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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o Mar 22. 2024

틈 새








밤의 고요 속에선 시계의 분침과 시침이 맞물리는 소리까지 들린다. 짤깍, 자물쇠에 꽂힌 열쇠가 깊은 곳 잠금쇠를 건드려 해제되는 것처럼 또렷하게 맞물리는 두 개의 바늘이 자정을 가리키자 웅웅대며 삐삐가 울리기 시작한다. 연달아 들어오는 메시지. 또 시작이다.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숫자들. '444444444444' '1818181818'. 일반 건물에는 부정 탄다며 4층을 알리는 표식도 없건만 며칠째 자정이면 들어오는 4자들의 행진은 이제 무서움을 넘어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게 만든다. 지랄도 풍년이다. 찾아가 손가락이라도 하나 부러뜨려 놓아야 멈추려나. 심증은 있지만 구체적인 물증을 잡을 수 없기에 범인을 특정 지어 놓고도 아무런 대응을 할 수 없는 난 답답함에 애꿎은 삐삐만 이불 위로 던져버렸다. 그냥 웃고 넘겼어야 했을까?



 연쇄적 번호테러는 2주 전부터 시작됐다. 교장실 앞 복도에서 옥상으로 이어지는 계단의 2번째 공간에는 우리들이 사용하지 않는 폐기 처리된, 혹은 될 책상과 의자들이 켜켜이 쌓여있었다. 그 시절 야간자율학습은 반강제였기에 자습을 위해 학교에 얌전히 남아있다 들끓는 청춘의 반항심으로 학교를 탈출하고자 하는 용기를 낸다면. 용자들은 완전범죄를 꿈꾸며 교실에서 자신의 책상과 의자를 빼내 이곳에 몰래 감쳐두곤 했다. 반 전체에서 빈자리 개수로만 결석자를 확인하는 선생님들의 빈틈을 이용한 나름의 성과였다. 그러나 암묵적인 각 반 그날의 탈출숫자 2명을 말도 없이 어겨버린 2반의 녀석 때문에 우리들의 탈출은 막을 내렸고 그 일의 주동자로 발고된 나는 근 한 달간 먼지 가득 쌓였던 이곳을 고양이가 그루밍해도 터럭하나 안 나올 정도로 반짝거리게 닦아야만 했다. 내 청춘의 해빙의 시작이자, 결빙의 시작이기도 한 천국의 계단. 그곳으로 김신영을 불러냈던 그날, 그 밤 12시부터 내 평온은 신경줄을 갉아먹는 삐삐 진동과 함께 깨져버렸다.











 3개월 전 우리와 친해지고 싶다면서 다가온 녀석이 신영이다. 세상 처음 만나는 정갈하게 반찬이 놓인 도시락을 가져와 콩 한쪽도 나눠주는 온정을 보이던 아이에게 나와 지니는 금방 마음문이 열렸다. 예나 지금이나 먹을 것에 약한 나를 제대로 간파한 녀석의 탁월한 선택에 쉽사리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 죽일 놈의 입맛이라니. 사업을 하는 아버지를 둔 녀석은 가끔 그 집으로 나와 지니를 초대했는데 광택이 나는 검은 가죽 소파와 엄청난 크기의 냉장고를 자랑하는 집에서 핑크빛 넘쳐나는 공주방에 앉아 디저트를 먹으며 가십걸 흉내 내듯 놀다 오기도 했다. 칼같이 다려진 흰 교복칼라 위로 드러나던 신영의 포동한 몸체와 우윳빛 살결은 그 집에 사는 그녀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미쉐린 타이어의 살아있는 현신 같던 신영과 모든 것이 풍요롭고 여유로워 발끝에 차여 굴러다니던 신영의 환경. 그동안 내가 살아온 가정환경이 아닌 꿈 꾸던 환경 속의 녀석이 부럽기도 하고, 그런 녀석이 무엇이 좋다고 이렇게 우리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피글렛을 닮은 지니와 그 옆 노란 곰탱이 같은 푸우인 나, 우리 둘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하트 여왕을 닮은 신영과 거리가 멀어 보였는데도 말이다.



 그러는 사이 나와지니 사이에 견고히 형성된 우정에 금이 가는 일이 발생했다. 친구의 주선으로 소개팅을 했던 난 해수욕장에 사는 김종서의 겨울비를 좋아하던 우신선배와 연락을 하기 시작했는데, 겉보기는 좋아 보였으나 두세 번의 전화통화를 통해 대화거리가 마땅히 없는 걸 발견한 뒤로 서로에게 흥미를 잃었다. 재미없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대화가 된다 치면 가차 없이 "끊는다!"하고 수화기를 내려놓는 내게 큰 불만이던 선배가 아침이면 같이 버스를 타고 나오는 내 친구 지니와 이야기를 하며 친해지게 되었단다. 사실 선배 자체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나였지만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신영이 점심시간을 이용해 숙제를 한다며 지니가 일찍 자리를 뜨자


"너 그거 알어? 너 몰래 우신이 오빠랑 지니 연락한대. 그 오빠가 지니가 좋다고 만나자고 했다더라?"라며 속삭인다. 그래서였을까? 요 며칠 나를 피하는 것처럼 모인 자리에서 일찍 일어나던 지니의 모습이 신영의 말끝에 겹쳐진다.


 

 그 나이의 소개팅이란 요즘 애들 말하는 가볍게 썸을 타는 정도는 호기심 가득한 두드림이었기에 만나고 안 만나고에 대해선 어떤 실망도 없었지만, 내 친구인 지니가 내게 말을 하지 않고 만나고 있었다는 자체는 큰 충격이었다. 어제 산 브래지어 색깔에 무늬까지 다 알고 있는 콩알친구가 내게 감추는 것이 생겼다니. 이걸 슬퍼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마치 시집가는 동생을 위해 혼수품을 고르는 엄마 옆에서 훈수를 두는 언니가 된 심정으로 사라진 지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실망한 내 표정을 보았을까? 신영은 그때부터 "내가 말이야, 나한테 말이야, 너는 모르는, 지니가 말이야..." 등등으로 시작하는 온갖 독약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처음 들을 때는 '그럴 리가 없어!'로 도리질을 치며 귀에 쏟아지는 독약을 걷어내지만 반복적으로 덧입혀지는 끈적이는 감정들은 마음에 흔적을 남기고 자기들끼리 응축해 돌기처럼 솟아나 무시로 나를 찌르게 된다. 그때부터는 상대의 의미 없는 행동 하나에도 내 방식대로의 해석이 덧입혀지며 상대의 무의식까지도 내 생각으로 치환해 규정짓게 된다. 점심시간이면 항상 식사 후 잔디밭을 따라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 속 주제들이 점점 겉돌며 어긋나더니 나중에는 그 시간조차 짧아져 흐지부지 사라지게 되었다. 같은 반이 아니었지만 점심과 저녁, 주말 오후 자습 끝나고는 서로 꼭 붙어있으며 과제부터 시작해 모든 것들을 함께 했던 친구가 내게서 서서히 멀어지는 걸 바라보며 가슴 한구석이 슴벅 예리한 칼로 도려내진 것처럼 아파 잠을 자지 못하고 새벽까지 깨어있는 날들이 이어졌다.



 상대에게 용기 내어 당신의 행동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직접 물어볼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완벽한 타인에게는 어떤 일에 대한 부당함이나 옳고 그름을 직접 물어볼 수가 있다. 하지만 심리적 거리감이 사라진 타인은 지인이란 이름이 되고 나를 알고 있다고 믿기에 그가 한 행동은 해석불가의 해소하지 못하는 궁금증만 안겨준다. 지니의 행동을 곱씹으며 멍하니 생각 중일 때 옆에는 신영이 늘 자리했다. 신상펜, 스티커 등등 아기자기한 문구류에 열광하는 내 취향인 물건들을 책상 위 한가득 올려놓고 함께 하자며 다이어리를 펴 밀어대도 손이 움직이질 않는다. 지니와 함께 꾸미던 비밀일기장을 신영과 함께 하는 건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한껏 들떠 내 앞에서 소란스레 이야기 하다 시큰둥한 내 반응에 화가 난 신영이 부산스레 물건들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도 잘 가라는 손짓조차 하기 힘들 만큼 무력감이 생긴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던 나는 토요일 오후, 지니를 불러냈다. 우리들 아지트였던 참새방앗간에 앉아 좋아하는 쫄면을 시켜놓고도 우리는 참을 수 없는 어색함에 젓가락으로 면발을 휘감는 일만 계속하다 동시에 입을 열었다.


 "너, 왜..."

 "정말 니가 그랬...."


참고 있던 숨이 터지듯 말문이 시작되자, 마음속에 있던 묻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서로에게 하기 시작했다. 그간의 행동들, 거리를 두던 모습들의 이유. 하나하나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생각들을 확인하기 시작하자 퍼즐조각이 맞춰지듯 하나의 인물로 모든 이유가 좁혀진다.  













 A라는 사건을 두고 서로가 신영에게 들은 내용을 확인해 보니 역시나 사실과 많이 달랐다. 더군다나 신영이 우리에게 전해준 내용들에는 우리가 평상시 싫어하는 언어나 행동들로 서로를 비방했다는 말들이 있었는데, 서로를 잘 알기에 그런 것들로 나를 욕했다 생각하니 서운함이 배가 되었던 것이다. 하나씩 짜 맞추며 확인해 본 우리는 한참 뒤, 서로를 마주 보며 동시에 외쳤다.

"대체, 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먼저 우리에게 서슴지 않고 다가와 친구가 되었고, 짧은 시간 많은 걸 열어 보이고, 우리에 대해 알고 싶어 하던 신영이었기에 그 아이가  따로 불러내 우리들의 귀에 조금씩 독약을 흘려 넣듯 거짓말을 한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귀한 친구를 다시 찾았다는 안도감은 잠시 우리는 행동의 이유에 대해 묻기 위해 다음날 아침 신영이 있는 반으로 달려갔다. 들끓는 분노와 배신감, 무엇보다 확인해 보지 않았으면 지니를 잃을 뻔했다는 아찔함에 나는 콧김을 뿜으며 신영의 교실 앞문을 열어젖혔다. 미닫이 문이 내 힘에 밀려 벽에 세게 부딪히며 굉음을 내자 반 아이들의 이목이 모두 내게 집중되었다.

"야, 김신영. 나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보던 신영은 곧 뒤이어 도착한 지니의 조그만 얼굴을 보자 얼굴이 굳더니 무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온다. 광나게 닦아놓았던 옥상으로 가는 3층 계단으로 끌고 가는 중 내 귓가에는 황야의 무법자 배경음악이 흘러나온다. 뒤돌아 새총이라도 무표정한 얼굴에 쏘고 싶은 마음에 심장이 두근거린다. 드디어 계단 한구석 우리들의 사실 확인이 시작되었다. 나의 서슬 퍼런 추궁에 신영은 되려 조소를 머금고 삐딱하게 서서 허리춤에 손을 짚더니 머리를 넘긴다. 머리카락만큼은 신의 은총을 비켜가 푸실대는 찐 감자 보푸라기 같은 것이 넘기는 손길이 제법 가소롭게도 우아하다. 그러면서 너는 떠들어라, 나는 들어줄 테니 정도의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니 화가 난 내 목소리는 더 커졌다. 우리들의 언쟁에 점점 아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자고로 넘의 집 싸움 구경만큼 재미난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이들이 많아지자 신영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러는 거니? 나는 너희가 한 말 서로한테 전해준 것 밖에 없어. 내가 뭘 잘못 말했다고 이러는 거니?"

 표준말을 구사하며, 나와 지니를 되려 서로가 없는 자리에서 서로를 욕한 나쁜 것들로 매도해 버리는 말투에 기가 차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장래 인권변호사를 꿈꾸던 나는 가장 서로의 말이 달랐던 쟁점 항목 6가지와 모아둔 증좌들을 열거하며 조목조목 신영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4번째 항목이 시작될 즈음, 차분하던 신영의 얼굴이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래서 어쩔 건데, 나더러 뭐 어쩌라고? 못 믿은 것도 늬들이고, 삐졌던 것도 늬들인데 왜 나한테 화를 내지? 그 알량한 우정이란 게 얼마나 가는지 보려고 했더니 금방 이렇게 찢어질 거면서 큰소리는? 그래놓고 무슨 지들끼리 우정이 최고라고 나를 따돌려?"라고 소리를 친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더니, 자신의 거짓말로 인해 생겨난 오해를 두고 우리가 먼저 서로를 믿지 못한 잘못이라며 되려 화를 내는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나는 차분하게 숨을 고르고 물었다.

"친구라며, 친구 하고 싶다며. 이게 네가 말하는 친구야? 서로 헐뜯고 의심하게 만드는 게? 그래서 너만 의지하고 바라보는 게 너한테는 친구야? 네 밥이지?"

"야, 나 입맛 고급이야. 너네가 무슨 내 밥 따위나 될 줄 알아? 취향도 안 맞는데 놀아주니 진짜 친구인 줄 아는가 봐? 재수 없어."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하찮다는 듯 내 얼굴 앞에 손을 휘젓는 신영의 몸짓에 화가 폭발한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따귀를 때렸다. 손바닥에 닿는 둔탁한 충격에 내 손목이 끊어질 듯 아팠다. 처음이었다. 순수하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증오로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한 일은. 신영이 우리를 기만한 행위가 단순히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갖고 놀기 위한 장난감이었다는 사실에 치밀어 오른 분노와 이런 알량한 장난 따위에 그간의 우리 우정이 흔들릴 뻔했다는 극심한 분노가 나도 모르게 손을 뻗게 만들었다. 우리를 둘러싼 아이들은 갑작스레 벌어진 폭력사태에 놀라 입을 틀어막고 눈이 커진 채 사태를 관망하는데, 하필 아침자습 순찰을 돌던 학생부장 선생님께 이 장면을 들키고 말았다.


 고개가 돌아간 채 푸실대는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신영과 분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나, 앞뒤사정 따지지 않고 현장범으로 체포된 나는 또 지루한 묵언수행의 날들을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날밤부터 내 삐삐는 12시 정각만 되면 증오가 가득 담긴 숫자들의 행렬에 몸살을 하는 중이다. 철저히 무관심으로 신영을 대하는 중이지만, 저렇게 온몸으로 울어대는 삐삐를 보면 찾아가 또 한 번 때려주고 싶다는 순수한 적의가 생겨난다.










 자신이 좀 더 남에게 특별한 존재이고 싶어서,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 거짓말로 관계를 만들어낸다는 것이 어른들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우리들에게 그런 행동을 한 신영의 별다를 바 없는 일상의 표정들이 소름 끼쳤다. 그저 자신의 재미로 그런 일들을 계획했다는데 그 머릿속 어디에 사특한 생각들이 숨어있었을까? 웃으며 우리에게 다가오던 얼굴 어디에도 묻어있지 않던 어둠이 신영을 볼 때마다 어디 있다 나온 건지 찾아보게 된다. 졸업을 하며 사용하던 삐삐를 처분하기 전까지 이어지던 문자. 그렇게 신영과의 짧은 우정은 졸업과 함께 잊혔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어떤 무리에서 특별한 의미 없이 다른 사람의 험담을 하거나 '너한테만 알려주는 건데, 그거 알아?'라며 내게 다가와 귓속말을 하는 이들을 보면 그때의 신영이 떠오른다. 천진한 거짓말에 며칠을 앓던 어린 내 모습도 그 옆에 같이 떠오르며 경계하며 발을 뒤로 물리게 된다. 소녀여서, 어린아이어서 가능했던 일이었을까? 그녀라는 인간의 본성이었을까? 지금 그녀는 어느 틈새에서 사람들 마음에 크레바스를 만들고 있을까? 그리고 그렇게 만든 틈새에서 어떤 미소를 짓고 있을까?










 








#장줄리앙23년경주전시

#여전히,거기






* 같이 듣고 싶은 곡


 Filling of You : 조용필


https://youtu.be/VzVig1HuAY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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