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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o Jun 24. 2024

의미의 무게




 옛 말에 '까마귀 고기를 먹었나'란 속담이 있는디말여. 들어는 봤냐? 까마귀가 어느날 염라대왕이 급하게 인간세상의 모든 일을 맡아 보는 강도령에게 서한을 전해야 되서 까마귀를 불렀어. 미덥잖은 놈인디 어쨌든 시킬 놈이 원체도 없었나벼. 편지를 물고 인간 세상에 내려 온 요 까마귀 놈이 강도령한티 바로 가야는 걸 잊어버리고, 냄새에 홀려서 말고기를 뜯어먹느라 편지도 바람에 잊어버리고 고기만 뜯다 할 일을 잊어버렸다나벼. 그럼 잘못했다 이실직고하고 편지를 다시 받아올 것이지, 혼나는게 무서워서 아무렇게나 꾸며대서 지 혼나는 것만 면피할라고 잔대가리를 굴렸지. 늬들이 하는 것마냥. 그때부터 쓰는 말이 이 말이여.



우리는 그런 적 없거든요오오오?



없기는. 발뺌은 겁나게 잘혀. 여튼, 강도령헌티 이것이 전한다는 말이, 순서 없이 그냥 아무나 잡아들이라고 염라대왕이 전하랬다고 한겨. 아무나 말여. 그래서 그때부터 살다가 순서 되면 하늘나라 가는가 보다 하고 누군가 죽어도 슬퍼하지 않았던 인간들이 까마귀 놈 때문에 아무나 갑자기 하늘로 불려 올라가니 그렇게 원통해하고 곡을 하고 그러는가. 광주민주화운동 때 어린애들 죽은 관 붙들고 애처롭게 울고 있는 이 엄뉘 사진 봤냐, 그렇게 갑작스럽게 사랑하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없어져 슬픈 이유가 망할 눔의 권력욕이 오지게 들어찬 머리 빡빡이 놈하고, 저 고기 먹다 헐 일 잊은 까마귀 놈 때문이라고. 알았어?











 제 고등학교 때 역사선생님은 굵직한 붓으로 사람을 그려놓은 것처럼 거친 선이 가득한 호방한 풍모의 멋진 남자선생님이셨죠. 늘 열강을 하시면서 다양한 세계사와 역사 속 장면들을 우리에게 실감 나게 전달해 주셨어요. 선생님께서 처음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 듣던 날이 떠올라 이렇게 기억을 헤집어 보았죠. 우리에게 로열젤리라 우기시며 비말을 고루고루 투하해 주시사 늘 은혜의 단비를 맞게 해 주시는 것도 거뜬히 용서가 될 정도로 다양한 지식들을 우리들에게 전해주시는 선생님이었죠.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해선 저렇게 에둘러 말씀을 하셨어요. 당시만 해도 제가 사는 동네의 어른들은 저 일이 북한 남파 간첩들이 광주시민을 선동해 벌인 사건이라 믿고 있는 분들이 많았거든요. 그런 곳에서 아이들에게 좀 더 자세하게 수업을 진행하셨다가 교장실에 불려 가기까지 했었죠. 그때는 그랬어요. 아는 이들이 아무리 아니라고 울분을 토하고 이야기해도, 그렇다 이미 믿어버린 이들에게 이 일은 다른 나라 이야기처럼 멀게만 느껴졌고 그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던 때였죠.










 뉴스를 보았죠. 3년 전의 이야기예요. 1980년 5월 당시 광주에 투입됐던 계엄군 간부가 41년 만에 처음으로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아가 참배를 하겠다는 기사였죠. 5·18 기념재단에 따르면 당시 제3공수여단 11대대 소속 지역대장 신순용 전 소령이 이날 오후 민주묘지를 방문해 자신이 총으로 쏘았던 시민들에게 사죄를 하고 싶다는 뜻을 비췄다더군요.



 군복을 갖춰 입고 찍은 사진 속 그의 눈빛을 가만히 쳐다보았어요. 정지된 사진 속 눈빛은 힘이 없어요. 그 말을 하던 당시 그의 심정이나 말투, 어조 등은 담겨있지 않기에 화면 만으로 만나는 그에게 단죄의 잣대를 들이대고 싶지는 않았죠. 다만 정말 속죄하고 싶다면 그들이 시민들을 쏘았던 장소나 그로 인해 다치거나 혹은 죽었던 시민들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고백 등을 먼저 해야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40년 만에 용기를 낸 초로의 노인에게 너무 냉정한 거 아니시냐 묻는 분들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이런 기사도 읽었거든요. 당시 광주에서 시민군이 조직이 되고 그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리며 도시가 본격적인 비극의 현장이 되어갈 때 군의 그 명령을 단호하게 거부했던 분에 대한 이야기죠. 바로 5·18 때 군의 전차 동원 지시를 거부한 고 이구호(1933~1999) 장군입니다.  80년 5월 21일 계엄군의 집단발포 이후 시민들이 무장하기 시작했던 날, 1979년 7월 광주 전투교육사령부 육군기갑학교장(준장)이던 이 교장선생님은 신군부 핵심의 전차 동원 지시를 거부했다고 해요. 당시 황영시 참모총장이 직접 전화해 요구한 일이었는데 말이죠.



신군부 광주진압 관련자들은 이후로 승승장구해서 국방부에서 5·18 민주화운동 진압에 참여해 전두환한테 훈포장도 받은 이들이 정호용·황영시 등 무려 52명이나 된다죠? 그러나 이 교장선생님은 81년 5월 군복을 벗었어요. 이후 홍성직업훈련원 원장, 대전직업훈련원장 등을 잠시 맡았다가 동생과 함께 '무궁화 주유소'를 운영하시기도 했대요. 이 분의 이야기가 알려진 것도 얼마 되지 않아요. 부인께서 자식들이 아버지께서 군에서 일했던 것을 일체 이야기 하지 못하게 군복까지 태워버렸었대요. 그렇게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어떤 외압에도 복종하지 않았던 분도 있었어요. 그래서 뒤늦은 속죄에 대해 냉정한 시선을 보내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 "속죄"에서 이런 대사가 나와요. 영화 어톤먼트의 원작소설이죠.  




브리오니도 전쟁도 그들의 사랑을 파괴하지는 못했다. 이 사실이 도시 아래로 더 깊숙이 가라앉고 있는 그녀에게 위로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알고 있었다.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새로운 원고, 속죄를 써야 했다. 그리고 이미 그녀는 시작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 이언 매큐언 속죄 중 문학동네, p431






진정한 속죄는 무엇일까요?






누군가에게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의미의 무게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을 테죠.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 우리 마음속에 있는 저울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을 테고요.


 

 의미는 늘 변형이 됩니다. 형태 자체가 없는 것이니까요. 이해관계 속에 흩어진 주체들의 행동이 시간이 흘러 역사 속에 기록된 날들에 대한 사람들의 검증과 끊임없는 탐구로 재평가되고 있는 요즘. 한걸음이 더 진중해지는 때라 생각이 듭니다. 요 며칠간의 기사들을 읽고 책을 뒤적이다 "속죄"라는 단어의 경중에 발이 묶여버린 날입니다.



 올려진 사진들은 임길실 작가의 21년도 모산미술관 5월 전시 작품들이에요. 묵혀둔 작품들을 커다란 화면으로 보면 아직도 색들의 오묘한 번짐에 빠져들죠. 연기의 움직임을 다양한 색과 형태로 화폭 위에 옮겨놓은 멋진 작품들이에요. 어떤 것에도 통제받지 않고 부유하는 연기들을 그리며 작가는 자신의 마음속 깊은 상처가 치유가 되고, 상대를 대할 때 너그러워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고 해요.






 억압 속에 살아가고, 내가 아닌 남을 위해서 살아가는 날들이 더 많은 우리들이지만 연기를 화폭에 담아낼 때만큼은 무형의 선들이 확장되는 다양한 공간들로의 자유로운 걸음이 끝없이 이어질 수 있기에 작가는 그림 속에서 진정한 자유인이 된다고 해요.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노매드가요.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맺혀있는 원한과 그리움, 치유되지 않은 아픔들이 진정한 속죄를 통해서 작가의 작품 속 너울너울 풀어진 실타래 같은 연기처럼 그렇게 다 홀가분하게 날아가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명백한 사건에 대해 인정하지 않고 덮어두려는, 국민이 심판자임을 잊은 이들의 가면 또한 진실 앞에 제대로 벗겨졌으면 좋겠구요.









작가명 : 똥오기








* 같이 듣고 싶은 노래


영화 어톤먼트 O.S.T 중 Farewell


https://youtu.be/oJbvTwmuN_g?si=oaSIgTIOJA5g8_Pq




#임길실작가

#의미의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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