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의 준비는 공간에서의 삶으로부터 시작된다
경기민요 소리꾼 이희문. 이제는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져 제법 티켓팅이 힘들다. 큰 공연장에서의 공연도 좋은 자리 잡기 힘이 드는데 이번 공연은 기획을 보자마자 긴장했다.
안국동의 한옥에서 한 달 동안 경기 12 잡가를 네 시간 동안 완창 하는데 관객은 1일 6명뿐! 이 티켓팅이야말로 얼마나 치열할 것인가. 게다가 이 바쁜 예술가가 12월, 공연 성수기에 한 달을 통으로 비워놓고 공연을 한다고? 아마 이런 공연은 다시없을 것이다. 나는 집중을 해서 티켓팅을 했고 성공을 거머쥐었다.
공연 날, 극강의 한파 주의보가 내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희문의 소리를 무려 4시간 동안 지근거리에서 볼 수 있다는데 한 달 전부터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안국동의 아름지기 한옥은 추운 겨울에 걸맞게 아주 예쁘고 고즈넉했다.
이희문은 공연을 위해 이 한옥에서 살고 있다. 객석이 그의 대청 마루이고 무대가 그의 안방이다. 집은 사람이 살아야 윤기가 도는 법. 그는 공연을 위해 아침에 일어나 이불을 개고 방바닥을 손수 쓸고 닦고 크리스마스 트리를 꾸미고 새벽 시장에 나가 꽃을 사 와 공연장인 안방과 대청마루 사이에 꽃꽂이를 하고 그 동네에서 가장 맛있는 떡집을 찾아 떡을 주문해서 관객들에게 대접한다. 공연의 주인공이자 손님을 대접하는 주인장인 셈이다.
공연 시작 30 분 전에 도착해서 한옥이나 구경하려고 했던 나는 반갑게 웃으며 맞아주는 이희문이 너무 반가워서 소리꾼의 목의 피로를 걱정하면서도 말을 끊지 못하고 계속 수다를 떨 수밖에 없었다.
질문은 멈추지 않았고 이런 공연을 기획하고 추진한 그의 설명을 듣고 나니 역시 이희문이라는 감탄이 나왔다.
우리 소리 공연은 원래 이렇게 질펀하게 앉아 연주자도 청중도 듣다 쉬다 하는 것에 그 멋이 있다. 절절 끓는 한옥 안방의 훈기를 느껴보고 그가 앉아서 연주할 보료 아래 발도 녹이고 차도 한 잔 하면서 그렇게 공연 시작을 기다렸다.
민요가 전문 소리꾼도 일반인도 부르는 일상 노래라면 잡가는 전문 소리꾼이 부르는 감상용 독창곡이다.
------18세기 이후 서민 문화가 대두되면서 정가(가곡, 가사, 시조)적인 노래 형식이 깨어지고 보다 인간의 희, 노, 애, 락이 적극적으로 표현되는 노래 양식- 이러한 노래 양식은 노랫말, 곡, 가창법을 모두 포힘 한다-이 만들어져 유행되었는데, 이러한 노래들이 잡가로 불리워졌다. 이러한 잡가라는 뜻의 명칭 사용에는 새로운 음악을 수용하기에 앞서 이를 기존의 음악과 구분 지으려는 양반들이 보수적인 측면이 드러나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를 잡가라는 말 뜻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잡가라는 새로운 음악적 산물의 발전적인 측면을 애써 무시하는 결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소지가 있다.
기존 상식의 틀로 묶을 수 없는 노래들이 잡가였다면 사실 잡가는 이전 음악의 틀을 깨는 새로운 형식의 음악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긍정적 시각이 잡가와 경기12잡가를 올바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경기12잡가: 이춘희, 배연형, 고상희. 예솔> ------
음악은 신분을 가리지 않는데 음악을 향유하는 계층은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일반 서민들도 음악을 듣고 즐기려는 욕구가 강해지니 기존 음악에 속하지 않는 여러 노래들이 잡가라는 형식으로 묶였다.
이희문은 홀로 장구를 치며 12곡의 잡가를 불러주었다. 바쁜 현대인들에게 한옥의 바닥과 벽에서 울리는 공명을 들려주며 억지로라도 휴식을 주고 싶었다는 그 답게, 한 곡이 끝나면 곡에 얽힌 이야기와 본인의 이야기를 들여주었다. 6명의 관객은 서로를 소개하고 4시간을 같이 놀고먹고 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쉬었다.
*현장에서 찍어 온 영상이 있지만 아직 공연 중이라 공개할 수 없어 화질이 좋은 <소춘 향가>로 대체한다. 경기잡가12곡 중 이희문이 가장 아끼는 노래.
선유가, 십장가, 제비가, 적벽가, 소춘향가, 집장가, 형장가, 유산가, 출인가, 평양가, 방물가, 달거리의 12 잡가를 본인이 부르고 싶은 순서로 불러주었고 마지막은 매화타령을 다 같이 부르며 맺었다.
경기잡가 12곡은 사랑이 넘치는 한민족답게 대부분이 사랑 노래다. 그중에 남성적인 적벽가와 절절한 소춘향가를 좋아하는데 이번에 마음에 들어온 <방물가>의 가사를 일부 소개한다.
서방님 정(情) 떼고 정 이별한대도 날 버리고 못 가리라
금일 송군(送君) 임 가는데 백년소첩(百年小妾) 나도 가오
날 다려 날 다려 날 다려 가오 한양낭군님 날 다려가오
나는 죽네 나는 죽네 임자로 하여 나는 죽네
네 무엇을 달라고 하느냐 네 소원을 다 일러라
제일명당(第一明堂) 터를 닦아 고대광실(高臺廣室) 높은 집에
내외분합(內外分閤) 물림퇴며 고불도리 선자(扇子) 추녀를
헝덩그렇게 지어나 주랴
------중략
나는 싫소 나는 싫소 아무것도 나는 싫소
고대광실(高臺廣室)도 나는 싫고 금의옥식(錦衣玉食)도 나는 싫소
원앙충충 걷는 말에 마부담(馬負擔)하여 날 다려가오
한양으로 떠나는 임을 보내기 싫은 여인의 마음과 그 여인을 달래려고 갖은 선물로 마음을 달래려는 정인의 마음이 절절하다.
우리 민요나 잡가나 정가도 사랑타령이 많다. 또 지독하게 절절하다. 이런 집요한 사랑을 요즈음의 시나 노래에서는 보기 힘들다. 대대로 불려 온 우리 노래를 들으며 마음이 사랑으로 충만해진다.
이희문은 스스로 판을 짜는 사람이다. 경기민요, 잡가는 여성 소리꾼이 주가 되어 청(음역)이 높다. 다른 남성 소리꾼들은 그저 그 판에 순응했지만 이희문은 달랐다.
'내가 소리꾼인데 내 청에 맞춰야지, 평생 남의 청에 맞출 수 없지.' 라고 생각한 그는 단체로 활동하는 소리판을 떠나 혼자 판을 새로 짰다. 기존 국악 생태계와 상관없이 혼자 일어설 수 있는 무대를 만들었다.
있는 판을 뒤집고 새로운 판을 만드는 것은 어렵다. 노래만 하기에도 자신을 알리기에도 힘든 우리 음악 판에서 그는 대중적으로도 전통적으로도 인정을 받았다.
그의 투쟁과 한이 담긴 아름다운 잡가를 한옥의 벽과 바닥의 울림으로 들으니 행복함 외에는 다른 감정이 들지 않는다.
4시간을 넘는 단란한 공연은 끝이 났다. 관객 중에 정선 아리랑 이수자가 있어 그의 아리랑도 들었다. 맑고 슬픔이 배인 정선 아리랑은 겨울 한옥과 너무 잘 어울렸다. 익산에서 온 한 관객은 이 공연을 잘 보기 위해 경기12잡가의 가사를 필사해서 완성한 한 권의 노트를 들고 왔다. 그 소리꾼의 그 추종자다.
잠시의 즐거웠던 꿈을 뒤로하고 일터로 돌아와 현실을 마주하지만 12월 한 달간, 서울 한복판에서 코가 찡한 겨울 날씨에 아름다운 한옥에서 매일 4시간씩 이희문의 잡가가 불린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따스해진다.
그 집엔 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