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쌤 Aug 29. 2019

차이코프스키와 함께 했던
스무 살의 여름

어느 위대한 예술가를 회상하며

Tchaikovsky, Piano Trio in A Minor, Op. 50

차이코프스키가 친구인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작곡한 곡. 부제가 '어느 위대한 예술가를 회상하며'이다.  전체 구성이 2악장으로 된 특이한 구성. 1악장이 단조로 시작되어 슬프고 아름다운 선율로 진행됨. 2악장은 장조의 곡으로 주제와 변주로 이어지며 화려하게 진행되다 마지막에 1악장의 주제를 가져와 앞부분과 대비되는 비장함을 부각하며 끝이 난다. 



1995년 4월 동아리 방. 항상 들리던 음악인데 유난히 귀에 꽂힙니다.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트리오였는데, 비장하고 슬픈 멜로디가 딱 제 취향이었지요. 유학 준비 중이던 공대생 선배(첼로)와 아마추어 오케를 취미로 하다 바이올린을 전공하게 된 선배 두 분이 악보를 들여다보며 고민합니다. 

이거 정말 하고 싶은 데, 피아노 칠 사람이 없네...


음악을 듣다 취해, 나도 모르게 그만 '제가 할게요'라는 말이 나와버렸습니다. 그냥 향상 음악회 정도 하나보다, 하고 말이죠. 그런데 일이 제법 커져서 동아리에서 후원도 받으며 단독 콘서트가 되었습니다. 압구정동에 있는 작은 홀도 빌리고, 제법 규모 있는 실내악 연주회의 형식을 갖추게 되었죠. 그래서 거의 한 시간 가까이 되는 이 곡에다 베토벤 피아노 트리오 '대공'까지 얹었습니다. 


설렁설렁 놀면서 연습하려고 했던 저는 너무 부담스러웠습니다. 악보를 보니 더 한숨이 나옵니다. 음표가 어찌나 현란한지 내가 뭘 믿고 덤볐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연주홀은 대관을 마쳤고 포스터와 프로그램도 시안을 제작 중이니 무를 수도 없습니다. 

청첩장 찍어 놓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스무 살에 알아버렸습니다. 


9월에 공연하기로 했으니 넉 달 동안 미친 듯이 연습만 하면 되는데 기말고사 빼면 석 달입니다. 학기 중에도 연습을 했지만 시간이 부족했죠. 방학이 돼서 본격적으로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대학교 가면 예쁘게 입고 다니며 멋진 남자 친구들을 만날 줄 알았지만 현실에서 나는 예쁘지도 않고, 멋진 남자는 내 주변에 없습니다. 

기왕 하기로 한 연주에 집중하기로 합니다. 이게 될까 싶었는데 점점 비슷해집니다. 


거의 합숙 훈련 수준으로 아침 먹고 만나 연습, 점심 먹고 연습, 저녁 먹으며 곡 해석하는 일과를 되풀이합니다. 

합주 연습이 없는 날은 개인 연습을 합니다. 비슷하게 만들어져 가는데, 내 소리가 맘에 안 듭니다. 또 연습합니다. 연주 한 달 전부터는 거의 개인 연습만 하루에 10시간 정도씩 했습니다. 합주는 따로 하고요. 


이렇게 엉덩이 붙이고 연습하면서 어느 날 득음을 한 것 같은 날이 옵니다. 악보를 외우지 않아도 손이 저절로 갑니다. 머릿속에서 악보를 까먹어도 손이 기억하는 단계가 오면 다 되어 가는 겁니다. 

 

그 해 여름도 푹푹 찌는 무더위였습니다. 더운 줄 모르고 연습을 다니며 음악에 취했던 경험이 나를 많이 성장시켰습니다. 연습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걸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시간을 함께한 선배들도 같은 느낌이었을 겁니다. 


다른 곡의 2악장에서 느낄 수 있는 깊은 슬픔을 이 작품에서는 1악장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오랜 된 연주이지만, 이런 거장들 만의 조합으로 만나기 힘든 연주입니다. 눈을 감고 감동을 느껴보세요.



https://youtu.be/ODwqTxvnmzQ


작가의 이전글 악기 연주하고 싶은데, 무슨 악기를 배울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