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눈을 감고 있다. 보리수나무 아래 수많은 갈래로 뻗어 나온 뿌리가 감싼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다.미세하게 열린 눈꺼풀 사이 보이지 않는 눈동자는 어디를 향해 있는지, 극락의 세상인지, 홍진의 세상인지. 홍채가 향하는 곳이 궁금하다. 끊임없이 몰려드는 관광객들 사이, 그들이 일으킨 먼지와 소음으로부터 초연해 보이는 나무뿌리 아래 불상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영화 <더 파더)(2020년)의 주인공 안소니 홉킨스의 텅 빈 눈이 오버랩된다.
플로리앙 젤러라는 작가가 연극과 영화로 제작한 작품으로 2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색상을 받을 정도로 독특한 구성과 연출이 인상적인 영화로 안소니 홉킨스에게 양들의 침묵 이후로 2번째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작품이기도 하다. 그간 가족애와 연민, 신파적 감정이 주를 이루는 치매환자를 다루는 영화들이 주를 이루었다면 이 영화는 안소니 홉킨스, 즉 치매 환자 본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주 시점이 바뀐, 독특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노령의 아버지가 걱정이 된 딸 앤은 아버지와 함께 살기 위해 아버지의 커다란 저택으로 이사를 온다. 독립적이고 품격 있고 고급스러운 취향도 갖고 있는 아버지 안소니, 삶의 시간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기에 유한하고 한정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며 보내야 하는지 늘 고민하는 그는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만들어 온 사람이다. 이제 자신의 일생동안 마련한 아늑하고 아름다운 집에서 편안한 노후를 보내는 일만 남았다 생각이 들던 그때, 그의 일상이 온통 혼란스러워진다.
동일한 역할을 하는 여럿의 사람들이 계속 등장하고, 갑작스레 바뀌는 인테리어와 소품들이 보이며 미래를 고민하는 소녀와 자신이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몰라 혼란스러워하는 안소니의 교차를 통해 혼재된 시간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그의 감정에 점점 몰입하게 만든다. 영화 장면 곳곳에서 멈추거나, 뒤집힌 시계의 이미지들이 계속 등장하고, 시계에 집착하는 안소니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어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공통의 시간들이 그에게만 알 수 없는 기호처럼 보이니 안소니는 초조해지고 난폭해지기 시작한다. 그런 아버지를 옆에서 보살피며 끝까지 사랑으로 인내하고 헌신하는 딸 앤조차 나중에는 그를 결국 요양원으로 모실 수밖에 없게 되는 상황을 보며 치매라는 질병이 인간에게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 절감하게 된다.
영화 속 인상적이었던 장면 중 하나가 아버지를 보러 오는 앤의 모습이 나올 때 그녀의 발걸음을 따라 울려 퍼지는 음악을 두고 안소니가 딸에게 "이 음악, 들리니?"라고 묻는 장면이다. 혼자만 들을 수 있는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음악을 두고 자신이 듣는 걸 알아듣지 못하고 모른 척하는 딸에게 화를 내는 장면이다. 자신만의 세계, 자신만이 아는 기억의 파편들을 붙들고 살아가는 이들이 왜 괴팍해지는지 엿볼 수 있게 만드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본인이 듣고, 보는 걸 타인은 모른 척한다고 생각하기에 성마른 외침으로 똑바로 보라고 다그치게 되는 게 아닐까?
다른 장면은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이다. 시원하게 쏟아져 내려오던 물줄기가 점점 가늘어지다, 방울로 지고, 끝내는 멈춰버리는. 안소니의 머릿속에서 빠져나오는 그의 기억들을 은유한 것만 같아 여운이 길게 남은 장면이다. 우리들의 기억 또한 자의식과는 관계없이 이렇게 순식간에 빠져나가 버릴 수 있는 것이란 걸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 이 영화의 백미라 할 수 있을 장면은 병실에서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고 절망한 채 울음을 터트리는 안소니의 독백 장면이다.
안소니 : 내 잎사귀가 다 지는 것 같아.
간병인 : 잎사귀요? 무슨 잎사귀요?
안소니 : 나뭇가지에 바람인지 비인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도통 모르겠어.
화장지를 들고, 목이 휑한 환자복을 입고 벽에 기대 서서 흐느끼는 그는 깔끔하게 양복을 차려입고자신이 만든 아름다운 성채와 같은 집에서 우아하게 오페라를 감상하던 노신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엄마 잃은 어린아이만 같다. 그런 그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 안고 자신에게 기대게 한 캐서린은 고요하게 안소니를 타이른다. "다 지나갈 거야. 괜찮아, 아가. 아무렇지 않을 거야." 또는 "화창한 날은 오래가지 않아요. 함께 산책이나 해요." 등 차분한 말투로 그를 달래는 모습에서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인간을 구원할 방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스스로 끊임없이 되묻지만 어떤 것도 대답할 수 없는, 확신할 만한 답을 할 수 없는 인간으로의 존엄을 잃어가고 있는 존재를 보여주며 우리가 사는 삶에 대해 되돌아보게 만들던 놀랍도록 아름다운 영화를 지금 보리수나무 아래 잠든 불상 앞에서 되새기며 저만치 앞서 절뚝이며 걸어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태국으로 모시고 여행을 온 내내 컨디션이 좋지 않아 신경질적인 반응과 의욕 없던 모습을 보이던 엄마에게 정말 많이 화가 나 있던 상태였다. 어떻게 준비해 온 여행인데, 이렇게 엄마만 생각하며 매번 화만 내거나 안 한다고 하거나, 싫다고 하시는지 이마에서 뿔이 돋고 있는 순간이었다. 밤마다 숙소 침대에서 시집을 읽거나 사진을 정리하며 돋아난 뿔을 갈아내고 다듬었지만 순식간에 찌를 듯 뿔은 날카롭게 돋아나 나를 한 마리 투우장의 수소처럼 만드는 기분이 들던 때, 보리수나무 아래 불상 앞에서 모든 소란이 잠재워지는 명상을 한 기분이다.
아유타야의 프랑 위로 사라지는 해를 본다. 빛이 희미해지고 모든 것이 어둠에 잠겨드는 저녁이 되니 공평해진다. 서로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도 가려지고, 오로지 형체 하나로 움직이는 또 다른 존재가 된 이들이 서로의 목적지를 향해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다. 그래, 화창한 날은 오래가지 않는다. 엄마에게도 내게도 빛나는 젊음이 지나고 나면 겪어보지 못한 시간 속에 갇혀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조금 더 너그러워지자. 조금 더 여유롭게 숨을 고르자. 조금 더 깊이 바라보자. 사랑이 전해질 가장 좋은 방법은 바라보는 일이라는 걸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