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에서 홍대 라이브버스킹 중이던 윤도현 씨의 노래를 들은 적이 있어요. 금속과 그은 불내음이 느껴지는 이국의 언어로 부르던 노래가 궁금해 찾아봤었죠. 러시아의 영웅이라 불리는 빅토르 최의 "혈액형"이라는 곡이라더군요. 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곡이 있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그냥 지나쳤어요.
얼마 전 러시아 영화 <Leto>를 보게 되었죠. 이 노래를 부른 주인공 빅토르 최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영화입니다.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의 연출로 완성된 이 영화는 71회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한 작품이에요. 감독이 (정부의 반체제인사로 낙인찍혀) 고골센터 공금 횡령혐의로 자택구금이 되어 영화제에 참석하지 못한 것 때문에 이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1년 6개월 동안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고 해요. 우리나라에서는 무사히 정식 개봉을 했더군요.
무대 위에서 유명한 그룹이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극장 안은 어두컴컴하고 무대로만 온통 조명이 집중되어 있죠. 강한 비트의 신나는 음악이 나오는데 그 무대를 지켜보는 이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응시만 하고 있어요. 우리나라 관객들이 외국에서 온 공연자들에게 잊지 못할 감동을 선사해 준다는 떼창은 엄두도 안 나고, 저 심각한 표정만 좀 어떻게 바꾸고 바라봐주면 안 될까 싶을 정도죠. 제가 연주할 때 누가 저를 이런 표정으로 본다면 심장이 쪼그라들아서 플루트에 바람 한 번 제대로 못 넣어볼 거 같단 말이죠. 하지만시간이 조금 흐르자 사람들의 태도가 이해가 되었죠. 음악에 맞춰서 발이라도 까닥거리면서 리듬을 타려고 하면 양복을 입은 이들이 와서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주의를 줘요. 볼 수 있지만 흥이 오르는 건 표시 내지도 말래요. 말도 안 되는 제재와 함께 관객들을 단속하는 그들. 1980년대의 소련의 문화가 이랬다고 합니다.
영화는 거기에서 시작되죠. 1980년대 소비에트 러시아로 서방의 문화가 대거 유입되고, 레드 재플린, 데이비드 보위, 이기팝, 토킹 헤즈등 여러 가수들의 노래가 젊은 층 사이로 빠르게 번지고 있던 81년의
여름, 빅토르 최와 밴드 키노가 결성된 초창기에 그의 음악 멘토 마이크, 마이크의 아내 나타샤 사이의 이야기들이 담겨있어요. 영웅이 된 빅토르 최의 모습이 아닌, 막 세상으로 발을 딛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젊은 날의 그가 있죠. 악기 하나 살 돈이 없어서 그림을 그려서 팔고, 자신이 직접 깎은 목공예품을 친구들에게 선물하고, 시적인 언어들로 노래를 만들어 당원들에게 검사를 받는 중에도 소위 똘끼 충만한 자세로 당당하고 굽힘 없는 날 것의 생생한 에너지가 가득해요.
성공한 뒤에는 러시아 영화 역사상 가장 많은 16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할 정도로 막강한 티켓 파워를 갖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건물 보일러실에서 살면서 정부가 지원해주지 않는 록밴드를 유지하고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 자신의 원래 직업을 유지해야 한다면서 끝까지 일을 했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이 그를 더 사랑했다고 해요. 높은 자존감으로 당당하게 살았던 젊은 그가 좋아요.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흑백화면으로 이어집니다. 뮤직비디오 한 장면을 보고 있거나, 앨범 쟈켓 사진을 열어 제가 그 앨범의 노래들을 플레이버튼 누르고 듣고 있는 것만 같은 독특한 형식의 화면들로 2시간 내내 눈과 귀가 즐거워요. 억눌린 젊음들이 돌파구를 찾아 어둠 속을 뛰어나가는 것만 같은 강렬한 장면도 있어요. 모닥불을 피워놓은 채 하루 내 노래하고 놀던 그들이 어둔 바닷속으로 옷을 벗고 뛰어다는 장면이죠. 불꽃 위를 뛰어넘고, 접신한 사람들처럼 음악에 미쳐 그렇게 바다에서 억눌린 열정들을 폭발시키죠. 눈부셔요. 다듬어지지 않은 군상들이 빚어내는 소리들과 움직임이 모닥불 위 불티가 되어 어둠 속에 부서져 내리죠. 저도 같이 뛰어다니는 상상을 하며 몰입하게 되었죠.
독특한 영상미와 그 시절 음악들에 대한 향수가 있으신 분들이라면 보심 좋을 듯해요. 그리고 새롭게 떠오르는 배우 유태오에 대한(저도 입덕했구먼요) 관심이 많으신 분들도요. 10월의 마지막 날, 제일 많이 듣는 노래 대신 이 영화 어떨까요?
* 같이 듣고 싶은 곡
- 빅토리 최 : 혈액형
#영화Leto #빅토르최혈액형 #유태오태오태오만세
#요즘뭐하세요
*빅토르최가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씨네21 영화기사 첨부>
"1962년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고려인 2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미술학교 시절 우연히 서구 음악을 접하고 밴드를 결성한 그는 1982년 결성한 키노를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서구 문화 유입이 막 이루어지고 자유에 대한 열망이 커지고 있던 당시 펑크록 스타일 음악에 문학적인 감수성이 뛰어난 빅토르 최의 가사는 대중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반전을 노래한 <혈액형>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을 비롯해 자신의 생활과 고민을 바탕으로 한 <신경안정제> <나는 보일러공이 되고 싶어> 등의 대표곡을 남겼다. 배우로도 활발히 활동했다. 특히 <이글라>(1988)가 자국에서 흥행과 함께 독일 뉘른베르크영화제 등에 초청되어 호평받았다. 소련의 영화잡지 <소비에트 스크린>은 빅토르 최를 ‘올해의 배우’로 선정하기도 했다.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그때 빅토르 최는 1990년 8월 휴가차 들른 라트비아공화국 리가에서 자동차 사고로 요절, 타살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팬들이 따라 자살을 시도했고, 다섯 명의 팬이 목숨을 잃었다. 사후 빅토르 재단이 설립되고, 러시아 전역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겨났다. 한국에서도 1990년대 중반 정지영 감독 연출, 신성우 주연으로 빅토르 최의 삶을 다룬 영화를 만들려고 했으나 불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