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를 통해 각인된 흘러간 시간들의 기억들
라디오는 내게 큰 위로를 주는 친구였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처음 듣자마자 빠져든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는 그 시그널 뮤직이 흐르면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유행하는 가요를 듣고 또래의 사연도 듣고 가수들의 이야기도 들으며 참 행복했다. 전화 연결도 무수히 시도해봤지만 연결은 신의 영역이라는 것을 안 다음부터는 맘 편히 타인의 인생을 들으며, 음악을 들으며 그렇게 사춘기의 시작을 달랬다.
방학이 되면 낮에 하는 '김기덕의 두 시의 데이트',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들으며 공테이프에 마음에 드는 노래를 무작정 녹음해서 하염없이 들었다. 음반도 귀하고 중학생 용돈으로 구하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동네 레코드 가게에 가면 주인아저씨가 한 곡당 500원을 받고 LP에서 녹음을 해서 테이프 하나를 꽉 채우던 시절이었다. 공테이프 하나 녹음하면 5천 원 가까이해서 오리지널 카세트테이프 한 개 값과 맞먹었지만 좋아하는 곡을 주르륵 연필로 써서 완성품을 받으면 너무 설레었다. 라디오는 이런 음반에 대한 갈증을 채워주는 매체였다.
입시 준비로 힘들지만 친구들과 학교에서 간식 먹고 공부하던 고등학교 시절에도 라디오는 버틸 힘을 주었다.
자율학습 시간에 방송되는 조수미의 실황 연주를 너무 듣고 싶었던 나와 내 친구 두 명은 넓은 자율학습실에 구석에서 이어폰 하나씩 나누어 들으며 그 소리에 감동을 느꼈고, 입퇴장을 반복하던 조수미 씨가 드레스를 밟고 넘어질 뻔한 광경을 사회자가 묘사할 때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렇게 십 대를 흘려보내고 대학에 입학하고 직장을 다니며 하는 일이 바뀌면서 듣는 라디오의 종류는 더 늘어갔다. 아침 출근길에 듣는 '황정민의 FM 대행진'은 발랄하고 통통 튀는 진행으로 출근길을 즐겁게 만들어주었다.
학교 출강, 개인 레슨, 음악 교재 원고를 쓰며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일을 하며 이동 중에 듣는 '두 시의 데이트 윤도현입니다'는 피로를 풀어주는 청량음료 같았다. 박명수가 진행하는 '땡칠이 퀴즈' 꼭지는 너무 웃어서 그 날만을 기다릴 정도였다.
나른한 오후 4시에 듣는 클래식 FM '노래의 날개 위에'는 아무리 바빠도 꼭 챙겨 듣는 프로였다. 좋아하는 가곡, 아리아 등 성악곡 위주로 방송되는 프로인데 일이 겹쳐 못 들으면 그렇게 아쉬울 수 없었다.
수많은 라디오를 들으며 여러 시그널 뮤직이 나를 설레게 했지만 변함없이 지금도 나를 설레게 하는 시그널 뮤직이 있다.
KBS 클래식 FM 93.1에서 밤 10시부터 자정까지 하는 '당신의 밤과 음악'의 시그널뮤직.
고등학생이 되자 본격적으로 입시를 준비하면서 하교 후에는 피아노 연습을 하고 독서실에 와서 화성학, 작곡 숙제를 마치면 학과 공부를 시작했다. 가장 집중이 잘 되는 황금 시간대인 밤 10시에 시작하는 KBS 클래식 FM 93.1의 '당신의 밤과 음악'은 선곡이 좋아 지친 나를 따스하게 안아주었다. 들으며 공부하다 좋아하는 곡이 나오면 오선 악보에 멜로디를 받아 적으며 청음 훈련을 하기도 하고 작곡자와 곡명을 연필로 적어 용돈을 아껴 CD를 사기도 했다. 그때 들은 음악들은 아직도 내 귀에 남아있다.
이 프로그램은 아이를 낳기 전까지 열심히 들었는데 아이가 태어나면서 밤에 아이 재우고 밀린 일들 하느라 듣지 못하고 십여 년이 흘러버렸다. 얼마 전 문뜩 그 시그널 뮤직이 생각나 스마트폰에 앱을 깔고 라디오를 들었다. 밤 10시가 시작되자 그 익숙한 음악이 귀에 흘렀다. 아직 내가 살아있구나, 나는 여전히 음악으로 치유받는 사람이구나..
'당신의 밤과 음악'의 시그널 뮤직은 Bill Douglass 작곡의 'Hymn'이다.
바순으로 연주되는 곡으로 중저음 목관 악기인 바순의 매력을 최대치로 들려주는 아름다운 곡이다.
'당신의 밤과 음악'은 1982년부터 방송을 시작한 장수 프로그램. 이 시그널 뮤직은 언제부터 쓰였는지 알 수 없으나 내가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한 1990년대에는 이 음악이었다. 여러 진행자를 거쳤지만 이미선 아나운서의 진행이 참 편안했다.
당신은 딱 하나 꼽을 인생의 시그널 뮤직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