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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o Dec 02. 2023

무량한 세상






장님이 해가 뭔지 몰라서 눈이 환한 이에게 해에 대해 물었다. 눈이 환한 이는 해가 쟁반 같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장님은 쟁반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해가 뭔지 감을 잡았다. 이후 종소리를 들으면 그게 해라고 여겼다. 또 다른 눈 환한 이가 말했다. 해의 빛은 촛불과 같다. 그러자 장님은 초를 만져보고 해가 뭔지 감을 잡았다. 이후 피리를 더듬어 보고 그게 해라고 여겼다. 해, 종, 피리는 매우 다른데도 그 장님은 그게 다른 줄 몰랐다.

                                 - 소식, 해의 비유


                 






  누군가에게 조언을 하는 일은 듣는 이에게 생각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동시에 생각의 울타리를 드리우는 일이죠.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삶의 방향성에 관해 어떤 이야기를 할 때면 늘 조심스러워요. 진로에 대한 것들이나 현재 아이가 처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 등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려면 며칠을 고민하게 되죠. 해의 비유에 등장하는 보이는 자가 저이고, 장님이 아이들이란 생각이 들어서요. 물론 반대일 때도 있어요. 제가 보이지 않는 자로 아이들 말을 들을 때도 있거든요.


 수능이 마무리되고, 한 해 농사 마친 추수꾼의 심정으로 여행을 다녀온 뒤 돌아오자마자 불수능 덕에 진로가 엉켜버린 아이들을 상담해 주며 며칠을 고군분투했더니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싶었어요. 예민한 개복치인 저인지라 속도 탈이 나 며칠 죽만 먹었더니 싱싱한 산나물의 향긋하고 고소한 내음이 코 끝에 떠다니더라고요.


 버섯덮밥을 먹고 싶었습니다. 동그란 표고버섯 위에 칼집을 내어 구운 버섯구이도 같이 곁들이고, 찰진 표면이 젓가락과의 접선을 도도하게 거부하여 결국 숟가락으로 귀하게 모셔서 입에 넣어야만 하는 국내산 도토리가루로 정성스레 만든  도토리묵도 생각이 났습니다. 홍콩 다녀온 뒤로 정말 열심히 걸은 덕분에 미식의 도시에서 살이 빠져 돌아온 뒤로 속도 아파서 잘 못 먹고 있었던 터라 머릿속에 동동 떠다니는 광명식당의 메뉴들을 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지더군요.










 부여 외산으로 가는 길, 조그마한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길을 틀면 무량사라고 하는 조그만 절이 나옵니다. 이곳은 통일 신라 시대에 창건된 사찰이죠. 고려 시대에는 대웅전, 극락전, 응진전, 명부전 등의 불전과 30여 동에 달하는 요사(승려들이 거처하는 집) 채와 12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전해져요.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버려 조선 인조 때 진묵 선사가 다시 재건한 곳이에요. 천년사찰이란 말이죠. 무량사 오 층 석탑, 무량사 석등, 소조 아미타여래 삼존 좌상, 미륵불 괘불탱, 삼전패, 동종, 김시습 부도까지 모두 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를 받고 있습니다.



 사찰 앞 광명식당에서 시킨 음식들이 모두 다 욕심나 오래간만에 식탐을 부렸더니 배만 볼록해져서 뒤뚱대는 오리가 된 기분이라 카메라를 들고 산책하듯 무량사로 향합니다. 문화재청에서 관리 중인 이곳은 이제 입장료를 받지 않는대요. 전에 갔을 때 현금이 없어서 차에 있던 동전을 다 털어서 겨우 들어갔던 저인지라 3000원 입장료 없다는 사실에 괜히 기분이 좋아져 폴짝대며 올라갑니다. 음... 공짜 좋아하면 큰일인데 말이죠.



 자주 오는 편인데, 오늘따라 경내의 모습들이 또 다르게 다가옵니다. 부처님의 은은한 미소를 올려다보는데, 늘 보아 온 곳임에도 나는 한 번도 제대로 이곳을 보았다고 말할 수 없겠구나. 문득 이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식의 <해의 비유>에 나오는 장님처럼 말이죠. 어느 날은 이곳만, 어느 날은 저곳만. 제가 보고 싶은 곳들만 보기에 기억의 파편들이 퀼트천처럼 달라져요.











 

 매일 다른 얼굴, 매일 다른 빛, 매일 다른 색의 공간을 단 한 번도 제대로 기록해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무량사의 모든 곳들이 낯설게 느껴졌어요. 사부님의 명복을 기원하는 영가등을 밝힌 명부전도, 사천왕문의 사자들의 눈빛도, 겨울의 입김이 닿아 희게 바랜 목조건물의 색들도 모두 다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정말로는 한 번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세상을 알아본다고 허둥대는 매일의 서툰 저인데 잠시 가만한 위로를 받습니다.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모든 걸 혼자서 다하려고 하지 말라고, 부처님의 미소로 위로받고 돌아옵니다. 이런 날의 쉼표, 같이 나누실래요?









* 같이 듣고 싶은 곡


- 초승 : 새벽섬









#무량사

#광명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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