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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o Nov 04. 2023

멈춤





김수영 시인의 시를 읽는다.

뒤늦게 찾아온 숙취로 무거워진 몸을 바로 세우고 가을볕이 달군 오래된 돌담에 기대 소리 내어 읽으니 입 안으로 밀려들어 온 가을바람이 폐부까지 씻어내 주는 기분이 든다.



어른이 되어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은 부와 명성, 어떤 특정 계층에 도달하는 방법이 아닌 갑작스레 찾아오는 허무에 대처하는 법이 아닐까.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꺼내지 않는 이야기들 사이에서  민낯으로 마주하게 될, 한없이 투명한 백지로 펼쳐져 나를 막아서는 감정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때로는 맞서야 하는지 막막해질 때가 있다.  그런 감정들을 알려주는 것보다 지금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라는 채찍질이 가득 찬 자기 계발서들을 읽고 있으면 숨고 싶은 마음이 든다.



 여전한 걸음으로 묵묵히 걷고 있을 뿐인데 이제 달리라 재촉하니 금까지 걸어온 걸로도 부족한 걸까, 대체 어디까지 가야 하는 걸까? 나를 둘러싼 환경이 변화하는 중이며, 때론 그 속도가 내가 감당이 되지 않을 만큼 빠르다 싶을 때면 한 번씩 오래된 사찰을 찾아 숨는다.



 템플스테이까지는 엄두를 내지 못해도 천천히 경내를 오래 걸으며 눈에 담으면 변화하지 않은 것들로 인해 이런 조급함이 사라지고 다독여진다. 오늘처럼 이런 쉼표가 있어 다행이다.







경내를 걸으며 평소 시인의 어조와는 다른 김수영 시인의 <봄밤>을 떠올리며, 갑작스레 스며드는 삶의 허무와 불안을 잠재우는 이 시간이 참 좋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마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業績을 바라지 마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行路와 비슷한 回轉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人生이여


(이하생략)


     - 합동시집 『平和에의 證言』 (1957)













이토록 눈부시게 아름다운 가을의 한 날을 보내기 전 해야 할 일들이 있기에 더 조바심이 들던 요즘을 잠시 접어 엉덩이 아래 깔고 앉는다. 그냥 그런 똑같은 하루가 간다는 것이 어쩐지 억울하고 두려운 날, 이런 날의 감정들도 층층이 쌓인 돌탑 사이 끼워둔다. 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돌탑이니 숨겨놓으면 안전하겠지 싶다.


 나를 흔들던 바람이 멎길, 내일이라는 시간에 쫓겨 잠 못 들던 밤의 두려움도 사라지길. 지금은 그저 시인의 말처럼 예상하지 못한 삶의 모든 것들에 조금의 당황도 하지 말고 기록하며 흘려보내는 걸 꿈꾼다.























*같이 듣고 싶은 곡


유다빈 밴드- 좋지 아니한가?


https://youtu.be/VgXDw7wQWa8?si=6e88RW8JLSN4NaGu










#마이산

#김수영시인

#봄밤

#다정한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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