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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o Feb 12. 2024

마밀라피나타파이(Mamihlapinatapai)





 과속방지턱을 급히 넘었다. 다른 생각에 잠겨 있던 터라 늘 오가던 길의 두툼한 주름살을 보지 못한 탓에 출렁이며 튀어 오른 차체와 옆으로 배를 내밀고 엎어진 카메라를 재빨리 진정시킨다. 총구를 겨눈 듯 내게 렌즈로 항의하는 카메라를 한 손으로 달래준다. 조금이나마 짬이 나면 찾게 되는 오천항으로 가는 해안도로길에 차를 멈춘다. 겨울이라 낮아진 조도는 석양이 드리워질 때 드라마틱한 색의 변화는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다. 요 며칠 날씨도 좋지 않았던 터라 희끄무레한 구름결 사이 숨어버린 태양은 밍밍한 노을빛을 살짝 보여주다 까무룩 사라진다.  



 오늘 노을빛은 촬영불가다. 그저 마음과 눈에 바람소리와 새소리만 담아본다. 참 심심한 나의 동네. 소설가 이문구의 <관촌수필>이 있어 위로받는 이곳에서 나는 어떤 내일을 그려가며 살고 있는지,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다 잊어버린 내 목소리를 찾아 바닷가로 숨어든다. 단조로운 수평선 끝에 엎드린 작은 섬들과 노니는 갈매기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풍경을 다르게 만들어주는 석양이 보고 싶었는데 그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내게도 있을지 모를 호기심 유전자가

서서히 바뀌는 계절풍으로 깨어나 내 안에서 발아 중인 듯 몸이 간지럽다. 굼실굼실 가만히 있지 못하고 움직이는 몸과 내 발목을 동여 멘 족쇄의 힘겨루기가 시작된 요즘, 나의 일부를 구성하는데 기초를 제공해 준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있다. 오랜 시간 서로의 삶이 잇닿지 않은 채 지내 온 가족은 타인과 같다. 감정이 배제된 관찰자의 시선은 기억 속의 모습과 달라진 존재를 바라보며 하나라도 변하지 않은 것은 없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불변이란 속성이 허락될 리 없는데도 나는 기어이 같은 점 하나를 찾고 싶어 치밀하게 살폈는지도 모른다.



 잠들어있는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는 나의 눈빛, 잠시 깨어난 혼곤한 중에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 둘의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 일상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말들이 침묵 속에 오고 간다. 지금 우리의 대화를 굳이 명명하자면 '마밀라피나타파이'가 아닐까? 그에게 다가오고 있는 시간의 부피는 뒤틀려 펴지지 않는 손끝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나는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시간을 되돌려 대화라는 걸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무슨 말로 서로를 위로할 수 있을까? 답할 수 없는 질문을 가만히 삼킨다.








 

 수평선의 경계조차 어둠이 몰고 온 점령군에 사로잡혀 빛을 잃는 지금,  눈을 감고 오래전 가보았던 김영갑 사진작가의 작품들을 떠올린다. 1980년대 제주로 내려가 필사적으로 사진을 찍으며 살았던 고집스러운 예술가 김영갑. 삼달리 분교를 사서 갤러리로 꾸미는 공사를 하던 도중 루게릭병에 걸린 걸 알게 되고 절망하던 그는 제주의 하늘과 바람과 구름과 오름을 기록하며 자신의 남은 생을 불태웠다. 그의 에세이에서 본 구절이 떠오른다.







김영갑과 그의 작품들





 
제주도 사람 누구나 알고 있는 제주도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꼭꼭 숨어 있는 속살을 엿보려면 온몸으로 바람을 느끼고 이해해야 한다.

 바람을 이해하지 않고는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만 보고 느낄 뿐이다. 제주의 역사는 바람과 싸워온 투쟁의 역사이기에 눈물과 한숨의 역사다. 바람을 이해하지 않고는 제주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수 없다. 태풍이 지나는 길목을 지키고 있는 한라산은 일 년 내내 바람이 멈추지 않는다.  

 크고 작은 바람은 온갖 생명에게 시련을 안겨준다. 사람들에게도 예외일 수 없다.
                                                 - 김영갑




김영갑 갤러리 전시실 내부






 그 바람이 있어 물결이 일렁이고, 하늘빛이 변하고 구름결이 달라진다. 나무는 굽어져 성장하고, 풀들은 잎을 누일 자리를 찾아 피어난다. 그렇게 살아간다. 바람으로 인해 단 한 번도 같은 풍경이 될 수 없는 제주의 날들을 기록하던 김영갑 자신은 갑작스레 불어닥친 태풍 같은 질병인 루게릭 앞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사진을 찍고 자신이 꿈꾸던 갤러리를 완성한 뒤 생을 마친다. 바람이 불어올 때 그것과 맞서는 삶의 자세를 그를 통해, 그리고 그가 담은 제주의 모습을 통해 생각한다.



 눈앞의 바다를 바라본다. 허물어져가던 집과 같던 한 사람의 육신을 담던 내 눈 안에 아득한 수평선과 어둠에 잠겨드는 작은 섬들이 담긴다. 서늘하게 내려앉던 마음이 희미한 노을빛으로 물든다. 어디로 눕든  부는 바람에 꺾이지 말고 살자, 나도 살아가자. 오늘을.

 












*마밀라피나타파이(Mamihlapinatapai)


칠레 티에라 델 푸에고의 야간족이 쓰는 말. 세계에서 가장 간결한 단어로 기네스 기록에 등재되었다. 2011년에는 <라이프 인데이>라는 컬트영화에 등장해 유명해졌는데 이 단어가 흥미로운 이유가 정확한 번역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대략 '두 사람이 다 바라는 일이지만 둘 중 누구도 본인이 먼저 나서서 하고 싶지는 않아 서로 상대방이 해줬으면 하며 나누는 눈길'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지구상에서 이제는 사라진 야간족의 이 단어가 갖고 있는 복잡 미묘한 함의는 아직도 연구 중이라 한다.










* 같이 듣고 싶은 곡


비틀스 : Black Bird


https://youtu.be/6kMR_5PTn

zQ?si=1TzF_DPWo3mtS4RL











#김영갑갤러리

#바람이부는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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