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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소소함

by Bono





일상의 감정들이 잠이란 여과의 시간을 통해서도 덜어내지 못하고 마음에 고이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멈추지 않는 순례자 시침과 분침의 끊임없는 걸음을 따라 걷는 동안에는 느끼지 못하는 무게들이 어느 날 예기치 못한 순간에 온몸에 달라붙어 버릴 때가 있죠. 그런 날이었어요. 아침부터 꾸물대며 하늘을 덮은 비구름 사이로 누군가의 닦지 못한 눈물 같은 빗방울들이 창가를 덮고, 어린 나무들이 거센 바람에 몸살을 하듯 흔들리는 걸 보고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달라붙은 마음조각들의 무게에 밀려 멈춘 날.


검색을 했죠. 어디에 다녀올 수 있을지 원을 그리고, 그 반경 안에서 소요되는 이동거리와 시간을 가늠하고 달려 나갔어요. 옆자리에 놓인 카메라가 차의 진동에 맞춰 털썩대며 한 번씩 어깨춤을 추었죠. 제자리에서 벗어날수록 하늘이 맑아져 가요. 성주산 고개를 넘으니 한 겹 옷을 벗듯 가벼워진 구름결이 보이고, 서천의 구부러진 산길을 따라 달려 내려가니 막 고개를 내민 잎새를 어루만지는 바람이 잔잔해졌어요. 이런 순간들이 언제나 놀라워요. 떠나보지 않으면 결코 만날 수 없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소소함이 주는 행복이 마음 가득 채워지며 그늘을 밀어내거든요.









한적한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허기가 밀려와요. 네이놈의 힘을 빌려 서천 판교의 한우마을에 들어갔죠. 식당 주차장에 차를 대는데, 제 도착과 동시에 여러 대의 차량이 밀려들어오더군요. 삼삼오오 전투적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니 이 집이 맛집인 게 분명한데, 혼자인 게 뻘쭘해 뒤로 슬쩍 발을 빼게 되더군요. 1인 밥상을 외쳤다가 일하시는 이모님들에게 눈칫밥 먹을까 봐서요. 그 생각을 하다 문득 억울하더라고요. 부러 가슴 쫙 펴고 들어갔죠. 정말 다들 어르신들인 중에 저 혼자 꼬맹이인지라 제게 쏠리는 시선을 양 볼에 딱 붙이고 구석자리를 찾아 잽싸게 앉어요.


정육식당이라 고깃값이 싼 걸 보고 쾌재를 부르며 꽃등심 2인분을 주문했죠. 혼자 와서 2인분을 주문하니, 주문받는 분이 몇 번을 확인해요. 다 먹을 수 있는지가 궁금한 거 같은데 자신 있다는 눈빛으로 어서 내어달라 미소를 지었죠. 준비한 불판 위로 윤기 자르르 흐르는 특 1급 꽃등심이 올려지고, 맛깔스러운 된장찌개가 나오니 저 혼자 잔칫날이 되었죠. 야무지게 쌈도 싸서 신나게 먹는 중에 사방에서 나누시는 말소리가 제게 들려와요.

"혼자 왔네 벼. 어치케 저래 복스럽게도 먹는다냐."

"내가 저런 며느리를 좀 봐야겄는디, 이 씨잘데기 없는 눔은 맨 서울서 여시꼭깽이 같은 것들만 만날라 그려."

"요즘 사람들이 누가 시골 와 살라고 그런다.
서울이 좋지."

"그렇게 맘에 들믄 가서 몇 살이나 묵었냐 물어봐."


한 볼때기 가득 밀어 넣은 쌈이 목에 탁 걸리는 기분을 아시나요.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어 가만히 머금고 있다 드디어 꿀꺽 삼키고 저도 모르게 할머니들이 계신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8개의 눈동자가 아르고스의 눈처럼 미동 없이 저를 보고 계시더군요. 철쭉보다 진한 색감의 점퍼를 입고, 화려한 마스크걸이를 하고 있는 세련된 곱슬머리의 할머니 한 분의 안광의 기세가 특히 강렬했어요. 이 동네 여왕을 제가 알현하고 있는 것만 같았죠. 그 기세에 눌려 저도 모르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리고 정말 번갯불에 살짝 그슬리듯 고기를 구워 먹고 나왔어요.





식당에서 100미터쯤 가면 주민자치센터가 나옵니다. 그곳에서 판교마을 관광안내도 같은 지도를 받아서 나 홀로 투어를 시작했죠. 7개의 판교마을 명소에 비치된 도장을 지도 위에 찍어오면 예쁜 그림엽서 5장을 선물로 준대요. 이런 건 무조건 도전해야죠. 씩씩하게 걷기 시작했어요. 정말 작은 동네예요. 시간이 한가득 묻어있는 건물들을 따라 천천히 거니는데 머리 위에 세월을 이고 있느라 허리가 휘고 등이 굽은 어르신들만 간간이 눈에 띄어요.







동일주조장이라는 2000년도까지 3대에 걸쳐 막걸리를 만들던 공간은 이제 건물의 뼈대만 남았더라고요. 주인들(박성달, 박호성, 박종욱-존칭생략)이 대대로 이 지역에 좋은 일을 많이 하셨대요. 판교중학교 19명의 학생들이 커다란 통학버스로 오가며 여러 가지 다양한 활동들로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는 것도 이 댁에서 학교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덕분이라더군요.







반면에 장미사진관은 1930년대 '동면'(당시 지명)에 살던 11명의 일본인들이 머물던 공간인데, 동면 주민 5515명을 미곡을 빌려주며 쥐락펴락하던 곳이었대요. "텐노 헤이까 반자이(천황폐하 만세)"란 말을 하거나 "고메 구다사이(쌀 좀 주세요)"라는 일본말을 해야만 쌀을 빌려줬다더군요. 광복 후 우시장과 세모시장이 번성할 때는 숙소로 사용되다가 사진관으로 남았 합니다.


유명 맛집으로 알려진 판교수정냉면집은 코 끝을 스치는 메밀면 냄새만 맡고, 판교역과 오래된 극장 등등 거리를 누빕니다. 오래 걸어도 1시간이면 족할 조그만 동네인지라 모든 게 마냥 정겹고 좋았어요. 그렇게 차 세워둔 곳으로 돌아 나오는데, 골목길에서 동네 아저씨께서 불쑥 나오셔서는 저를 불러요.

"거 뒤쥬 봤슈?"

순간 "디져봤슈?"로 잘못 알아들은 전 오싹해졌죠. 디져봤냐구요, 저더러?금? 아님, 언제?

"아, 아뇨. 누... 누구세요?"

"나가 이 동네 사는디 울 엄뉘 디쥬, 그 디쥬 봤냐니께?"


다시 찬찬히 들으니 디쥬라는 말이 자신의 집에 오래된 엄니꺼 '디쥬'가 있으니 그걸 보여주고 싶다 저를 따라오라 부른 거였어요. 갈등을 했죠. 따라가 디쥬를 보는 모험을 하다 무슨 일이 나는 건 아닌가. 머릿속을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미드 CSI 속 장면들이 클로즈업돼서 제 동공에 들어차버렸거든요. 호라시오 반장을 제가 어디 외진 곳 물에 잠겨 백안으로 만날까 봐 살짝 걱정스럽던 차였죠. 그런데 뒷짐 지고 배 내밀고 서서는 왜 빨리 안 오냐며 되려 절 성가셔하는 희한한 표정으로 부르는 바람에 거절을 못하고 쭈뼛대며 따라갔습니다. 이 아저씨 피리 부는 사나이 같아요.



나이 드신 할머니께서 낮은 마루에 앉아 마늘을 까고 계시고, 마당을 지키는 커다란 개는 저를 보고 정말 배를 뒤집고 난리를 치면서 같이 놀자 반가워하더군요. 먼지 가득 쌓인 포장을 벗기고 제게 문제의 '디쥬'를 보여주시는데, 정말로 큰소리로 웃을 뻔했어요. 한때 만석꾼에 가까운 칭호를 받던 외할아버지댁 창고가 놀이터였던 저에게 이 댁의 디쥬는 정말 너무도 작은 나무상자 같았거든요. 그래도 호기롭게 촤악 소리내며 포장을 열어젖힌 아저씨를 위해서 열심히 사진을 찍어댔죠. 조선희 사진작가처럼 멋진 폼을 잡아가면서요.

"서울냥반들은 이런 거 보면 글케 좋아허대. 워뗘유. 쓸 만 혀?"

"네(서울냥반다운 톤으로 상냥하게), 감사해요. 아저씨. 덕분에 이렇게 넉넉한 시골 인심을 느끼고 갑니다."

제 예의 바른 배꼽손 인사에 기분이 좋아지신 아저씨께서 급기야 저를 데리고 동일주조장의 내부와 그 뒤 양조장의 안까지 문을 열어주셔서 들어가 볼 수 있었죠. 붕괴위험이라 쓰여 있는 건물을 문을 박력 있게 열어주시는데, 조마조마했어요.
오는 길에 잘 가라고 건네주신 비타5**을 들고 마실까 말까 끝까지 고민한 세속에 쩌든 저, 분에 넘치는 호의를 입고 돌아왔어요. 넉넉한 시골 인심이 무엇인지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었어요.









판교마을이 조성된 건 문화재청과 지방군청의 공조로 주민들에게 조사를 해서 이 지역에서 문화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는 건물이나 장소등에 대해 선정을 한 뒤 몇 년간의 시범사업으로 마을을 이렇게 리모델링해보자는 마을재생사업의 결과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직, 뼈대만 있는 건물들과 낡은 간판들만 갖고는 본격적인 문화재생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 없기에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오가는 중이래요. 마을 가운데에 놓인 안내소 과장 아저씨와 나눈 담소를 들으니 이곳이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궁금해집니다. 눈 오면 다시 오고 싶어요. 동생과 함께요.


그렇게 다녀온 산책. 께느른하게 달라붙어 있던 마음조각들을 먹을까 말까 고민하며 묵혀 둔 비타 5**과 함께 꿀꺽 삼켜버렸어요. 벽화에 그려져 있던 "학생이 행복한"이란 말이 제가 있는 공간에서도 실현될 수 있게 한번 달려보자 두 주먹 불끈 쥐었는데, 그 두 주먹으로 허공을 가르고 싶어 지는 오후네요. 그래도 다행이에요.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조금 더 생겼으니까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소소함. 그 소소함이 참말 사랑스럽던 날을 기록합니다.



"워때유? 정말 여기 가보고 싶쥬?
디쥬 겁나게 보고 싶쥬? 글쥬?"





https://youtu.be/GhjtRvanFas







#서천판교마을
#음악ㅡ최백호ㅡ바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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