 한다. 그러한 경향이 '기독교적 윤리'를 만들어 냈는데, '신이 내게 주신 고통'이라고 믿으면 견디기 수월해 지기 때문이다.** 또한 스스로에서 우러나오는 긍정적인 감정이 아니라, 외부의 도덕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외부 집단을 '너는 악하다'라고 정의하고 그에 반하는 것을 도덕으로 정한다. 또는, 외부-대개 신-에서 정한 도덕이 있고, 이를 기준으로 발생하는 죄책감, 양심의 가책이 행동의 동기이다. 이들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어딘가에게 던지려고 하며, 주체적인 도덕적 판단을 하지 못한다. 억눌리고 구속된 그는 자유롭지 못하다. 



내가 옳다고 믿으면, 내 맘대로 폭력을 행사해도 되는 건가? 

니체의 강자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니체를 조심히 읽어야 하는 이유다. 그는 인간의 본성이 사회화로 인해 억눌린다고 여겼으며, 인간은 기본적으로 잔인함-혹은 폭력성-을 내포한 종이라고 보았다. 모임에서 의견이 분분했던 지점도 니체가 지향한 인간상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행하는 폭력에 예민한 나는, 인간의 폭력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니체가 자유롭게 풀어주려 한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웠다. '내가 옳다는 감정'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것이 주인의 도덕이라면, 니체의 도덕에서는 옳다고 느끼면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해도 되는 것인가? 또한 1 논문에서 강자의 도덕을 설명하며, '좋음'이란 고귀한 혈통에서 유래했다고 밝히며 그 혈통의 예시로 로마인과 아리아인을 든다. 니체를 잘못 읽는다면, 타인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할 수도 있고 나아가 인종에는 우월함이 있기에 특정 인종에 대한 박해는 지향할만한 것으로 해석 가능하다. 



병든 인간, 약자가 오히려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이러한 불편감은 다른 모임원의 도움으로 해소될 수 있었다.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자는 병든 인간 즉, 약자라는 분석 덕분이었다. 회사 생활을 생각해보면 쉽다. 언어적 정신적 폭력은 '불안 조장 그리고 남 탓'의 형태로 나타난다. "모르겠고 이 일은 네가 해결해서 가져와. 미리 대응했었어야지. 이거 해결 못하면 정말 큰일 난다." 특히 위계질서가 강한 한국 조직에서는, 약자로 '보이는' 서열 낮은 직원에게 이러한 폭력이 가해진다. 하지만 강자로 '보이는' 서열 높은 직원을 살펴보면, 그는 니체의 기준에 약자이다. 그는 스스로가 예상하는 고통을 견뎌내지 못한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벌어질 일에 대한 불안, 걱정 그리고 조직에서의 징벌이 발생한다. 이를 견뎌낼 수 있는 강자의 경우, 필연이라 여기며 덤덤하게 고통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약자의 경우, 이를 피하거나 빠르게 타인에게 전가하려고 한다. 약자 곧 원흉-혹은 악-이라고 정할 사람을 찾고, 그에게 고통을 전가한다. 이러한 해석으로는 니체가 지향하는 강자가 많은 사회라고 할 지라도, 맘대로 폭력을 행사하는 사회가 아닐 수 있다. 



자기를 긍정하되 자유로운 강자로 나아가기

그래서 사회에 도움되는 방향으로 니체의 도덕을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한 모임원의 해석이 와 닿았다. 도덕의 실현과 더 나은 도덕의 권유를 타인에게가 아닌 스스로에게 하기. 이 방향으로 다시 생각하니 반성되는 부분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고통을 미룰 만큼 비겁하진 않았지만, 고통을 '피하기 위해' 많은 시간들을 힘들어했다. 고통 자체로 힘들기보다, 고통을 두려워하고 대비하기 위해 초조해하던 시간들. 니체도 예상했듯이 "인간은 스스로에게 잔인한 유일한 동물"이기도 했다. 어디론가 가지 못하는 고통은 결국 내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 정도 시련에도 괴로워하냐'며 나 자신을 유약하다 다그치곤 했다. 물론 모든 동물이 그렇듯 고통은 피하고 싶은 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더 이상 벌벌 떨고 싶진 않다. "삶에서 고통은 필연"이라는 로마인들의 태도를 받아들이려 하니, 고통을 두려워하던 시간에서 숨통이 트였다. 억압되고 짓눌린 상태보단, 나 스스로 긍정하는 도덕으로 나아가려 하기. 그래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니체의 도덕을 조심히 그리고 도움되는 방향으로 읽는 방법이다. 




*이 글은 니체 <도덕의 계보학>을 가지고 진행한 독서모임 그리고『철학사상』 백승영, 니체 <도덕의 계보>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5, 별책 제5권 제9호)에 도움을 받았다. 


**니체가 기독교 자체를 부정했는지는 이 책을 통해서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기독교적 윤리'를 비판한다. 그가 정의한 기독교적 윤리는 이렇다. 고통을 신에게 넘기려는 태도, 약한 상태를 긍정하고 강한 상태를 오히려-악이라고 정의하며-부정하는 태도. 신이 정해준 가치가 외부에 있고, 이를 지키지 않았을 때 가책을 느끼는 태도. 


***글쓴이는 철학에 밝지 않습니다. 다만, 철학에 대한 관심으로 이 책을 읽었고 조심하며 더 재미있게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작성하였습니다. 부연 설명 환영이나, 지적의 형태는 정중히 사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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