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일리가 없다. 당신일 수가 없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인지의 영역 너머 일들은 변수가 되어 우리를 습격할 때가 있기에 잠시 혼란스러워진 나는 친구추천란에 뜬 당신의 이름을 보고 숨이 막힌다. 멈춰진 호흡 사이 물결이 흐르듯 기억이 스쳐간다. 조각보처럼 잇대지는 얼굴들이 형체를 갖추더니 마침내 당신의 얼굴로 눈앞에 떠오른다. 음울하게, 조금은 수줍은 듯. 이가 드러나지 않게 웃던 얼굴이 나를 본다. 시간은 어떤 특정한 인상에 의해 물리적 흐름을 무시한 채 연결이 되기도 한다. 1년이란 시간, 공백이 화면창의 이름 하나로 사라져 버린다. 분침과 시침의 꾸준한 교차가 만들어 낸 당신을 잊기 위한 나의 시간들이 덧없어지는 순간이다. 잊기보다 묻어두기 위한 방편이었는지 묻게 된다. 한참을 바라보던 당신의 이름, 창을 닫는다. 까맣게 변해버린 화면 너머 당신이 있을 지금의 자리를 떠올린다.
1년 만에 찾은 사찰을 고요한 정적에 쌓여있다. 독경을 하는 주지스님의 목소리도 잠시 멈춘 경내는 바람만이 마당을 비질하며 졸고 있는 수선화를 재바르게 깨운다. 잠기운 묻어나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노란빛 꽃잎을 바라보다 당신의 명패가 걸려있는 명부전 앞으로 다가간다. 1년만 이곳에 봉안하기로 약속했다. 갑작스레 떠난 영혼이 방황하는 시간, 홀로 걷는 걸음을 밝히는 등이 있다면 자신이 갈 곳을 쉽게 찾아갈 수 있을 거란 막연한 생각에 걸어 둔 순백의 영가등이었다. 영가등 명패에 당신의 이름을 적는다는 건 기이한 경험이었다. 나의 부탁으로 정성을 다해 이름을 적어가던 스님의 손끝이 떠오른다. 한글자라도 달리 적을까 천천히 느릿하게 내리긋던 붓끝으로 이름이 완성되어 갈 때 나는 그만하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이름이 완성되면 정말 당신은 이 세상에 없는, 다른 세상으로의 이주를 준비하고 있는 외로운 영혼이 될 것만 같아 몇 번이고 입 밖으로 터져 나올 것 같던 외침을 삼키고 또 삼켰다.
그날 이후 영가등이 걸린 명부전을 나는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다. 새벽의 문자에 답을 하지 않은 나에 대한 징벌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둠의 밀도가 높아 잠을 이루지 못했던 밤. 밀려왔다 제각각의 형태로 흩어지는 활자들을 멍하니 응시하며 있던 시간 당신은 왜 나에게 문자를 했을까?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예민한 촉수를 가진 채 살아가야 하는 당신의 숙명에 대한 동경에서 시작한 바라봄이 시간이 지날수록 지루해졌다. 숙명이란 이름으로 스스로 끌어안는 아픔들과 때로는 걷어낼 수 있는 슬픔들을 그대로 끌어안고 상념에 잠긴 당신의 글이 더 이상 읽고 싶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 치열하게 쏟아지던 당신의 기록들을 바라보는 내 시선의 온도를 당신은 알고 있으면서도 어린아이처럼 내게 보내고 또 보냈다. 그 날 당신의 문자는 모든 포장을 걷어 낸 한마디였다. '자고 있어?' 혼잡하게 흩어지는 문자들 사이 한 줄의 물음을 바라보다 나는 침묵을 택했다. 밤의 밀도는 높았고, 이런 날의 대화는 과잉된 감정들로 혼란스러운 아침만이 남기에 보고도 나는 모른척했다. 그 시간까지 깨어있을 나라는 걸 알고 있는 당신이 보낸 문자였다. 답이 없는 나, 읽지 않은 표식을 보고 당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참이 지나서 한 나의 답에 다시는 답이 오지 않을 걸 알았다면 전화를 걸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후회는 그저 시간이 지났기에 가능한 핑계일지도 모른다. 다양한 가능성을 되짚으며 하지 않은 나의 행동에 대한 자기기만의 변명들을 열거하며 마음의 위로들로, 가령 어쩔 수 없었잖아 식의 변명들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속죄의 시간인지도.
명부전 앞 나무 둥치 아래 앉는다. 내가 즐겨 찾는 공간이라니 어느 날 이곳을 찾아 말없이 머물다 간다며 보냈던 그날의 사진 속 당신처럼 앉아본다. 가만히 눈을 감는다. 바람이 바뀐다. 계절의 흐름이 달라진다. 활주로를 향해 하강하는 비행기 날개의 소음 같은 바람이 나를 흔든다. 나는 포카라의 좁은 산길을 걷고 있다. 오른편으로 눈 덮인 설산, 마차푸차레의 흰 빛이 하늘을 물들이고 밀크티를 마시며 손 흔드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걷고 있다. 숨이 가빠오는 고도는 다른 세상을 허락한다.
나는 더 느려지고, 약해지고, 그리고 슬퍼진다. 당신의 부재로 혼자 걷고 있는 이 길이 만든 소실점을 바라보며 걷는다. 페와 호수의 푸른빛 위에 조그만 쪽배를 띄워 쓰다만 문장들은 종이배로 호수 위에 띄워 보내고 있을 당신이 보인다. 나와 다른 시간대의 당신과 영원히 동행할 수 없다는 걸 깨달으며 걷는 순간이다. 비로소 당신의 부재가 인식이 아닌 마음으로 스며드는 지금. 나는 오래 눈을 감고 있다. 부재를 증명하는 공전은 언제 끝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