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영화에서 비취지는 나물의 위상
#씬 1 : 시어머니와 갈등을 겪고 남편의 지지도 받지 못하는 주부. 화를 삭이지 못하고 냉장고에서 나물들을 주르륵 꺼내 신경질적으로 양푼에 담는다. 고추장 듬뿍, 밥 많이, 참기름 휘익 둘러 양껏 비벼 양 볼이 미어지도록 비빔밥을 먹는다. 아까 당했던 시집살이가 억울해 가슴을 쳐가며 먹는다.
#씬 2 : 남자 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우아한 레스토랑에서 조신하게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온 여자. 예쁜 옷을 벗어던지고 츄리닝으로 갈아입은 후 냉장고를 털어 나물과 밥을 야무지게 비빈다. 비싸고 양 적은 음식에 불만을 토로하며 맛있게, 맵게 비빈 밥을 마구 입에 퍼 넣는다.
드라마, 영화에 나오는 나물 비빔밥의 위상은 이렇다. 아무렇게나 배를 채우고 화풀이의 대상이 되는 음식이다.
나도 엄마가 나물을 해주던 시절에는 드라마를 아무 생각 없이 보았다.
결혼해서 주방에서 나물을 다듬고 무치다 보니 나물은 우리가 그저 쉽게 얻는 반찬이 아니었다.
고기나 생선은 소금간만 해서 굽기만 해도 되니 간단하지만 나물은 사서 다듬는 것이 팔할이다.
새댁 시절에 약간 시들한 부추 한 단을 200원에 팔길래 냉큼 사들고 들어왔다.
그때 싱크대 앞에 서서 거짓말 안 하고 세 시간을 다듬었다. 녹아서 눌어붙은 질척이는 부추와 괜찮은 부추를 골라내는 일은 너무 어려웠다. 그때 큰 깨달음을 얻었다. 원재료는 싱싱해야 한다는 것을.
시금치는 참 허무한 요리다. 한 단을 사서 다듬어 놓으면 양이 정말 많은데 이걸 큰 냄비에 살짝 데쳐서 찬물에 헹궈 물기를 꼭 짜면 한 주먹이나 나오려나..
콩나물도, 숙주도 데치고 무치면 부피가 반으로 줄어든다.
더 허무한 나물들은 묵나물 들이다. 말린 고사리, 곤드레, 시래기 등은 물에 하루는 불려서 솥에 부드러워지도록 한 시간은 삶고 그대로 한 나절은 방치하고 나서야 건져서 요리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것을 뻔히 아는데, 나물을 화날 때 대충 때워서 먹는 음식으로 자리 잡게 한 작가들은 집에서 나물을 한 번도 무쳐보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주부가 나물을 화내면서 비벼 먹는다면 그건 굉장히 부지런한 주부일 게다. 그렇게 왕창 비벼 먹고 나면 또 사다 다듬고 무쳐야 하는데 말이지..
싱글 딸내미나 아들이 밖에서 받은 스트레스로 나물을 냉장고에서 주르륵 꺼내 팍팍 비벼먹는다면 나는 그 등짝을 스매싱할 것 같다.
"이것들아, 이 나물 무치려면 얼마나 힘든데 이렇게 많이들 퍼먹어?!!! 적당히 먹어!"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보니 나물이 종류별로 가지런히 놓여있다면 그 나물 장만한 엄마, 남편, 부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라.
그리고, 나물은 천천히 음미하면서 충분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꼭꼭 씹어 먹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