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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쌤 Jun 04. 2019

디지털 표류기

스마트폰 없는 5시간의 세상

월요일 저녁에 듣는 수업이 있어 아이들 저녁을 챙겨주고, 집을 나섰다. 버스 타기 전 대중교통 앱을 확인하려고 스마트폰을 찾았는데, 가방 안에 없네! 집에 가서 가져와도 될 정도의 약간의 여유가 있었으나, 귀찮아서 그냥 가기로 결정. 나는 스스로 인정하는 스마트폰 중독자인데, 앞으로 5시간동안 스마트폰 없이 어떤 일이 벌어지나 살펴보기로 했다.

혹시 비상사태가 벌어지면 연락 가능한 번호는 남편의 것이 유일하다. 1998년부터 알고 있던 번호라서 그렇다. 2000년 이후에 번호를 바꾼 친구, 가족의 번호는 외울 필요도 없고, 외워지지도 않는다. 살짝 긴장되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활자중독이었다. 그림 동화책부터 시작해서 유치원 다닐 때 창비사 전래동화(그림 없는 작은 글씨의)를 시리즈로 읽어댔고, 하루에 읽어 치우는 양이 어마어마했다. 화장실에 읽을 것을 못 가져가게 하면 너무 괴로워하며 대용량 락스의 뒷면에 있는 사용 설명과 주의사항, 샴푸의 성분이라도 읽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화장실에 월간 동아 같은 데서 부록으로 받은 '알기 쉬운 법률 상담' 류의 책이 있었는데, 얼마나 읽었는지 내용을 훤히 외울 정도가 되었다. 친척 어르신들과 부모님이 대화중에 법률 얘기가 나오자 내가 아는 사례를 줄줄 읊어대니 다들 깜짝 놀라며 집안에 영재가 나온 줄 아셨다고..(그 똑똑한 아이는 이제 영원히 만날 수 없다)


이런 습관은 중고등 학교 때 절정에 이르다 대학교와 직장을 거치면서 살짝 수그러 들었으나, 여전히 다른 사람에 비해서 독서량이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문제의 스마트 폰이 나오면서 양상은 달라졌다. 책 한 권 시작하고 끝내는데 방해 요소가 너무 많아졌다. 굳이 피씨 앞에 앉아서 인터넷 접속을 하지 않아도, 누워서도 아이 재우면서도 간편히 모든 정보에 연결되니, 책은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리게  되었다.


 



이제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을 타야 하는데, 목적지가 신촌. 가는 방법이 여러 개의 경우의 수가 있는데, 저번 주에 가지 않은 방법으로 가보기로 했다. 구파발역 출발, 을지로 3가에서 환승, 신촌역에서 내리는 걸로.

어디쯤에서 타야 환승 시 보행구간을 줄이나.. 고민하다 지하철 꼬리 쪽에서 1번칸으로 한참을 이동했다. 하차해서 환승하려니 환승방향은 지하철 꼬리. 대중교통 앱을 이용했으면 이런 바보 같은 짓은 안 했을 터.

이게 다 스마트폰을 두고 와서 그렇다며 투덜댔다.


지하철 안에서도 스마트폰 없으니 멀뚱멀뚱 있다, 숙제로 읽어야 하는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의외로 집중이 잘 되어 꽤 많은 양을 읽게 되었다. 객실 내를 둘러보니 두 세분의 노인분을 제외하고는 전부 스마트폰 삼매경.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굉장히 낯선 일처럼 보였다.


수업 15분 전에 교실에 도착하니 일찍 온 학생들도 다 같이 당연하게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나는 별 수 없이 책상에 앉아 참고 도서를 정독했다. 즐거운 수업(나이 먹어서 공부하니 즐겁다)을 마치고 쉬는 시간에 화장실 한 번 다녀오고 시간이 남으니 다시 정독. 그런데 꽤 진도가 잘 나간다.


수업 중에 선생님이 강의하시는 ppt화면을 수강생들이 카메라로 찍는데 나는 미친 듯이 필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올 때는 교통 앱의 기억을 더듬거려 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데, 버스 안에서 내내 긴장하며 어디서 내려야 하나 고민을 했다. 노선표가 잘 보이지 않으니 갈아타야 하는 곳을 갈팡질팡하다 엉뚱한 곳에 내려 많이 걸었다.  이렇게 오늘 헤맨 시간이 총 15분 정도.

스마트폰이 있었으면 낭비하는 시간이 없었을 텐데.


그럼 우리는 이렇게 편리한 스마트폰으로 아낀 시간을 어디에 쓰고 있나?

나부터 고백하자면 아낀 시간의 20배 이상을 스마트폰에게 바치고 있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나는 얼마나 스마트 해졌나를 생각해보면 코웃음이 나온다. 지난주에 대중교통 앱으로 수업 장소를 검색했더니 다들 1시간 언저리인데, 한 경로만 37분이 나왔다. 나는 스마트하니까 그 경로로 출발했는데, 버스 타고 연신내 하차, 6호선 타고 디지털 미디어시티에서 경의 중앙선으로 환승, 서강대 하차의 코스였다.


난생처음 타보는 경의 중앙선은 유럽 배낭여행의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한글인데도 독일어 같이 방향을 알 수 없었고, 플랫폼 몇 군데를 헤매다 결국 스마트폰은 치우고 주변 사람에게 물어 열차를 탔는데..

그 열차는 주요 역만 하차하는 열차여서 서강대는 패싱! 한 정거장 가서 다시 하차한 후, 한~참을 기다려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경의 중앙선이 그렇게 레어템이라는 것은 앱에서 친절히 알려주지 않는다.


서강대 하차 후에 지도 앱을 켜서 길을 찾는데, 한적하고 조용한 골목에 모텔이 드글드글하다.

옆에 친구라도, 여행가방이라도 있으면 덜 민망했을까? 태생이 길치인 내가 지도 앱을 들고 헤매는데 가도 가도 모텔만 나온다. 모텔촌이 끝나는 지점에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겨우 물어 수업장소에 도착했다.

첫 수업에 5분을 늦은 데다 온몸은 땀으로 범벅. 책상에 앉아서 손수건으로 연신 땀을 닦아내며 호흡을 정리하자니 참 한심했다. 남편에게 물어봤으면 경의 중앙선은 타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애초에 스마트폰이 없었다면 인생을 조금 둘러 헤매다 제자리로 올 수 있는 회복력이 더 좋아졌을 텐데, 이제 원래 속했던 세상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스마트폰 중독에서 벗어나려면 우리 아이들처럼 데이터 용량을 제한하는 요금제를 써야 하나 보다.

그럼 하루 종일 마트에서 프리 와이파이로 좀비처럼 장을 보겠지.


아이들에게 스마트폰 그만 보라는 잔소리도 좀 줄여야겠다. 나는 자격미달이다.


*지난 주에 전주행 기차안에서 이걸 다 읽겠다고 했다가 스마트폰에 밀려 10페이지 정도 읽었다.

어제 스마트폰 없는 버스 안에서 30분 동안 반 이상을 읽었으니 스마트폰은 필요'악'이다.

그런데, 내가 스마트폰을 너무 사랑하는게 문제.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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