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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o May 09. 2024

꽃잎 우표



 언제였을까요? 아주 어릴 적, 할머니 무릎 옆에 팔을 괴고 드러누워 새우처럼 웅크리고 천천히 바느질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던 어린 날이 떠올라요.   


정성스레 명주실을 손끝으로 비벼 모은 뒤, 혀끝으로 살짝 감아올려 모양을 잡으시죠. 그런 다음 작디작은 바늘구멍에 몇 번의 헛손질 끝에 꽂아 넣으시던 할머니의 잔뜩 찡그린 눈 끝을 보는 게 즐거웠죠. 몰두한 표정이 천진하고

아이 같으셨달까요? 그러다 계속 허탕을 치시면 침침해진 눈을 비비고 한숨을 푹 쉬고서는 제게 바늘과 실을 내미셨어요.   


 아무 말 없이 천들이 맞닿은 사각거림과 굵은 바늘과 명주실이 천 사이를 오가는 서걱거리는 마찰음만이 전부인 몇 시간의 바느질이 끝날 때 즈음이면 언제나 전 꿈나라로 가 있었죠. 그러면 할머니께서는 잠든 저를 살짝 몸을 돌려 바로 눕혀주시고, 가만히 머리를 넘겨주시거나, 아니면 제 귀를 만지작거리셨어요.


 귓바퀴가 밖으로 이렇게 평평하게 까지면 팔자가 사납다고 제 귀를 만지작거리면서 귓바퀴를 말아주시곤 하셨죠. 할머니의 서늘하고 까슬한
손 끝에서 제 귀가 만들어졌어요. 깨가 튀었다고 제 귀를 보고 웃으시던 할머니. 할머니만 알아보시던 귓바퀴 옆 작은 두 점을 보시면 늘 슬며시 웃으시며 내년 봄에 앞마당에 뿌리자고 하셨죠. 신기하게도 말이죠. 할머니 말씀을 알아들었나 봅니다. 이 점들이요. 할머니도 안 계신데 조금씩 커져가요. (점도 살찌는 걸까요? 얘들은 대체 왜... 계속

커지는 거죠?)









 할머니께서 한 번씩 멀리 사는 동생에게 편지를 써달라 하시면서 제게 대필을 시키실 때가 있었죠. 혹독한 글씨 쓰기 연습과정을 거친 덕에 나름 명필이라 자부하던 저였기에 굉장히 근엄하게 앉아, 아니 할머니 앞에 엎드려 종이를 펼쳐놓고 할머니께서 부르시는 말씀들을 또박또박 적어갑니다.


 동생에게 쓰는 편지 속 할머니의 말씀들은 문장도 어색하고 말투도 문법에 어긋나는 것들이 많았지만, 목소리가 만드는 그리움의 결들이 편지지 위에 고스란히 담기기 위해서 고심하며 연필 끝에 침을 발라가며 한 글자, 한 글자.

받아쓰기할 때보다 더 긴장하며 편지를

적어 내려 갔죠.


그렇게 다 쓰고 나면 꼭 할머니께서는 밥풀을 짓이겨 봉투에 발라 편지를 봉했어요. 봄이면 할아버지는 모르실 것 같은 몇 장의 돈이 들어갈 때도 있었고요. 가을이면 말린 나뭇잎이 들어갈 때도 있었고, 겨울이면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한 할머니의 깊은 한숨이 가득 들어가 있을 때도 있었죠. 묵직해진 편지를 우체통에 집어넣기 전
마지막은 제가 늘 마무리해야 했어요. 제일 중요한 우표 붙이기가 남았죠.


 풀을 들고 다니거나, 나름 꼼꼼했던 편은 아니었던 저는 우표를 사서, 혀 위에 가만히 3초쯤 올려놓고 있다가  봉투 위에 붙였어요. 희한하게도 딱풀 바른 듯 잘 붙었죠. 쌉싸레한 풀 맛. 코팅지의 쓴 맛을 혹시 아시는 분 손들어 주세요. 손에 바른 할머니 동동구리모를 멋 모르고 빨았던 입술 끝에서 느껴지는 것만 같던 그 맛. 미슐랭 가이드를 만드는 탐구자도 만나보지 못했을 표현하기 어려운 맛이 혀 끝에 아직도 남아있어요.


 그리움이 주인을 찾아가는 날을 위한 티켓이 우표 같아요. 3일이란 시간 속에 숙성되고 부풀어 올라 찾아간 편지. 가만히 개봉해서 가득 담겨있던 할머니의 그리움을 차분하게 펼쳐내던 이들은 할머니의 밥풀 편지를 얼마나 오래 손에 붙들고 있었을까 궁금해요. '잉?' 이렇게 말끝마다 되묻던 할머니의 채근에 속엣말로 대답을 했을 테죠.


 가만히 피어나 하늘대는 꽃잎들을 마주하고 오래 눈에 담고 있다가 문득 꽃잎을 우표 삼아 편지를 보낸다면... 그럼 어떤 맛이 날까, 이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디든 날아가 주인에게 안길 것 같은 꽃잎 우표. 하늘하늘 곧 떨어질 잎을 찾다가
톡, 바람결에 날리는 잎을 하나 손으로 받아 가만히 혀 위에 올려놓았어요.







 밍밍한 맛, 미세먼지를 머금었는지 살짝 쇠비린내도 나더라고요. 그러다 제 체온과 비슷해지는 순간, 꽃잎에서 달큼한 향이 번져옵니다. 입에서 꺼내 햇살에 잘 영근 기왓장 위에 붙여봤죠. 먼지결 위에 주소를 적어보구요.



 꽃이 피었다는 것도 잊고 있는, 외로운 이들에게 보냅니다. 곧 지나갈 시간, 묵묵히 이겨낼 힘을 갖길 바라며 그렇게 잠시 간절한 바람을 담아, 잊고 있던 우표를 붙여서요.  희망이란 이름으로 내일을 꿈꿔요.


꽃 편지, 받으신다면.


가만히 한번 웃어주세요. 그리고 큰 숨으로 이 향기를 누려보시길요.











* 같이 듣고 싶은 곡


한올 : 새벽통화


https://youtu.be/Q-drDBMB7tI?si=yA-ezk-OXVRRyWN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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