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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o Apr 13. 2024

수피를 타고 흐르는 건







 눈앞의 물병을 바라본다. 물 1리터에 우유 5방울을 떨어뜨린 것 같은 미세한 탁함 사이 고로쇠나무 수액이라 적힌 겉 라벨을 보인다. 이 한통을 채우기 위해 끝이 날카로운 출수용 쐐기를 나무 곳곳에 박는 모습이 연상되어 몸이 살짝 떨린다. 친애하는 고여사께서 친히 내게 하사하신 물이다. 오다 주웠다며 한병 던지시는걸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갑작스러운 하사품에 무슨 일이냐 물었더니 내가 질색하는 걸 알기에 함부로 내 사주를 본다거나 하는 일은 하지 않는 엄마께서 점을 보고 오셨다 한다. 사주만으로 천기를 풀어낸다는 용한 그이가 내 상태를 말해주기를 '물 오른 나무처럼 크게 자라 그늘 아래 다른 사람도 쉬게 해 주고, 나눠주며 살아가는 운명인데 여기저기 몰려와 나무를 찍어대는 도끼로 인해 물기 하나 없이 말라 있'단다. 잘 먹이고 성가신 일이 없게 해 주라고 했다는데, 잘 먹이는 1번이 고로쇠나무 수액일 줄이야. 현금플렉스를 넌지시 말해 보았으나 돌아오는건 먼저 열어 한모금 마신 뒤 돌려주는 고로쇠 물병. 엄마표 나물반찬이 내게는 더 효과가 있을 텐데. 물릴 수 없는 선물이 눈 앞에서 배를 내민다.



 병 표면에 동글동글 매달린 이슬방울을 손가락으로 문지른다. 미세한 진동이 물결의 색을 만든다. 문득 롤랑바르트의 말이 떠오른다.


언어는 피부다. 나는 내 언어를 다른 언어와 문지른다. 그것은 마치 내게 손가락 대신 말이 있는 게 아니라, 내 말들 끝에 손가락이 있는 것과 같다.








 침묵 속에서 피부로 느껴보는 서늘함 사이, 손 끝에서 나무의 말이 들리는 기분이다. 고로쇠나무를 비롯한 단풍나에는 150여 종의 나무가 속해있다고 한다. 겨우내 웅크려있던 몸을 일으켜 봄이 오기도 전에 마른 줄기 사이로 물을 끌어올리는 부지런한 나무들의 활동이 아직 눈 덮인 산을 깨우는 신호탄이 된다. 밤중에 기온이 내려가 나무 몸 안쪽에서 수축활동이 일어나면 나무뿌리가 땅 속에 있는 수분을 힘껏 흡수해 줄기 안으로 끌어올리는데, 밤에는 물을 끌어올리고 낮에는 햇볕을 받아 나무는 스스로 체온을 유지한다. 그때 나무줄기 안에서 수분과 이산화탄소가 급격하게 팽창해 나무의 수피가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갈라지고 그 사이로 수액이 흘러나오게 된다. 2월 중순부터 3월 중순까지 경칩 전후의 일주일이 장 좋은 수액을 채취할 수 있는데, 당도 2.5 브릭스(brix)의 밍밍한 이 물이 골리수라고 불리며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찾는 귀한 건강식품이 된 것이다.



 수액을 오래 먹을 수 있게 변형한 것이 바로 메이플시럽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은 설탕단풍나무에서 수액을 얻어 그것으로 시럽과 설탕을 만들었는데 당시 설탕을 수입해 오지 않아 단촐하고 밍밍한 맛의 식탁풍경을 바꿔준 것이 바로 이 설탕단풍나무의 수액과 사과한다. 1880년대까지 많은 이들이 영국이 식민지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해서 만드는 설탕 대신 설탕단풍나무의 수액이 그들의 입맛을 윤택하게 만들어 주었다. 다만 수액의 체취가 극성이던 때 나무의 나이테를 살펴본 식물학자들이 나무 자체의 성장이 감소했다는 걸 언급하며 인간의 이기로 인해 성장을 멈추다시피 한 나무의 피해를 떠올려본다.



 나게 수액은 열매와 나뭇가지, 잎과 꽃, 나무의 수피와 새로 움틀 눈의 양분이다. 줄기 안에 고여 드는 수액이 겨우내 활동을 멈추었던 나무가 다시 살아 움직이게 만들고,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이러한 물의 흐름이 진정한 봄을 부르는 소리가 된다. 빛깔메이플이라 불리기도 하는 고로쇠나무에게 수액 정도는 온전히 내주어도 내 몸의 수분은 충분하지 않을까? 피부에 와닿은 물방울을 문지른다. 이슬이 내게 스며든다.







 참다못해 터져 버린 수피에서 흐르는 수액이 한참을 문지르니 누군가의 눈물로 번져온다. 성장이 멈추어버린 나무의 나이테처럼 정지된 시간을 끊임없이 복기하며 살아가는 이들. 그들에게 꽃의 달이 찾아왔다. 프랑스혁명력에 따르면 4월은 프리메르, 꽃의 달이다. 모든 생명들이 분주히 깨어나 자신들의 생을 피워내는 시간이다. 나는 꽃의 달에 산화철로 뒤덮인 붉은 선채를 등에 업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수피를 떠올린다. 세치 혀로 찍힌 수피들 사이 흘러나오는 수액을 두 손으로 막아본다. 손등을 타고 흘러나와 내 입술에 닿는 그들의 슬픔은 통점을 가늠하기 힘들다. 삼킬 수 없는 뜨거움이 입 안을 가득 채운다.



 잠들지 않는 별들이 머리 위에 떠 있다. 4월이면 더 선명하게 빛나는 노란 별들이 수런대는 소리가 들린다. 파도에 쓸리고 물결에 잠겨 있던 별들이 하나, 하나 하늘에 새겨져 만든 노란 리본의 별자리. 하늘의 별들이 벚꽃이 진 자리로 내려와 초록별들 반짝인다. 이렇게 선명한 별들을, 이름들을  머리에 이고 살아가는 우리는 다행히 살아있는 자들일까, 살아가는 이들일까?










 몇 해 전 꾼 꿈에서 나는 승려 현장을 태우고 가는 낙타였다. 사오정, 손오공, 저팔계가 온갖 소동으로 현장과 함께 요괴들을 물리치며 불경을 가져올 때 묵묵히 그를 태우고 사막을 건너던 중에 통천하를 마주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뜨지 못하는 넓디넓은 강은 그림자조차 삼켜버리는 곳인 데다가 요괴까지 살고 있어서 이곳을 건너는 이들 대다수가 강을 건너지 못하고 요괴밥이 돼버린다. 특히나 인도로 불경을 구하러 가던 구법승들이 많았는데, 금고아로 삼장에게 조련당하던 손오공 덕분에 요괴를 물리친 이들은 강을 건널 방법을 찾아 애태우고 있었다. 그때 구법승들의 해골만은 물에 떠 그들의 뼈로 배를 만들어 강을 건너게 되었다. 달그락거리는 뼈들의 소리, 물결이 찰방이며 스며들듯 차오르다 빠져나가는 위태로운 배에서 낙타인 난 현장의 옷깃을 입에 물고 한편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때아닌 꿈에 잔향처럼 남은 선인장을 씹던 낙타의 비릿한 혈향에 오래 골몰했던 적이 있다. 리를 구하기 위한 탐험은 영웅인 현장이 아닌 그보다 먼저 앞서 희생한 무명씨들이 있어 마칠 수 있었다. 모두들 손오공의 금고아의 반짝임과 현란한 몸짓을 더 기억하지만 말이다. 진리를 향해가던 길에 띄운 배, 그 배의 뼛조각들과 같은 잊혀진 이름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슬픔은 도처에 웅크리고 있다. 잊혀진 마음 안에, 살아가는 시간 안에...

 






 선거가 끝났다. 올해 4월은 조금은 다를 수 있을지. 잊혀가는 이들의 슬픔을 같이 하자 외칠 수 있는 이들이 더 많아질 수 있을런지. 달그락거리는 배 위에 앉아 그림자조차 사라진 사해를 건너는 낙타가 되어 4월을 난다. 느릿하게 곱씹는 가시들이 입안을 채우는 4월. 별빛은 아득하게 쏟아져내려 꽃으로 피어난다. 별들의 목소리를 기억해주길, 간절히 바란다.


 


 





                                                                                                                                                                                                                                                                                                                                                                                                                                                                                                                                                                                                                                                                    











* 같이 듣고 싶은 곡


레미제라블 : I dreamed a dream



https://youtu.be/fYHV2UPF4Fc?si=Mmm0-MNwB4iMAOEd






#세월호10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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