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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o Jun 16. 2024

우리의 인연

- 서로 다른 마음의 속도가 만든





 아침 지하철 안, 붐비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 아주 얕은 호흡으로 숨을 쉬고 있었죠. 여름이라 짧아진 소매들 덕분에 가까이 선 사람과 살갗이 스칩니다. 맨 살에 닿은 느낌이 선뜩해 저도 모르게 움찔 뒤로 물러서죠. 그래봐야 또 다른 사람벽에 부딪혀 금세 튕겨져 나오지만요. 8천 겹 전생의 인연이 있어야 지금 이렇게 맞닿을 수 있는 '인연'이란 것이 생긴다는데, 시골살이 중인 저에게는 밀도 높은 지하철 안에 갇힌 지금 이름 모를 스침들이 갖는 인연의 무게를 생각할 겨를이 없이 숨만 허덕거리며 쉬고 있었죠. 옆에 있는 사람이 저를 힐끗 바라봅니다. 혹시 이상한 여자인 줄 아는 건 아니겠죠? 다른 사람 등 뒤에 찰싹 붙어 서서 숨을 몰아쉬고 있으니까요.




 보고 있던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를 블루투스 이어폰탭 해서 재생합니다. 화면은 보이지 않고 주인공들의 목소리만 귓가를 파고들죠. 화면으로 볼 때는 보이지 않던 틈이 보입니다. 목소리만으로 그들이 있던 상황, 장소, 음악, 불던 바람의 방향까지 그려보니 더 흥미로워집니다. 여러 번 보았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이렇게 감은 눈 뒤로 펼쳐지는 제 앞의 무대에서 다시 재생되는 그들의 인연의 결이 두텁고 밀도 있게 다가오는 것이 또 다른 경험이네요.






                                                                      



 12살의 나영과 혜성은 단짝친구죠. 모든 일에 이기고 싶은 욕심 많고 재능 있는 나영과 말이 없이 묵묵하게 자기 할 일 잘 해내는 혜성. 나영이 뉴욕 이민을 가게 되며 둘은 헤어지게 됩니다. 24살 빛나는 청춘을 보내던 나영은 우연히 영화감독인 자신의 아버지 홈페이지에 자신을 찾는 혜성의 글을 보게 되고, 그에게 연락을 하죠. 풋풋하고 꿈 많은 그들은 어린 시절의 호감을 그대로 기억하며 서로에게 설레어합니다. 뉴욕과의 시차를 고려해 서로 기다려주고 배려하며 어떻게든 연락을 하려고 노력하죠. 통신상태가 좋지 않아 버퍼링이 자주 되고, 이메일로 소통을 해야 하는 중에도 서로의 얼굴만 보이면 환하게 웃는 그들이 참 아름다웠죠. 그러나 같이 할 수는 없었던 그들.









 다시 12년이 흐릅니다. 시간의 배열이 참 정교해요. 한 번에 24년을 뛰어넘었다면 그저 서먹함만이 정적으로 둘 사이를 맴돌 텐데, 눈부신 날들의 기억들이 서로에게 남은 상태에서 단절된 연락 이후 이렇게 만나니 세월이 묻은 얼굴이지만 서로를 본 순간 다시 그들은 24살의 자신에게, 그리고 12살의 자신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며 미소를 짓더군요. 처음에 보자마자 한마디 해요.



 "와, 너다!" 다른 어떤 부연 설명도 필요 없는 평이한 말이지만 그 속에서 되려 더 깊은 감동이 전해져 와요. 너다!라는 이 말로 특정 지을 수 있는 인연이 몇이나 되셔요? 사회적 관계로 만난 사람들 사이는 멀고 어색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파악도 안 될 때가 많거든요. 그래서 그런 관계들은 만나도 만나도 낯설고 어색하고 때로는 불편하죠.








 이들이 같이 걷고, 이야기하는 2일의 시간 속에서 우리가 맺고 살아가는 인연의 깊이와 그리고 그 인연에 감사하는 법, 정중하게 작별인사를 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갑작스레 단절된 관계들로 힘들어하던 어린 날의 마음에도 평안과 안식이 자리할 수 있는 아름다운 안녕인사. 전하지 못했던 인사들을 말이죠. 꿈속에서 한국어로만 잠꼬대를 하는 아내 노라(나영)를 바라보며, 자신이 닿지 못하는 그녀의 영역이 궁금하고 두렵기도 하던 남편 아서와 나영을 찾아 뉴욕까지 온 혜성. 그 둘이 나누는 서툰 인사 또한 다정한 시선으로 화면에 담겨있어요.



 서로에 대한 존중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인연에 대해 인정을 할 수 있는 용기도 보여주죠. 인상적인 오프닝 장면에서 시작된 나영과 혜성, 두 사람을 오가는 카메라에는 다정한 색감의 화면톤과 세심하기 그지없는 장면구성이 담겨있어요. 보는 내내 설레고 조금은 안타깝고, 또 조금은 슬퍼지던 시간이었죠.




 
나영 : 네가 기억하는 나영이는 존재하지 않아.

혜성 : 알아.

나영 : 근데 그 어린애는 존재했어. 네 앞에 앉아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없는 건 아니야. 20년 전에 난 그 애를 너와 함께 두고 온 거야.

혜성 : 알아. 그리고 그때 내가 겨우 12살이었지만 그 애를 사랑했었어.

 나영 : 또라이네.

 혜성: 내 생각에는 우리, 전생에 뭔가 있었어. 아니면 우리가 왜 지금 여기 있겠어?

나영 : 근데 우린 이번 생에는 서로에게 그런 사람이 될 인연은 아닌 거야. 왜냐면 우리가 거의 20년 만에 처음으로 같은 도시에 있는데...

혜성 : 여기 니 남편이랑 함께 있는 거지. 이번 생에는 너랑 아서랑 그런 인연인거지. 팔천 겹의 인연이 모인 사람인 거야. 그리고 아서에게 너는 곁에 남는 사람인 거야.

나영 : 전생에 우린 누구였을까?










 엔딩 장면에서 이 답을 들을 수 있죠. 우버를 기다리며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던 나영과 혜성. 드디어 도착한 우버에 탑승하려던 혜성은 뒤돌아 나영에게 묻습니다. 아주 어릴 적, 골목길에서 헤어지던 날처럼요.




 
혜성 : 야, 나영아! 이것도 전생이라면 우리의 다음생에서는 벌써 서로에게 다른 인연인 게 아닐까? 그때 우리는 누굴까?

나영 : 모르겠어.

혜성 : 나두.

나영 : 그때 보자.





 혜성이 떠나고, 그가 자신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길을 바라보던 노라는 뒤돌아 걷죠. 자신의 남편 아서가 있는 곳을 향해서요. 바람이 계속 그가 떠난 자리로 밀어보내도 그녀는 자신의 시간 속으로 걸어옵니다. 늘 울보였던 어린 날의 나영이 되어 울며 집에 돌아오죠. 그렇게 걸어 도착한 집 앞에서 미리 나와 기다리던 아서의 품에 안깁니다. 그런 노라를 다독여주는 '사악한 백인남편' 아서와 함께 그녀는 집으로 들어가죠.



 마침내, 오랜 시간이 걸린 그들의 안녕이 이루어진 순간입니다. 귓가에 마지막 저들의 대화, 그리고 흐느끼며 안기는 노라를 다독이는 아서의 다정한 도닥임이 들립니다. 일부러 혜성과 같이 있을땐 나영이란 우리 이름을, 아서와 함께 있을 때는 노라라는 이민가서의 이름을 사용했어요. (다른 사람인 줄 아시면...)



 우리 삶에서 인연이란 무엇일까요? 어떤 이에게는 한생이 걸려서도 닿지 못할, 어떤 이에게는 너무나 가벼워 금방 잊혀질, 또 어떤 이에게는... 다양한 무게와 얼굴로 찾아오는 모든 인연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드는 셀린 송 감독의 영화, 참 좋습니다.





여러분의 인연은 안녕하십니까?





 딩크레딧이 올라가는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지금, 지하철은 목적지에 다 와간다 알리네요. 지금 제 정수리에다 담배냄새 섞인 호흡을 계속 내뿜는 아저씨는 저와 전생에 어떤 인연이었을까요? 8천 겹 따위 저리로 던져버리고 싶군요. 다음번 서울에 온다면 며칠 머리를 감지 않고 와볼까 고민이 생깁니다. 그렇게 하고 지하철에 탄다면, 모세의 기적같이 제 주변에 사람이 없어지는 그런 일이 좀 생기지 않을까요?












* 같이 듣고 싶은 곡


패스트라이브즈 O.S.T.



https://youtu.be/-B--H6teZ-s?si=kWs9IXuitKxvOSlE








#패스트라이브즈

#유태오흥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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