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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쌤 Dec 11. 2022

임윤찬, 그 놀라운 집중력과 연주

몇 백년을 살아온 듯한 경험이 연주에 녹아있다

임윤찬. 반 클라이번 콩쿠르 때 보여준 그 놀라운 기량에 실연을 너무나 보고 싶었다. 그 어려운 라흐마니노프 피협은 다른 연주자들의 템포를 훌쩍 뛰어 넘어 괴물 같은 빠르기에 완벽한 해석으로 전 세계인을 사로잡았다.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을 1시간 가량 연주하면서 보여준 집중력은 내 마음을 움직였다. 현란한 테크닉, 유려한 연주... 이런 수식어는 임윤찬의 것이 아니었다. 테크닉은 완벽하고 연주도 좋았지만 그 어린 나이에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주었다. 그의 연주는 하나의 수도 과정 같았다. 듣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경건하게 그의 음악 앞에서 작아지게 하는 놀라운 힘을 갖고 있었다.


2022, 12,10.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 기념 연주회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티켓은 이미 오픈하자마자 매진이 되었고 음악 문외한이 들어도 좋은 연주이니 누구라도 이 연주회는 관심을 가질 만했다.


프로그램은 무대에서 자주 올려지지 않는 곡으로 다음과 같다.

프로그램만 보면 임윤찬이 아니라면 다들 기피했을 공연일 듯 하다.


1. 올랜도 기번스 : 솔즈베리 영주님 - 파반&가야르드

2.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 인벤션과 신포니아 중 15개의 3성 신포니아, 작품 787-801

3. 프란츠 리스트 : 전설 1번, 작품 175: 새들에게 설교하는 성 프란체스코

4. 프란츠 리스트 : 전설 2번, 작품 175: 물 위를 걷는 성 프란체스코

5. 프란츠 리스트 : <순례의 해> 중 두 번째 해 제7곡 '단테를 읽고: 소나타 풍 환상곡'


입장부터 압도적인 박수를 받은 임윤찬은 빠른 걸음으로 들어와 인사를 하고 바로 첫 곡을 연주했고 관객들은 집중하여 바로 박수를 멈췄다.

잊혀진 작곡가 기번스를 끌어낸 사람은 글렌 굴드였고, 이 곡을 21세기에 다시 끌어낸 이는 어린 연주자 임윤찬이다.


https://youtu.be/ZKebG4VjuNU

굴렌 굴드의 연주

건조하고 다소 엄격한 곡을 임윤찬은 가볍고 아름답게 풀어냈고 바흐를 연상시키는 후반의 주제로 자연스럽게 신포니아와 연결했다.


바흐 인벤션을 연습해 본 사람은 이 작곡가가 얼마나 사람을 곤혹스럽게 하는지 안다. 각 성부가 독립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제를 제시하고 모방, 발전하는 것이 한 손에서 다 이루어져야 하므로 그야말로 머리에서는 우주 대혼란이 일어나고 손에서는 쥐가 난다.


아쉽게도 내 좌석은 거리가 가까웠으나 피아노가 건반이 보이지 않는 자리였다. 그래서 더더욱 소리에 집중할 수 있었는데 오른손만 세 개를 갖고 있는 연주자가 연주하는 느낌이었다. 윗 성부의 소리는 당연히 명료했고 내성도 하나하나 살아 있는데 베이스가 아주 정확하게 들리는 연주는 정말 경이로웠다. 15곡 사이사이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면서 감정을 잡은 그의 표정을 보는 것도 연주의 일부였다. 10대 청소년의 그 놀라운 집중력이라니!


https://www.youtube.com/watch?v=AMo-XoSkPxc

임윤찬의 2년 전 연주


2부의 연주를 위해 임윤찬은 단테의 신곡을 읽었다고 한다. 세 곡 모두 기교적으로도 어렵고 내용도 무거운 편.


첫 시작부터 놀라웠는데 임윤찬은 피아노로 오케스트라를 연주했다. 그 맑고 아름다운 새소리는 목관의 높은 음역이었고 이어지는 모든 주제들을 금관, 현악기, 타악기를 혼자 맡아 연주하는 것처럼 묵직하게 연주했다.


세 곡 내내 두 명의 연주자가 두 대의 피아노로 연주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손가락 열 개의 활약은 대단했다.


https://youtu.be/GFjtI3ggpFc?t=2018

2부 세 번째 곡, 프란츠 리스트 : <순례의 해> 중 두 번째 해 제7곡 '단테를 읽고: 소나타 풍 환상곡'


자동으로 기립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고 관객들의 대부분이 기립했다.

화려한 무대에서의 환호와 박수가 익숙하지 않은 듯 쑥스러운 미소를 보였는데 10대 청소년의 풋풋함이 그대로 전해져 괜스레 눈물이 났다.


이어지는 두 곡의 앙코르는 본 공연보다 더 좋았다.

바흐의 시칠리아노를 빌헬름 켐프가 편곡한 버전으로 연주했는데 쇼팽이 바흐를 쳤으면 이렇게 들렸을까. 그 해석이 너무 아름답고 신선했다. 내 손은 이미 손가락 번호도 알고 멜로디도 알고 있지만 내가 치던 그 곡이 아니다. 본능적으로 손가락이 움직이다 멈칫했다. 인생을 몇 번은 살다 환생한 듯한 연주였다.


임윤찬의 연주는 차갑고 냉철하며 과잉이 없지만 듣는 이의 마음에 강렬한 열정의 에너지를 전달한다. 그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이 대단하다. 힘을 빼고 너무나 쉽게 연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 연주를 위해 저 어린 소년이 겪었을 과정이 보인다. 매 순간이 수도자의 길이다.


https://youtu.be/wmRtH0TYkwc

6개월 전 연주


한 시대를 풍미하는 위대한 천재를 만나 그 연주를 듣고 즐길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 우러났다. 이 연주자가 안전하게 성장하며 음악을 확장하는 모습을 오래 지켜보고 싶다.


*표지 사진은 목프로덕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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